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생태계는 다채롭다. 아마존처럼 수많은 나무가 울울창창한 열대우림 생태계가 있고 바닷속 산호초 주변에 크고 작은 생물이 수두룩한 해양생태계가 있다. 얼음으로 뒤덮인 극지방과 모래바람이 무서운 사막에 언뜻 눈에 띄지 않아도 다양한 생물이 사는 생태계가 있다. 수많은 생물의 자연스러운 터전인 생태계 안에서 동식물은 먹고 먹히는데, 갑자기 사라지거나 늘어나는 생물은 보이지 않는다. 안정된 생태계의 특징이 그렇다.
생태계를 들여다보면, 지배하는 생물이 있다. 국립공원으로 보호되는 아프리카 세렝게티의 지배자는 사자일 테고, 100여 년 전 일제 강점기에 한반도를 찾은 일본의 한 부자가 대형 육식동물을 전멸시키기 전까지, 조선 육지 생태계는 호랑이가 지배했을 것이다. 생태계를 흔히 그물코에 비유한다. 그물코처럼 수많은 생물이 뒤엉켜 관계를 맺는 생태계 안에서 특정 생물이 지배하려면 다양한 생물이 안정적으로 분포할 수 있어야 한다.
자연 다큐멘터리를 떠올려보면, 툰드라 지대의 늑대는 순록을 잡아먹는다. 아슬아슬하게 쫓고 쫓기는 장면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편집했다. 일방적으로 보이지만, 방송은 핵심을 보여주지 않았다. 무리 한가운데로 들어오면 모를까, 순록은 멀리서 다가오는 늑대를 본체만체한다. 빨리 달아나면 안전하다는 걸 체험으로 알기 때문이리라. 번번이 실패하는 사냥 장면을 반복해 보여주면 시청자는 채널을 금방 돌릴 것이다.
긴 시간 툰드라를 연구한 팔리 모왓은 《울지 않는 늑대》에서 늑대는 어미를 잃은 새끼, 다치거나 병약한 개체를 솎아낼 따름이라고 밝혔다. 생각해보라. 수시로 잡아먹었다면 툰드라 지대에 순록은 모조리 사라져야 맞다. 실상은 어떤가? 순록이 월등히 많다. 늑대는 그저 쥐를 잡아먹는다고 한다. 늑대가 사라지면 쥐가 갑자기 늘어나면서 산록을 파헤치고, 먹이 잃는 순록은 사라지고 말 거라고 팔리 모왓은 주장했다. 그렇듯, 늑대와 순록은 공생한다.
다른 예를 살펴보자. 잎사귀를 갉는 애벌레는 새의 먹이가 되고, 새는 숲에 배설물에 섞인 씨앗을 떨어뜨린다. 애벌레가 나뭇잎을 갉지 않는다면 새가 모일 리 없다. 나무는 진작 애벌레에 내줄 여분의 잎사귀를 매달았다. 그렇듯, 삼라만상은 서로 돕는다. 생태계에서 태어난 사람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동식물이 우열 없이 어우러지는 생태계 그물망이 건강할 때 사람 역시 건강하다. 바로 자연스러움이다.
많은 사람은 생물의 진화를 더 나아지는 과정과 결과로 해석하려 한다. 그 예로 기린의 목을 든다. 높은 가지의 나뭇잎을 따먹으려고 목이 길어졌다는 것인데, 그럴까? 생물 진화는 개선되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걸까? 기린의 목은 분명히 길다. 현재 기린은 그런 점에 큰 불만이 없을 텐데, 목이 길어지는 게 개선일까? 목이 길어지기 전 상황을 살펴보자. 기린의 선조는 목이 길지 않았을 텐데, 하필 왜 높은 가지의 나뭇잎을 따먹으려 했을까? 불편했을 텐데, 더 맛있어서? 목을 늘리고 싶어서?
기린의 선조가 되기 전의 무리는 다른 초식동물과 마찬가지로 대개 입 높이의 나뭇잎을 먼저 따먹을 것이다. 그래야 편안히 배불리 먹었고, 다리에 힘이 있으니 천적이 다가올 때 재빨리 달아날 수 있었다. 그런데 기린의 조상이 된 무리는 왜 입 높이의 나뭇잎을 놔두고 높은 나뭇가지의 잎사귀를 훑으려 애를 썼을까?
기린 조상은 행동이 느리거나 느긋했는지 모른다. 현재 기린보다 느긋한 편이다. 많은 개체가 입 높이의 잎을 먼저 차지하려고 아귀다툼할 때, 경쟁이 싫어 슬그머니 피했거나 행동이 늦어 입 높이의 나뭇잎을 먹을 기회를 잃었을지 모른다. 하는 수없이 높은 곳에 남은 나뭇잎을 따야 할 텐데, 뒤늦게 모여든 무리 중에 목이 조금이라도 긴 녀석이 유리했다. 목이 짧은 개체보다 많은 잎을 먹었으니 기운이 날 테고, 천적을 피해 목이 짧은 개체보다 조금이라도 멀리 달아날 수 있었을 것이다. 목이 긴 암수가 만날 확률이 커지니 새끼를 많이 낳았고, 새끼는 부모를 닮아 긴 목을 갖고 태어났을 것이다. 그런 일이 충분히 이어지면서 목이 긴 기린으로 진화되었을 거로 추측할 수 있다.
숱한 생물종은 생태계를 공유하는 여느 생물과 어우러지면서 서로 돕는다. 생태계가 건강할수록 더욱 그렇다. 진화는 환경이 바뀌지 않으면 새롭게 시작하지 않는다. 바뀐 환경에서 적응하면서 성공을 목표로 개체들이 도전하는 게 아니다. 원하지 않았지만, 기온변화나 천재지변으로 새로운 환경에 서서히 또는 급작스레 노출될 수 있다. 원래 환경에 적응했던 개체들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적응은 다분히 우연으로 결정된다. 그렇다면 기상이변이 속출하는 요즘 상황을 생각해보자. 안정적인가? 서서히 바뀌는가? 아니면 급작스러운가? 위기로 치닫는 기후변화는 전에 없던 기상이변으로 이어지며 관측 이래 최대의 폭염, 혹한, 가뭄, 홍수, 태풍을 거듭 불러들인다. 빙하가 녹으며 바다 수면이 오른다. 안정되던 환경에 익숙한 개체는 적응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변한다. 적응이라는 우연을 불안하게 거치며 살아남을 개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생물종이 다양할수록 생태계는 안정된다. 생물다양성이다. 어떤 생물종 안에 유전자 다양성의 폭이 넓으면 넓을수록 환경변화에 이겨낼 능력이 크다. 디디티를 뿌리자 다 사라진 줄 알았던 메뚜기가 다시 나타나는 건 그 집단 내에 디디티에 이겨낼 유전자를 가진 개체들이 드물게 있었기 때문이다. 생물학자는 유전적 다양성이라고 말한다. 사회도 비슷하다. 다양한 의견이 존중되고, 공평하게 의논하면서 결정하는 사회는 건강하다. 양보와 타협으로 합의해서 결정하는 사회에 갈등과 다툼은 끼어들지 못한다.
요즘 생태운동 또는 녹색운동을 원하는 젊은이가 는다. 반대하는 환경운동이 아니라 다양성을 존중하는 시민운동에 긍정적 느낌이 들어서 그런지 모르는데, 환경운동은 반대만 하지 않는다. 생태계와 미래세대를 위기로 빠뜨리는 개발을 반대하면서 이산화탄소 같은 온실가스를 최대한 줄일 대안을 함께 찾자고 제안한다. 생태운동은 생태계 보전을, 녹색운동은 땅을 생명력을 보전하려고 애를 쓰는데, 실제 차이는 거의 없다. 어떤 표현이든 환경운동은 지나친 경쟁과 개발로 파괴되는 다양성의 가치를 지켜 미래세대의 생존을 지키려 한다.
우리가 지구를 지켜줄 수 있는 게 아니다. 우리는 그저 자연스러운 지구의 품 안에서 건강할 수 있다. 자연계와 사회에 함께 어울리던 이웃이 두루 건강하고 행복해야 내게 건강과 행복이 이어질 수 있는데 인류는 현재 고독하다. 위기에 휩싸였다. 전에 없던 위기로 치닫는 기후변화는 지금 같은 삶에서 대안을 찾을 수 없다는 강력한 경고다. 순환과 다양성이 어우러지는 생태계, 개성을 배려하는 사회에서 대안을 찾아야 한다는 신호다.
박병상
인천 도시생태환경연구소 소장
60플러스기후행동 공동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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