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 신부, 사랑이란 선물들의 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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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 신부, 사랑이란 선물들의 교환
  • 도로시 데이
  • 승인 2023.01.09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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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시 데이의 빵과 물고기 26-영적인 조언자들3
사진출처=ncregister.com
사진출처=ncregister.com

휴가에서 시간을 내어 방문했던 신부들이 많이 있었고, 그들은 우리들에게 재충전의 날들과 피정의 주간들을 마련해 주었다. 그들 모두를 나열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요셉회 회원인 패시픽 로이 신부는 특히 두드러진 사람이다. 모트가 셋방의 2층 뒷 부엌으로 걸어들어왔을 때 그는 즉시 집과 같은 편안함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는 남부에서 가난한 이들과 사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고 그들 가운데에서 많은 일을 했다.

처음 온 날 오전내내 로이 신부는 말했다. 사람들은 일을 밀어놓고 그의 말을 들으려고 모였다. 음식을 만들어야 했고 방문객들이 왔다갔다했지만 우리는 계속 들었다. 로이 신부는 우리처럼 문제에 직접적인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어디에 있든지간에 그는 보다 나은 조건을 만들기 위하여 그가 가지고 있는 돈, 기술, 영적인 도움을 내놓았다. 이냐시오 성인은 “사랑이란 선물들의 교환이다”라고 말했다. 로이 신부에게 있어 영적인 선물과 물질적인 선물들은 분리될 수 없었다.

그는 사회질서에 대해서만 아니라 사랑과 거룩함에 대해서도 계속 말했는데, 그것들이 없다면 인간은 하느님을 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날 그는 주고 우리는 받으면서 작은 “피정”을 했다. 로이 신부는 전에 캐나다 사람인 그의 동료사제 라꾸튀르 신부의 피정에서 영감을 받았는데 이제 그는 우리들에게 “모든 것을 새롭게 보도록” 영감을 주고 있는 것이다.

비록 볼티모어에서 일하고 있었지만, 그는 쉬는날이면 뉴욕까지 달려오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를 보기 위해 우리가 볼티모어로 가면 많은 성찰과 피정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는 그 당시 빵과 물의 단식을 크게 생각했는데, 비록 아침식사에서 “물”은 검은 커피로 충당되었으나 덕분에 우리들은 모임 동안 깨어있을 수 있었다. 피정이 끝나갈 즈음에 그는 사제관 지하에서 수가 많은 우리들에게 진수성찬을 대접하곤 하였는데, 관리인인 그린씨가 훌륭한 음식을 마련하곤 하였다. 한번은 불에 구운 고기를 먹기도 했었다.

1945년에 로이 신부는 메리농장에서 우리와 함께 머무를 수 있는 허락을 받았다. 농장에서 그가 했던 첫 번째 일은 자신의 손으로 그곳까지 전선을 끌어들여 전기를 놓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다른 모든 이들과 함께 언덕위에 있는 샘물에서부터 아래의 농장까지 물을 끌기 위하여 도랑파는 일을 하였다(농장 아래층에는 부엌이 있었고 위층엔, 경당, 도서관과 침실들이 있었다).

로이 신부는 피터 모린, 던칸 치섬, 한스 테니슨, 죠우 카터, 오코넬 영감과 함께 위층에 있는 남자들의 숙소에서 잠을 잤다. 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지 잘 모른다. 한 사람을 제외하고 그들 모두는 로이 신부를 사랑하였다. 우리 모두의 골칫거리였던 오코넬씨는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다. 애정을 가지고 본다면, 아마 그는 “어두운 밤”을 지나고 있었던 것 같다. 모든 자연적인 사랑이 그에게서는 고갈되어버린 것 같았으며, 신심과 인내도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경당에서 노래로 미사를 드리던 어느날 아침 오코넬 씨는 “소리좀 그만 내!”라고 외치면서 신발로 마루를 쿵쿵 치기 시작하였다.

우리가 미사를 노래로 하기 시작한 것은 얼마 안 되었고 그래서 그 첫 달은 로이 신부에게 어려웠을 것이다. 그는 그의 옆에 앉아 대영광송을 음이 틀리게 노래하는 복사들을 찌푸린 얼굴로 바라보곤 하였다. 로이 신부에게 있어서 미사는 참으로 하루의 과업이었고, 가능하면 우리의 예배를 아름답게 만들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심지어 가장 추울 때에도, 쥬스병의 물이 얼고 그의 손이 감각을 잃을 정도가 되어도 그는 성체에 대한 경외심과 그 위대함에 집중하는 마음으로 천천히, 존경스럽게 미사를 거행하였다.

그는 하루의 이 중요한 미사에 참여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의 것을 한 것이라고 반복하여 말했다. 우리 공동체의 한 구성원은 이 말을 너무도 깊게 가슴에 새겼다. 로이 신부가 외출했을 때 그래서 신부가 없을 때면, 이 동료 노동자는 2마일 밖에 있는 성 요셉 교회까지 긴 언덕을 오르내리며 힘겹게 걸어다니곤 하였다. 결국 그는 그의 아내를 포함한 다른 이들이 나무를 쪼개고 물을 나르며(그 집은 수도관이 없었다) 그와 공동체를 위하여 음식과 온기와 자리를 마련하는 동안 편하게 누워있곤 하였다. 그는 우리 모두를 위해서 영적인 짐을 나르면서 그날 그가 해야 할 일을 다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로이 신부의 미사는 일단 봉헌되고 나면, 그를 가장 부지런한 노동자로 만들었다. 로이 신부는 피터 모린이 “노동의 철학” 이라고 말했던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노동에서 큰 즐거움을 얻었고 열심히 일하지 않은 날을 세기도 하였다. 그는 땀 흘리지 않고 빵을 먹을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만일 방문객을 맞이하고 심부름이나 다른 일들이 그가 노동하는 것을 제지했다면, 저녁을 먹은 후 선반들을 설치하거나 망치질, 톱질을 하면서 밤늦게 까지 일을 마무리하곤 하였다.

로이 신부는 키가 크고 깡마른, 따뜻함을 지닌 선하게 보이는 남자였으나 예리한 눈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확신을 가지고 명상에 잠겨 움직였다. 그는 튼튼한 손을 가졌는데 험한 일에도 꽤 익숙했다. 한번은 내가 빵을 자르다 손을 베었을 때, 그가 웃으며 “항상 주님 안에서 기뻐하시오!” 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 후에 그는 회전톱에 손을 베어서 4마일 떨어진 병원까지 피를 흘리며 직접 운전을 해야만 하였다. 시내에서 돌아왔을 때 나는 그가 기뻐했는지 물었다. “나는 기쁨으로 춤을 추었소, 특히 그것들이 나를 베었을 때 말이오.” 라고 그는 말하였다.

그는 불란서 포크송을 부르길 좋아하였다. 한번은 “당신도 알 듯이, 우리는 여러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야 한다”고 말하며 불란서식의 재량에 따라 그의 노래를 정당화함으로써 자신의 “경솔함”을 변명하였다. 그러나 그는 어떤 면에선 우리보다 더 엄격하였다. 그는 집안에 라디오가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확실히 절대로 텔레비젼을 허용하지 않았다. 라디오와 텔레비젼 모두가 세상을 너무 끌어오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는 파티를 좋아했다. 그래서 우리는 많은 축일들을 기념하였다.

그는 또한 계산대를 책임지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무료로 준 남은 것들을 수거하기 위하여 토요일 밤 체인점들에 가는 것을 즐겼다. 그는 우리가 돈을 내고 음식을 사야했을 때 어느 겨울에 우리를 방문했던 교사인 아일린 맥카티가 “좀더 고급의 돼지고기를” 사달라고 애원했지만 돼지족발이나 값싼 기호식품을 사곤 했다. 그녀는 물론 햄을 원했지만 신부는 그녀가 지닌 아일랜드식의 위트를 자신의 위트로 반격했다. 즉 그는 그녀에게 약간의 돼지꼬리를 가져다 주었던 것이다.

쇼핑을 가지 않으면 그는 땅을 파고 건물을 짓더니 결국 제재소를 시작하였다. 어느날 명상을 하는 동안 앞에 있는 마루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앉아있을 때 그는 원래 농장용 트럭과 트랙터를 놓기 위해 깔아놓은 농장의 마루 널빤지가 경당이나 도서관용으로는 불필요하게 두껍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묵상이 끝나자 그는 아래쪽에 먼저 지어진 소 외양간들의 바닥까지 보이는 거대한 틈들을 만들면서 널빤지들을 뜯어내기 시작하였다. 금요일 밤부터 시작하도록 계획된 피정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피정자들이 도착하기 시작했을때도 여전히 마루에는 거대한 틈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가 4인치 두께의 마루 널빤지로 톱질해 놓은 것을 언덕 위에 있는 제재소에서 가져와 마루바닥에 못 밖아 고정시키는 일을 해야 하였다. 그는 이 작업 때문에 재목의 공급량을 두 배로 늘렸다.

한스 터니슨은 비록 그 당시에 요리하고 빵 굽는 일을 동시에 하고 있었지만 로이 신부에 못지않게 많은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스는 로이 신부가 만든 모든 것들이 키가 큰 사람들에게 맞추어져 있다고 불평하였다. 세면대는 너무 높았으며 선반도 높았고 탁자와 의자들도 너무 높았다. 심지어는 로이 신부가 새로 만든 집밖의 옥외 화장실 변기의자도 너무 높았다! 그러나

로이 신부의 다양한 성취품들은 우리에 대한 그의 아버지다운 관심이 얼마나 모든 것을 포용하는지, 그리고 그의 사랑이 얼마나 모든 것을 품고 있는가를 보여줄 따름이다.

우리의 삶은 일하고 노래하고 예배하고 축제를 거행하고 단식을 하는 등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그는 단식에 관해서는 엄격했으나, 때때로 우리는 저녁식사로 옥수수죽이나 오트밀 이외엔 아무것도 없는 식탁에 앉아 있곤 하였다. 그는 우리와 함께 먹었으며 우리의 모든 고난을 나누었고 우리와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였다. 그는 우리의 고백을 들었으며 우리에게 생명의 빵을 주었다.

그는 또한 우리에게 계속 강의를 했으며 똑같은 열정으로 똑같은 강의들을 수차례 반복하였다. 우리는 오네시무스 라꾸튀르 신부가 성 바오로 이래로 가장 위대한 설교자라고 그가 주장할 때에 개의치 않았다. 우리는 과장과 과대로 기울어지는 열정에 익숙했다. 우리는 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셔서 그분의 아들을 주셨으며, 그 아들은 당신의 생명과 죽음으로써 우리를 그분의 형제들, 피를 나눈 형제들보다도 그 분과 이웃들에게 더 가까운 형제들로 만들어 준 은총의 줄기를 보내셨다고 확신시켰다. 그는 사랑의 의미가 무엇이며 사랑의 피할수 없는 고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에게 일깨워 주셨다. 그는 우리들사이에 증오와 경쟁심, 빈정댐과 원한이 있을 때 사랑의 더 위대한 열매를 맺기 위하여 정화와 가지치기를 계속해야한다고 가르쳐 주었다. 그는 우리가 사랑의 힘을 느끼도록 해주었으며 사랑의 힘 속에서 우리의 믿음을 지키도록 해주었다.

무엇보다도 자연의 질서 안에서 그는 적극적인 일의 삶을 사랑했다. 그는(여러분이 그것을 알 수 있듯이) 마치 피터 모린이 생각하는 것과 가르침에 열정이 있었듯이 일에 대한 열정을 갖고 있었다. 두 사람 다 위대한 스승들이었는데, 그들은 한결 같은 의지와 자신의 삶의 모범으로 가르쳤다. 그리고 두 사람 다 대가를 치루어야 하였다.

남부에서 두루두루 여행하며 설교를 하고 돌아온지 얼마되지 않은 어느날 아침에(로이 신부가 그런 완전한 자유를 받았다는 것은 그의 장상이 지닌 위대함과 지혜를 보여주었다), 그는 우리 농장의 경당에서 미사를 드리기 위하여 일어났다. 우리는 그가 성체를 축성하기 전에 성변화 종이 울리자 갑자기 성체를 나누어주려고 한 것을 보고 공포를 느꼈다. 그의 말과 몸짓이 어눌한 것을 보고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는 동안 기억력을 손상시키는 가벼운 충격을 받았을지도 몰랐다. 아니면 뇌의 응혈 때문인지 몰랐다. 이러한 일들에 대하여 우리 중 누구도 충분히 알지 못하였다. 그를 의사에게 데려가는 일은 어려웠다. 그가 원했던 것은, 말한 것처럼 어린시절로 되돌아가는 것이요, 고향으로 가는 것이었다. 그는 몬트리올로 돌아가길 원했으며, 그곳 가족의 품에서 진단을 받고 치료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아마도 내 남은 이빨을 다 뽑아야 할 것 같다고 천진하게 말하였다(그의 조카는 치과의사였으며 그렇게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젊은이들 중 한 사람이 몬트리올에 있는 그의 여동생의 집으로 그와 함께 비행기를 타고 갔다. 그리고 긴 침묵이 있었다. 그 다음에 우리가 들은 것은 그가 하느님의 집이라는 병원에 정신병환자들을 위한 병동에 있다는 소식이었다. 그가 퀘벡 북쪽 지방에서 떠돌아다니다가 실종된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는 한 작은 마을에서 사제와 함께 살면서 복사일을 하고 있을 때 발견되었다. 본당 사제는 그가 사제인 것을 알지 못하였다. 그는 파자마 위에 옷을 입고 있었는데 본당사제는 그를 가난한 사람이라고 여겼던 것이다(모리악은 그리스도가 다른 사람들과 너무나 똑같이 생긴 사람이라 그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유다의 키스가 필요했다고 말했다).

나는 그를 보기 위하여 정신 병원에 갔는데, 그곳 정신병원은 이곳 미국에서와 마찬가지로 관례적으로 기억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감금하였다. 그는 나를 기억하였으나 농장의 다른 사람들은 기억하지 못하였다. 그는 그곳에 있는 다른 환자들 중 하나이며 사제인 어떤 사람이 그를 때렸을 때 생긴 얼굴의 상처를 나에게 보여주며 조금 울었다. 그는 나에게 한 간호사가 그의 침대를 갈면서 그를 더러운 돼지라고 불렀다고 말하였다. 그는 어린아이처럼 울었으며 그러다 갑자기 웃었고 그리곤 기뻐하라!” 라고 말하였다. 나도 또한 울었으며, 함께 눈물을 흘리는 가운데에서 나는 부당하고 가장 버릇없는 엿보기라고 느끼면서도 그렇지 않았다면 결코 말할 수 없는 무엇인가를 그에게 물을 수 있는 자유를 느꼈다. 나는 당신은...” 당신은 자신을 희생자로 봉헌했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우리는 항상 우리가 진정으로 의미하지 않는 것들을 하느님께 말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분은 우리의 말대로 우리를 받아들입니다. 그분은 진정으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믿으십니다라고 말하였다.

로이 신부는 그 병원에 오랫동안 머무를 필요가 없었다. 그는 그가 사랑한 여동생의 집으로 다시 돌아갔는데 여동생은 남편과 함께 그를 조심스럽게 지켜보았다(그의 수도회가 늘 모든 비용을 지불하였다). 그러자 퀘벡의 트로아 리비에르에 있는 늙고 병든 사제들의 재활의 집에 살 수 있는 기회가 왔으며, 그곳에서 그는 한 형제 사제의 도움과 안내를 받아 다시한번 미사성제를 드릴 수 있게 되었다.

그는 겨우 두 달 동안 이 기쁨을 누렸고 사람들이 가벼운 독감이라고 진단한 병으로 앓아 눕게 되었다. 2주일이 채 되기 전에 그는 죽었다. 그는 교회의 마지막성사인 병자성사를 받았을 때 온전하게 의식이 있었다. 그리고 여동생이 나에게 편지를 썼는데 그는 기쁨 속에서 운명하였다.

 

<빵과 물고기>는 미국 메리놀선교회 출판사인 올비스사에서 1997년에 발간된 Dorothy Day의 <Loaves and Fishes>(빵과 물고기)를 '참사람되어'에서 2000년 3월호에 번역한 것입니다. 도로시 데이가 이 책을 쓴 것은 1963년으로, 가톨릭일꾼공동체 운동이 시작된 지 30년만에 운동의 시작과 일꾼들의 삶을 간결하고도 따뜻하게 회상하고 있으며 운동의 입장과 신앙과의 통합을 선명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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