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국 어느 중소 도시 식당에서였다. 5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주인장이 몸소 음식을 손님 식탁에 나르고 있었다. 손님들의 갖은 요구에 한결같은 표정과 목소리로 응대하는 자세가 예사롭지 않아 은근히 감동하던 순간, 가게 한구석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소박하게 써서 걸어 놓은 붓글씨를 보게 되었다. ‘진심’(眞心). 순간, 심장이 쿵 떨어지는 듯한 감동을 받았다. ‘누군가가 그저 자기 진심에 충실하고자 어떤 일을 한다는 데 이런 힘이 있는 것이로구나.’ 하는 새삼스러운 깨달음이 왔다. 모두의 마음 깊이 숨은, 진정성을 향한 그리움을 일깨우는 식당 주인의 ‘진심’이 고맙고 또 고마웠다.
‘증언’( martyria)이란 구약성경에서 대체로 재판정에서 자기 경험을 사실대로 진술하는 일을 뜻하는 법정 용어였다. 그러다가 신약성경에서 점차 뜻이 풍성하고 깊어지면서 초기 교회 문헌에서는 마침내 ‘순교’와 동의어가 되기에 이른다. 법정에서 행하는 언어적 진술을 넘어, 한 사람의 ‘진심’ 또는 진정성을 지순하게 드러내는 인격 전체의 표현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증언은 복음 선포 또는 ‘선교’가 되고, 이 선교는 마침내 ‘순교’에 도달하여 극진한 열매를 맺는 의미 확장의 과정을 관찰할 수 있다. ‘계약’이란 법률 전문용어가 하느님과 동료 인간과 맺는 전폭적 보살핌과 신뢰 관계를 표현하는 압도적 중요성의 신앙 용어가 된 것과도 궤를 같이한다.
진정성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에서는 ‘증언’이란 말이 무려 100회 이상 등장한다. 이 말마디가 그리스도인 존재와 실천을 한마디로 요약해 주는 표현이었다. 나아가 1975년 바오로 6세 교황은 아래와 같은 말씀을 남긴다.
“현대인은 스승의 말보다 좋은 표양을 주는 사람의 말을 기꺼이 듣습니다. 스승의 말을 듣는다면 스승이 좋은 표양을 주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현대의 복음 선교」 , 41항 ).
가르치는 사람보다 증언하는 사람의 말이 주는 울림이 더 큰 이유는, 바로 ‘진심’ 때문이 아닐까.
진심 어린 증언에 대해 생각하면 늘 먼저 떠오르는 분들이 계시다. 1996년 알제리에서 순교하시고 얼마 전 시복되신 일곱 명의 트라피스트 수도자들이다. 그들의 수도원이 있던 작은 시골 마을 티비린은 대대로 이슬람교도들이 사는 곳이었다. 수사들은 그런 마을 사람들과 형제로 지내며 열심히 자기들 손으로 일해서 생계를 해결했다. 알제리에 내전이 터지자 정부뿐만 아니라 수도회에서도 철수를 권유했다. 형제들은 몇 차례에 걸친 회의 끝에 그곳을 떠나지 않기로 한다. 그리고 그들은 얼마 뒤 괴한들에게 납치되었고, 몇 달 뒤 결국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이 일련의 과정이 약 10년쯤 전 나온 영화 <신과 인간>에 잘 묘사되었다.
그들이 티비린 마을을 떠나지 못한 이유에 대해 꽤 오래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마을 사람들이 교우도 아닌 이슬람교도들이란 사실은 이해를 더 어렵게 만드는 점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하여 영화에서, 마을 사람들과 수도자 한 사람 사이에 오가는 대화가 나온다. 영화의 다른 부분이 대부분 그렇듯 이 장면 또한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들었다.
수도자들이 떠날지 남을지 아직 결정하지 못하고 있을 즈음, 마을의 가게에서 수도자를 만난 한 부인이 불안한 기색으로 언제 떠날 것인지 묻는다. 그러자 그 형제는, “가지 위에 앉은 새가 언제 날아갈지 모르듯이 우리 수도자 또한 언제 떠날지 아무도 모릅니다.” 하고 사뭇 시적으로 대답한다. 그러나 이 말에 대한 시골 아낙의 대꾸가 압권이었다. “아니에요, 수사님, 당신들은 가지이고 우리가 그 위에 앉은 새들입니다. 가지가 사라지면 새는 어디에 앉아야 하나요?”
영화에서는 떠날지 남을지를 두고 치열하게 고뇌하고 논쟁하는 수도자들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잘 묘사된다. 죽음의 두려움과 공포도 진심이었고, “착한 목자는 양 떼를 버리지 않는다.”는 형제애도 진심이었다. 결국 그들은 안전한 ‘상식적 판단’보다는 내면 깊숙이 울려오는 복음적 양심의 소리를 선택했다. 그리고 그 선택의 마지막은 필경 ‘순교’로서의 복음 증언이었다.
이 일곱 복자의 증언은 그리스도교 영성의 역사에 범상치 않은 의미로 깊은 흔적을 남겼다. 특히, ‘종교’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다른 종교인들 안에서도 죽음에 이르도록 그리스도의 현존을 뵙는 자세는 연대와 연민의 영성을 넘어 그리스도교 관상의 마지막 지점이 어디인지 잘 보여 주는 듯하다.
복음 증언과 자기 증명
이런 증언이 어떻게 가능할까? 내 한 몸 안에서도 그것이 가능하기는 할까? 일곱 트라피스트 수도자뿐 아니라 다른 많은 순교자도, 특출한 영적 엘리트이기보다는 거의 나같이 ‘평범한’ 분들이었음이 틀림없다. 그리고 이런 사실 확인은, ‘나는 꼭 그렇게까지는 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겸손을 가장한 ‘비겁’이란 사실을 알게 한다.
내 경우 선교지에서 겪는 가장 큰 유혹 가운데 하나가 ‘자기 증명’의 욕구가 아닌가 한다. 어떻게든 무언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강박은 특히 자기 위치가 불안정하다고 느낄 때 강하게 찾아오는 유혹이다.
하는 일을 통해 자기 존재의 가치를 확인하고 증명하려는 유혹은 끈질기고 힘이 세다. 그럴 때, 나는 ‘하느님의 일’을 한다고 강변하지만 조금만 정직하게 들여다보면 그저 말에 그칠 따름, 사실 ‘내 일’에 몰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작년, 쿠데타까지 겹쳐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던 때 바로 그런 성찰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은총이었다.
어쩌면, 증언이란 자기 증명의 유혹에만 빠지지 않으면 절로 되는 것인지 모른다. 그것만 없으면, 하느님의 나라와 현존은 의외로 쉽고도 맑게, 이 부족하고 결점투성이 한 몸에서도 증언될 수 있을지 모른다.
내가 하는 것이 증언인지 자기 증명인지 알려 주는 한 가지 표지가 ‘걱정’이다. 걱정과 지나친 심각함은 자기 증명의 한결같은 표지다. 그러나 증언의 표지는 늘 ‘안심’, 또는 ‘걱정 없음’이다. 걱정이 찾아올 때마다 이 점을 살필 수 있으니, 갖은 종류의 걱정 또한 은혜로운 ‘신공’(神功)의 기회가 아닐 수 없다.
* 이 글은 <경향잡지> 2023년 1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이연학 신부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수도원 창설 소임을 받고 미얀마 삔우륀에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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