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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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하지 말자
  • 장진희
  • 승인 2023.02.20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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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이 살려낸 것들 - 진도에서/살아 움직이는 것, 그 자체를 위하여

모든 사회적 일을 그만둔지 반 년이 다 된다. 물론 시골에서 살아온 15년 동안 그런 시간을 때때로 가졌고, 현실적인 요구 때문에 무언가 사회적 일이나 돈벌이를 하러 다닐 때도 그저 ‘면피’ 정도만 했었다. 이제 그나마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잘라내거나 잘리고, 사람 사이에서도 좀 더 멀어진 그야말로 완전히 ‘자유인’이 된 것이다.

사실 언제부터인가 모든 사회적 행위에 대해 의미를 잃었다. 세상에 대한 울분과 열정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고백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 또한, 사람이 좀 더 사람답게 사는 세상과 조건에 대한 그 모든 고민과 노력에도, 사실 사람과의 관계나 사람살이에 대해서도 다리를 반만 걸치고 있는 느낌이 사라지지 않았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몇 달 동안 처음에는, 아직 추위가 물러가지 않았을 때는 따듯한 방에서 이웃 마을 사람들과 어울려 노닥거리는 낙으로, 날이 풀린 봄에는 산에 들에 바다에, 고사리며 취나물이며 미나리며 조개며 온갖 자연의 선물을 따고 주우러 다니는 낙으로, 그리고 대파밭이나 공사장에서 일당 벌이로 몇 푼씩 벌어 최소한의 돈을 마련하며 살았다.

아들이 다 커서, 이제 애미가 돈을 보내주지 않아도 아르바이트로 제 학비와 용돈을 감당하는 덕분에 이런 생활이 가능하기도 하다. 또 옷이나 화장품을 산다든지 하는 돈 쓸 일이 거의 없고, 일반 전화와 큰 가방만한 김치냉장고와 라디오 말고는 핸드폰, 인터넷, 텔레비전, 세탁기 등 가전제품이 거의 없어 돈 들어갈 일이 없는 것도 내가 이렇게 살 수 있는 이유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작물을 심고 거두는 뿌듯함도, 자연이 주는 선물을 주우러 다니는 재미도 어느새 심드렁해졌다. 그 대신 결코 채워지지 않는 가슴의 큰 구멍을 시도 때도 없이 확인하는 어떤 부족하고 괴로운 상태가 계속됐다. 그런 싸움은 어쩌면 평생의 숙제였는지도 모른다. 지금 나는 그런 밀린 숙제를 하기 위한 시간을 만들고 있는 것도 같다.

내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무것도 하지 말자.”

무언가에 대한 욕구나 의미를 붙들지 말자, 이런 의도였다. 어차피 무엇을 하더라도 이 무감동의 나락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차라리 아무 짓도 하지 않는 것이 답이었다.

그런데 어디 그게 쉬운 일인가? 수시로, 그야말로 외로웠고, 텅 빈 시간이 황량하기 짝이 없어 하루 종일 내 그림자를 밟으며 안절부절 못하거나 이유도 없이 벌벌 떨었다. 허겁지겁 사람을 찾고 뭔가 일을 만들고 있는 내 꼴이 스스로도 딱했다. 그러나 이웃들과 아무리 신나는 일을 해도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시린 가슴을 어쩌지 못했고, 사람살이 보탬이 되는 일을 찾아도 번번이 내 한계를 절감할 뿐이었다.

 

사진출처=bluepassions.tumblr.com
사진출처=bluepassions.tumblr.com

정말 방법이 없다. 그야말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 말고는. 도로 두문불출, 아니 동구(洞口)불출이다. 온 존재가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오롯이 평화롭고 기쁜 나날은 정녕 불가능한 일일까? 도대체 나는 어쩌자고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인가? 어쩌자고 여기 이렇게 한심한 인간으로 놓여 있는 것인가?

내가 사는 집은 오래된 흙집이다. 도시로 떠난 이 집 자식들이 더 이상 거들떠보지 않는. 나는 이 빈 집을 주워 내 집인 듯 흙벽의 바람구멍을 메우고 도배를 하고 바람소리와 새소리뿐인 산골에 굴뚝 연기를 피워 올리며 살고 있다. 여든 살에서 아흔 살까지 다섯 할매들만 살아 소리 없이 밭으로 집으로 움직이는 산골 마을에서.

그리고 때 되면 산으로 고사리를 끊으러 가고, 때 되면 옥수수를 심고 고추를 심는다. 그리고 그야말로 아무런 할 일이 없어 흙마당에 풀을 매고 국화 순을 꺾어다 심고 골담초를 캐다 심는다. 그러고도 할 일이 없어 한때는 서른 가구 이상이 벅적이며 벌어먹고 살았던, 이제 할머니 다섯 분만 남아 묵힐 수밖에 없는 때갱이 밭을 하나둘 접수해서 풀 베고 거름 내고 괭이질 해서 깨도 심고 콩도 심는다. 그 밭 주인이 누구인지 얼굴도 모른다.

산골이라 해가 늦게 뜨고 일찍 지는 마을의 묵정밭, 어제는 괭이질을 하다 말고 마을 뒤편 산등성이를 넘어가는 해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거대한 날개와 꼬리를 가진 가실가실한 새 한 마리가 해를 향해 날고 있었다. 선녀의 옷자락 같은 엷은 구름이 만들어낸 새. 새의 한쪽 날개 벌어진 틈으로는 무지개 색깔의 빛이 쏟아졌다.

괭이 자루에 몸을 의지하고 입을 떡 벌리고 서서 그 장관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해는 결국 산등성이 테두리를 후광처럼 빛나게 하고는 그 뒤로 넘어갔다. 나는 그렇게 끝까지 해를 째려보았다.

새들이 좀 더 낮게 날며 부산을 떨었다. 이제 이 골짜기는 새소리의 울림으로 더욱 요란해질 것이다. 나는 새소리 울리는 숲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제야 깨달았다.

아! 나는 평생 이 시간을 꿈꿔왔던 것이구나. 숲과 새소리로 둘러싸인 산비탈 밭에서 괭이질을 멈추고 지는 해를 바라보는 이 순간! 이 순간을 기다렸던 것이구나.

집과 먹을 것을 얻으러 돈을 벌려고 다니지 않아도, 나무 몇 그루 자라는 숲이라도 바라다 보이는 유리창이 있는 집을 얻어 돈 벌러 다녀올 때 지친 걸음으로 이삼십 분을 오르지 않아도, 살기 위해서나 외롭지 않기 위해서 나 자신도 실감하지 못하는 말들을 떠들지 않아도, 버려진 집에 몸 부리고, 버려진 땅에 콩 심고, 스스로 거두거나 주워 먹고, 산에 지천으로 쓰러진 나무 해다 군불 때고……. 이렇게 그냥 살아 움직이는 것 자체를 위한 하루하루를 살고 싶었구나.

그런 하루를 살 수 없어서 모든 것이 부족하고 괴로운 일이 되어 버렸던 것이구나. 그런 목마름 때문에 내가 그렇게 보대꼈던 것이구나.

온 존재가 오롯이 평화롭고 기쁨에 넘치는 시간은 깨달음을 얻은 이에게만 오는 선물이라 한다. 사람의 몸 받고 때어나 백팔번뇌에 꼼짝없이 휘둘리는 이 존재 안에 하느님도 있고, 부처님도 있고, 우주의 근원도 있다 한다. 그걸 깨닫기 위해 우리가 사는 거라 한다.

"…… 라고 한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이 존재는 그 뜻을 온몸으로 알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아무 것에도 시달리지 않는 이런 시간 속에서 살고자 한다. 그것이 내 존재에 대한 처음이자 마지막 할 일일 것 같다.

햇살이 맑고, 구름이 설핏 얇은 깃털을 가진 거대한 새를 만들고, 바람이 거세어 빗줄기는 수직으로 곤두서서 골짜기 아래로 달려가고, 여름 한낮 땡볕이 머리를 어질어질하게 하고, 눈이 얼어붙어 가파른 동구 마당에 내 몸을 패대기쳐서 허리를 못 쓰게 하고……. 그렇게 하루하루는 다르다.

내 하루의 날씨 또한 한결같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한결같고 싶다. 살아 움직이는 것, 그 자체를 위한 하루. 그렇게 살고자 한다.

 

장진희
돈 안 벌고 안 쓰고 안 움직이고
땅에서 줏어먹고 살고 싶은 사람.
세상에 떠밀려 길 위에 나섰다.
장터로 마을회관으로.
무주에서 진도, 지금은 곡성 죽곡 보성강변 마을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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