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란 주제를 중심으로 성경을 훑어 가노라면, ‘그리스도교 예배’는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실천하는 예배에 대한 심각한 문제 제기로부터 시작한다는 점을 알아차리지 않을 수 없다. 율법 준수와 은총의 날카로운 대조에서 의화 교리의 토대가 마련되고, ‘문자’와 ‘영’의 선명한 구별이(“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영은 사람을 살립니다”[2코린 3,6].) 초세기 교우들의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를 가능하게 했다. 같은 맥락에서 ‘영적 예배’ 역시 통상 예배와의 확연한 대조로 말미암아 그 그리스도교적 진정성과 중요성이 드러난다.
의례의 육화와 내면화
구약의 예언자들은 삶과 유리된 예배의 위험성에 대해 듣기 불편할 정도로 직언을 쏟아냈다. 공정의 실천과 거기서 비롯되는 평화야말로 하느님께서 반기시는 참예배라는 것이다. “나는 너희의 축제들을 싫어한다. 배척한다. 너희의 그 거룩한 집회를 반길 수 없다. … 다만 공정을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아모 5,21-24). 이 말씀은 그저 빙산의 일각일 따름이다(기록 연대순으로 이런 계열의 말씀만을 대략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호세 6,6; 미카 6,6-8; 예레 7,4-7; 이사 1,11-17; 1사무 15,22; 이사 58,6-8 등. 신약성경의 야고 1,27도 이 맥락에 있다).
이런 구절들은 참된 예배라면 반드시 삶의 구체적 면면에 ‘육화’(incarnation)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우선 일러 준다. 나아가, 그것이 가능하려면 어떤 식으로든 내면화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사실도 짚어 준다. “진정 말씀을 듣는 것이 제사드리는 것보다 낫고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숫양의 굳기름보다 낫습니다.”(1사무 15,22),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호세 6,6) 같은 말씀이 이런 생각을 뒷받침한다.
“영과 진리 안에서” 드리는 “합당한” 예배
“너희가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 그러나 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이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요한 4,21-24).
“영과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란 과연 무엇이며 어떻게 바쳐야 할까? 로마서의 다음 말씀이 이해에 도움을 주는 듯하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12,1).
“합당한 예배”의 원문은 ‘로기케 라트레이아’(loghike latreia)로서, 「공동번역 성서」에는 “영적 예배”로 번역되어 있다. 로기코스(loghikos)는 ‘합당한, 적절한, 이성적인’ 등으로 새길 수 있는 말인데(로고스[logos, 말씀]가 그 명사형!) “형식적이고 외적인 예배와 인간 전체가 투신되는 참 예배의 차이를 드러내고자 유다인 저자들과 그리스 저자들이 자주 사용하는 용어”이다(「주석성경 신약」, 593쪽, 각주 4). 결국, “영과 진리로” 바치는 예배와 “합당한 예배”는 장소나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우리 삶 전체를 하느님께 바치는 일이란 사실이 분명해진다.
진리에 몸 바치다
제자들이 “진리로 거룩하게 해” 달라고 청하시는 예수님의 기도 또한 ‘영적 예배’의 맥락에서 더 잘 이해된다(요한 17,17-19 참조). 「공동번역 성서」에서 같은 구절을 “이 사람들이 진리를 위하여 몸을 바치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새긴 것은 실로 깊은 ‘영적 이해’의 소산이었다.
다음의 히브리서 구절 또한 꼭 같은 맥락에서 빛을 발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실 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제물과 예물을 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저에게 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당신께서는 기꺼워하지 않으셨습니다’(히브 10,5-6). 이어지는 구절에 계속 인용되는 시편의 최민순 신부 역본은 이해를 한결 심화시켜 준다.
“희생과 제물은 아니 즐기시고, 오히려 내 귀를 열어 주시며,
번제나 속죄의 희생일랑 드리라 아니 하셨사오니
그때에 나는 아뢰었나이다. ‘보소서 이 몸이 대령했나이다
나를 들어 두루마리에 적혀 있기를,
내 주여, 내 기쁨은 당신 뜻을 따름이오니,
내 맘 속에 당신 법이 새겨져 있나이다’”(39[40],7-9).
삶으로 거행하는 성찬
초세기부터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이 강조한 ‘영적 예배’를 깊이 알아듣고 실천했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가 로마로 압송당하며 로마 교우들에게 구명 운동을 펼치지 말라고 당부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는 곧 다가올 죽음(순교)을 “하느님의 밀”인 제 몸이 맹수의 이빨에 갈려 “그리스도의 깨끗한 빵”이 되는 일로 알아들었다(「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 4). 그 제자 폴리카르포의 순교도 “그리스도의 잔에 참여”해서 “살진 희생 제물”로 제단에 바쳐져 “불속에 향기롭게 구워진 빵”이 되는 일로 묘사된다(「폴리카르푸스 순교록」, 13,3―14,2).
18세기 중반 남미 예수회 선교사들을 다룬 영화 <미션>에도 예배에 대한 ‘영적 이해력’이 돋보이는 장면이 있다. 가브리엘 신부가 과라니족 아이들과 함께 성체 행렬을 하면서 포르투갈 군인들의 무차별 포격과 총격에 숨지는 장면이다. 1996년 알제리에서 순교한 트라피스트 수도자 크리스티앙 신부는 현대 영성의 걸작이 된 그의 「영적 유서」에서 “내 삶은 하느님과 이 나라에 바쳐졌습니다.”라고 썼다(그는 ‘바쳐졌다’는 낱말의 철자를 모두 대문자로[DONEE] 써 놓았다!).
‘영적 예배’를 실천하려고 꼭 순교자가 될 필요는 없다. 동사 ‘감사하다’ (eucharisteo)의 명사(eucharistia)가 ‘성체성사’란 뜻으로 정착되었음을 감안하면,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1테살 5,18)란 바오로 사도 말씀은 “모든 일에 미사를 거행하십시오.”라 번역해도 된다. 그렇다. 미사뿐 아니라 전례 기도와 개인 기도의 종착점이 바로 ‘모든 일’ 곧 일상이다. 인생 전체가 삶의 현장에서 하느님과 이웃에게 바쳐지지 않고서는 그 어떤 기도도 ‘영적 예배’가 될 수 없을 터.
영성 생활의 심화와 쇄신을 위해 오늘 교회와 신앙인이 곱씹고 곱씹어야 할 질문은 자명하다. “지금 우리가 바치는 예배는 얼마나 ‘영적’이며 따라서 얼마나 그리스도교적인가?”
* 이 글은 <경향잡지> 2023년 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이연학 신부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수도원 창설 소임을 받고 미얀마 삔우륀에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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