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용어 사용한 안티오키아 교회
안티오키아에서 발생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곳에서 처음으로 예수의 추종자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부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신약성서에 세 번 나오는데, 사도행전 11장 26절, 26장 28절, 그리고 베드로 전서 4장 16절이다. 여기서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는 사람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이 용어를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가 받아들이면서, 교회 안에서 전면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결국 ‘그리스도인’이란 ‘하느님의 백성’이며, ‘그리스도의 집안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들은 한때 안티오키아와 튀르키예 전역에 걸쳐 융성했으나, 이슬람의 발흥으로 사실상 이 지역에서 궤멸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에 대한 도전은 튀르키예에서만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유럽처럼 그리스도교가 오랫동안 장악한 곳에서도 도전은 계속되고 있다.
그리스도교 영토로 치부되던 유럽에서, 버트런드 러셀은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아닌가>라는 책에서 “내가 보기엔 그리스도교에 매달려온 사람들이 대부분 사악했다”고 비판했다. 누구나 그리스도교를 믿었던 신앙의 시대에 고문기구를 갖춘 종교재판소가 있었으며, 수백만의 불운한 여인들이 마녀로 몰려 불태워졌다고 고발했다. 인간의 정서적 발전, 전쟁의 감소, 유색 인종에 대한 처우개선, 노예제도의 완화를 포함해 “이 세계에서 단 한 걸음이라도 도덕적 발전이 이뤄질 때마다 세계적으로 조직화된 교회 세력의 끈덕진 반대에 부딪히지 않았던 경우가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이다.
개인의 선행에 온 기대를 걸고 있는 고루한 교회는 “오늘날까지도 뇌물을 받는 정치가보다 간음한 여자를 더 사악하게 여긴다”고 러셀은 비난했다. 타락한 정치인이 음탕한 여인보다 우리 사회에 더 큰 해악을 끼친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해온 게 교회였다. 또한 교회는 어느 누가 국가재정이나 형법이나 사법제도를 개혁했다고 해서 그 사람을 성자로 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인류 복지에 기여하는 것보다 단순히 개인적 성덕만을 높이 평가한다는 것이다.
러셀은 콘스탄티누스 시대부터 17세기 말까지 쉼없이 이어진 그리스도인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박해가 과거 로마황제들의 박해보다 훨씬 더 혹독했다고 비판하며 “현대의 그리스도교인들은 보다 덜 사나운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은 그리스도교 신앙 덕분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전통을 부끄럽게 만들어온 수세기에 걸친 자유사상가들의 덕분”이라고 말했다. 최근까지도 비오 10세 교황의 <오류목록>에서 드러나듯이, 교회는 100년 전까지도 이 자유사상가들을 단죄해 왔다. 심지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열었던 요한 23세 교황조차도 사제 시절에는 ‘근대주의 혐의가 있다’는 이유로 교황청 블랙리스트에 올라와 있었다.
그리스도교에서 인정하는 성인들보다 더 훌륭한 삶은 “사랑에 의해 고무되고 지식에 의해 인도되는 삶”이라고 러셀은 말한다. 러셀은 무신론자로서 사랑과 지식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있다.
“중세 시대에는 어떤 지방에 페스트가 돌면 성직자들은 그곳 주민들에게 교회에 모여 악령을 쫓아내달라고 간청하는 기도를 올리게 했다. 그 결과, 간청하기 위해 모인 군중들 사이에 전염병이 엄청난 속도로 퍼졌다. 이것은 지식 없는 사랑의 일례다. 세계대전의 참화는 사랑 없는 지식의 일례다. 어느 경우든 결과는 대규모의 죽음이었다.”(<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사회평론, 2008년 개정판 6쇄, 85쪽)
그러나 러셀은 지식보다 사랑이 근본적이라고 말한다. “사랑은 지성인들로 하여금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혜택을 줄 방법을 찾아낼 목적으로 지식을 추구하도록 이끌어주기 때문이다.” 유능한 의사는 환자에게 헌신적인 친구보다 쓸모 있고, 의학지식의 발전은 박애행위보다 훨씬 많은 일을 한다. 그러나 과학적 발견이 부자들에게만 혜택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면 ‘자비’가 더 필수적이라는 게 러셀의 생각이다.
예수를 추종한다는 것, 산상설교의 구체적 적용
신앙이 없이 ‘구원’을 논했던 러셀의 도전에 답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비판적 자기성찰’이 요구된다. 독일 신학자 한스 큉은 <그리스도교―본질과 역사>(분도출판사, 2002)에서 “무엇이 사람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가?” 하고 물었다. 한스 큉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삶의 척도로 삼아 그분의 영이 이끄시는대로 사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신앙은 과학이나 철학과 다르게 “실천을 겨냥하는, 먼 길에 나서라고 외치는, 새로운 삶을 선사하고 가능케 해 주는 진리”라고 말한다.
결국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를 추종하는 것’이다. 이제는 예수의 제자들처럼 방방곡곡 예수를 따라다닐 수는 없지만, 같은 예수의 제자로서, 예수와 한 몸처럼 복음에 따라 자신의 삶을 가꾸어가야 한다는 뜻이다. 한스 큉은 “내가 이해하기로는 예수의 복음은 산상설교에 담겨 있다. 내 마음의 지배권을 놓고, 산상설교의 정신이 <바가바드기타>와 경쟁을 벌이고 있다. 내가 예수를 사랑하게 만든 것은 이 설교다”라고 말한 마하트마 간디의 말에 주목했다. 산상설교는 그리스도인이나 비그리스도인이나, 레프 톨스토이나 슈바이처의 마음까지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한스 큉은 “눈이 죄짓게 하거든 빼어던지시오!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하시오! 형제와 먼저 화해하시오!” 등의 요구들을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삶에서 구체적으로 적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예수의 철저한 요구는 개인이나 집단이 쉽게 실천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이를테면 천 걸음을 함께 가자는 사람이 있거든 2천 걸음을 가는 ‘타자를 위한 자기 포기’,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이 있으면 겉옷마저 벗어주며 ‘자기 손해를 감수하는 힘의 포기’, 오른뺨을 때린 사람에게 왼뺨도 내어주는 ‘대응폭력의 포기’ 등이다.
그러나 한스 큉은 이러한 예수의 요구를 율법적으로 알아들으면 안 되고 말한다. 뺨을 치는 것에는 맞받아쳐서는 안 되지만, 배를 때릴 때는 보복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그 요구들은 “인간을 위해, 그때그때 처한 상황에서 하느님의 뜻을 철저히 실현하라는 강력한 호소”라고 말한다. 결국 이 복음적 요청의 바닥에는 ‘사랑이 율법을 완성한다’는 바울로의 확신이 담겨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말을 “사랑하라, 그리고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멋진 말로 표현했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율법이 아니라 ‘사랑을 위한 새로운 자유’다.
이러한 사랑할 자유를 한스 큉은 저자 불명의 대구(對句)를 통해 보여 주었다.
사랑 없는 의무는 짜증나고 사랑 품은 의무는 끈기있네
사랑 없는 책임은 가차 없고 사랑 품은 책임은 정성스럽네
사랑 없는 정의는 무정하고 사랑 품은 정의는 든든하네
사랑 없는 교육은 대들게 하고 사랑 품은 교육은 너그럽네
사랑 없는 총명은 교활하고 사랑 품은 총명은 참으로 아네
사랑 없는 친절은 역겨웁고 사랑 품은 친절은 자비롭네
사랑 없는 제도는 편협하고 사랑 품은 제도는 관대하네
사랑 없는 지식은 독선적이고 사랑 품은 지식은 믿음직하네
사랑 없는 권력은 난폭하고 사람 품은 권력은 도움주네
사람 없는 명예는 교만하고 사랑 품은 명예는 겸손하네
사랑 없는 소유는 인색하고 사랑 품은 소유는 아끼지 않네
사랑 없는 믿음은 광적이고 사람 품은 믿음은 온화하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유튜브 채널 <한상봉TV-가톨릭일꾼>에서 강의 동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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