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신자로서 이스탄불을 방문한다면 가장 먼저 찾는 곳이 성 소피아 성당이다. 성 소피아 성당은 비잔틴제국에서 가장 큰 성당으로, 종교행사뿐 아니라 국가행사도 이 자리에서 치러졌다는 점에서 ‘종교건축의 형식을 빌어 제국의 위용을 드러낸 대표적인 건축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성 소피아’란 이름은 그리스도교에서 하느님에게 봉헌한 세 가지 의미 가운데 ‘지혜’를 상징한다. 하느님은 ‘하기야 소피아’ 거룩한 지혜의 원천이며, ‘하기야 이레네’ 거룩한 평화를 주시며, ‘하기야 디나미스’ 거룩한 힘을 지닌 분으로 흠숭되었다.
그러나 한국교회에서 명동성당이 ‘민주화의 성지’이면서 동시에 ‘종교권력의 상징’이었듯이, 성 소피아 성당은 정치권력의 지배하에 놓인 교회가 복음적 긴장을 시험받던 장소이기도 했다. 현존하는 성 소피아 성당은 비잔틴 제국에서 같은 이름으로 그 자리에 세워진 세 번째 성당이다. 성 소피아 성당은 360년 2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세웠으나 아르카디우스 황제가 다스리던 404년에 반란이 일어나 시민들이 불태웠다. 이어 두 번째 성당이 415년에 세워졌으나 이 또한 532년 1월 니카의 반란 때 화재로 무너졌다. 지금 세워져 있는 성당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532년 2월에 착공해 537년 12월 26일에 완공한 것이다.
그러면 그동안 콘스탄티노플에서 어떤 일이 발생했던 것일까? 그리고 그 사건들이 종교와 정치가 만나는 지점인 성 소피아 성당을 둘러싸고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을까? 궁금하다. 그 열쇠 가운데 하나는 첫 번째 성 소피아 성당이 불타버린 아르카디우스 황제 시절에 활동한 요한 크리소스토모(349년경–407년)에게서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제37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였다. 뛰어난 설교자였던 그는 탁월한 설교로 ‘황금의 입을 가진’이라는 뜻의 ‘크리소스토모’라는 별칭이 붙었다. 고대 교회의 중요한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교리를 옹호하며 복음적 확신 속에서 부자들을 탄핵했다. 로마 가톨릭과 동방 정교회, 성공회 모두 그를 성인으로 공경하고 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안티오키아 출신으로 세상 부귀와 명예가 자신의 복음적 열망을 채워줄 수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에 372년에 세례를 받고 수도생활을 했으며,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386년에 사제품을 받았다. 요한은 12년 동안 사제 생활을 하면서 깊은 성서묵상으로 얻은 성찰을 강론 때마다 신자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어주었는데, 요한은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비참한 삶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기득권층의 고삐 풀린 사치와 부자들의 탐욕을 끊임없이 고발했다.
“그리스도의 제대가 금으로 된 잔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그리스도(가난한 사람)께서 굶주림으로 돌아가신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먼저 배고픈 이들을 충족히 채워 주고 난 다음 그 나머지 것으로 제단을 장식 하십시오. 여러분은 성전을 장식할 때 고통 받는 형제들을 멸시하지 마십시오. 살로 된 성전이 돌로 된 성전보다 훨씬 가치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부자들이 ‘불법으로 가난한 이들의 재산을 약탈하지 않는다면 죄가 없다’고 믿는 데 반대하며, “부자들의 죄는 자기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지 않는 데 있으며, 이는 일종의 강도질”이라고 단언했다. 요한은 우리가 언제든지 죽어서 이승을 떠날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이 땅에 영원히 머물 것처럼 착각한다고 말하며, “지금 몸담아 살고 있는 집을 자랑하며 온갖 장식을 하지만, 우리는 잠시 땅에 머물다 가는 나그네”라고 말했다. 요한에게 “우리가 사는 집이란 사실 영생으로 가는 길목의 ‘여관’일 뿐”이라 여겼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벽이나 머리 위의 지붕에서 평화와 안전을 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스런 은총의 벽에 둘러싸이고 하늘로 지붕을 삼고자 합니다. 사랑으로 이루는 선한 행실이야말로 우리의 살림살이 가구들입니다.”
바로 이 사람 요한 크리소스토모가 398년 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가 되면서 ‘복음과 권력 사이에’ 긴장이 조성되었다. 요한은 제국교회에 기대어 살던 부패하고 타락한 주교들과 사제들을 면직시켰다. 대신에 요한은 병원과 학교를 늘리고, 교구청의 쓸데없는 장식품과 가구들을 팔아서 가난한 이들을 구제했다. 이 요한 크리소스토모에게 제국의 힘으로 웅장하게 지은 성 소피아 성당이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요한 총대주교에게 뜨거운 지지를 보냈지만, 요한의 개혁에 불만을 품은 몇몇 주교들과 적대자들은 조직적으로 저항하며, ‘좋았던 시절’로 되돌아가기 위해서 복수의 칼을 갈고 있었다. 당시 요한은 설교 때마다 로마제국 황실의 허례허식과 사치를 준엄하게 꾸짖었는데, 이런 태도는 황제권력이 종교마저 장악하고 있던 비잔틴제국에서 용납되기 힘든 도전이었다.
“지금 왕좌를 차지하고 있는 모든 통치자들이 하느님께서 뽑아 세운 자들입니까? 그렇다면 저들이 제정한 모든 법률과 규정이 선한 것이요 따라서 이의 없이 복종해야 할 텐데, 과연 그렇습니까? 대답은 ‘아니’올시다. 많은 통치자들이 주어진 권력을 남용하여 거대한 재산을 모으느라 백성을 착취하고, 저들의 악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부당하게 처벌하며, 이웃나라와 불의한 전쟁을 일으키고 있는 게 현실이지요. 저들의 법이 그릇되었다면 우리는 마땅히 그것에 불복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다스리는 최고의 권위는 땅의 법이 아니라 하느님의 법입니다. 만일 이 두 법이 서로 충돌한다면, 우리는 당연히 하느님의 법을 따라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며 주교의 한 사람으로서 요한 총대주교는 ‘복음의 힘으로’ 정치권력을 상대로 예언직을 수행했던 것이다. 요한 총대주교는 특히 에우독시아 황후의 허영심과 탐욕을 비판하고 나섰는데, 평소 요한에게 반감을 품고 있던 알렉산드리아의 테오필루스 주교는 황실과 결탁해 36명의 주교들만 참석한 403년 ‘참나무 주교회의’에서 요한의 주교직을 박탈했다. 결국 요한은 부활전야 미사를 거행하다가 군인들에게 연행당해 아르메니아의 작은 마을로 유배당했다. 그 다음해인 404년에 콘스탄티노플에서는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 성 소피아 성당이 잿더미가 되었다.
결국 요한의 영향력을 두려워한 반대자들이 황제를 부추겨 요한을 흑해 동쪽 해안 피티우스에 있는 한 요새에 유배시키도록 했다. 요한은 넝마를 걸치고 맨발로 유배지로 가다가 탈진해 “모든 것을 통하여 하느님께 영광을”이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이승을 떠났다. 407년 9월 14일, 향년 60세였다. 요한 죽기 전에 전한 마지막 강론은 이러하다.
“머잖아,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형제들과 누이들을 떠나야 할 것 같군요. 하느님이 주신 일터에서 나쁜 사람들이 나를 데려갈 겁니다. 나는 지금 슬픕니다. 비통합니다. 화가 납니다. 하지만 절망하진 않습니다. 오히려 희망을 느낍니다. 이 희망의 원천은, 비록 내가 육신으로 형제와 누이들과 이별하지만 영으로는 결코 헤어지지 않을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를 입증하십니다.
... 그분이 돌아가신 뒤에 비로소 사도들은 깊은 가슴으로 그분을 알게 되었지요. 마찬가지로 내 육신이 형제와 누이들을 떠날 때 나는 지금 알고 있는 것보다 더 깊게 그들을 알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느끼는 이 슬픔은 녹아내리고, 비통한 감정은 달콤하게 바뀌고, 분노에 찬 이 가슴 또한 어루만져지겠지요. 그 무엇도, 그 누구도, 그리스도 안에 뿌리내린 사랑을 깨뜨려 부술 수 없습니다.”
404년 반란과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죽음 이후에도 불행은 계속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통치하던 532년에 경마장이 있는 히드포럼에서 ‘니카’(승리라는 뜻)의 반란이 일어나 8일 동안 콘스탄티노플을 무정부 상태로 만들었다. 이들은 온 도시의 공공건물을 부수고, 성 소피아 성당에 불을 질렀다. 두 번째 성당이 시민의 반란으로 불타 없어지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집권 5년째 되는 532년에 제국의 영광을 과시하고 황제의 자존심을 걸고 성 소피아 성당을 다시 짓기 시작했다. 제국 각처에서 자재를 운반해 왔으며, 지난 화재로 없어진 성당보다 더 크고, 화재에도 견딜 수 있는 견고한 성당을 지으라고 명령했다. 당시 교회 건축은 민심(民心)과 상관없이 황제의 기호에 따라 결정되었다.
5년 10개월만에 성 소피아 성당 낙성식을 열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성당에 들어서자마자 성당의 위용에 감탄해 “예루살렘 대성전을 지은 솔로몬, 당신을 내가 능가했소!”라고 외치며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고 전한다. 어찌 보면 요한 크리소스토모가 추구했던 “성스런 은총의 벽”과 “하늘 지붕”을 걷어내고, “단단한 벽”을 치고 머리에 “돌로 된 지붕”을 덮어놓은 격이다. 이로부터 가난한 백성들이 수시로 얻어 누리던 하느님의 은총이 이제부터는 성 소피아 성당의 주인인 황제와 주교를 통해 내려오게 된 셈이다. 거기서 교리도 정해지고, 교회법도 정비되고, 종교예식과 대관식도 열릴 참이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유튜브 채널 <한상봉TV-가톨릭일꾼>에서 강의 동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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