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몬 헤네시, 하느님은 도구를 가리지 않는다
상태바
아몬 헤네시, 하느님은 도구를 가리지 않는다
  • 도로시 데이
  • 승인 2022.12.18 21:5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도로시 데이의 빵과 물고기 23-아몬 헤네시 4

우리와 함께 산지 7년이 되자 아몬 헤네시는 다시 서부로 가는 것에 대하여 그리워하며 말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아리조나의 피닉스에 살고 있었을 때 우리는 그곳의 동료시민들에게 끼쳐야할 영향에 대하여 그를 놀리곤 하였다. “그들은 모두 공화주의자들이지” 라고 우리는 그에게 말하였다. “그들은 세금 납부에 대한 당신의 도전과 거부를 좋아한다. 당신이 아주 당당하게 정부에 도전하고 세금을 내지 않는다고 해서 배리 골드워터에게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당신은 그곳이 공화당 지역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곳 부자들은 너무 부유하기 때문에 당신이 그들의 사회 질서에 흠을 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당신의 외로운 목소리가 전쟁이나 이익 체제를 멈추게 하지 못한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당신은 뉴욕에는 전혀 감동을 주지 못 할 것이다.”

그런데 아몬은 뉴욕을 감동시켰다. 수년 동안 그는 대단한 명성을 얻었다. 과연 아몬답게 그는 자신에 관한 모든 이야기들을 2권 내지 3권되는 스크랩북에 붙여서 그가 맞이해야 할 사람들이 너무 많거나 전화 받고 타자 치느라 바쁠 때 그것을 꺼내서 방문자들에게 준다. <뉴욕 타임즈>와 <뉴욕 포스트>지는 그의 공격들 중 몇 가지를 실었다. 그는 “내가 경이롭지 않은가?”라며 의기 양양해졌다.

그는 너무도 여성들(특히 젊고 예쁜 여성들)을 좋아했으며 그들을 만났을 때 재빠른 포옹으로 맞아들였다. “나는 내가 여인들과 사랑해 빠지지 않았던 때를 결코 기억하지 못한다”라고 68번째 생일날 밤에 행복하게 선언하였다. 다른 때에 그는 “내가 진심으로 사랑했던 여자는 오직 한 여자뿐이며 그녀는 내 아내이다.” 라고 심각하게 말하였다. 나는 그가 아내의 어떤 측면들을 만났던 모든 여성들에게서 보았다고 생각한다.

그의 아내는 그와 함께 미국의 한쪽 끝에서 다른 끝까지 도보여행을 했으며, 그들은 함께 온갖 종류의 힘든 일들을 하였다. 그녀는 두 딸들이 11세와 12세가 되었을 때 그를 떠났다. 그는 너무도 가족이 그리워 밤에 잠자리에서 통곡한다고 나에게 말하였다. 그렇다, 그는 고통을 겪었다. 이 결혼은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결혼이었으며, 비록 자신의 무정부주의가 장애물이라고 말했지만 그는 자유롭게 다시 결혼할 수 있다고 느꼈다. 그는 결혼하기 위하여 정부에 허락을 신청하는 것을 믿지 않았다. 어쨋든 작년까지 그 문제는 결코 표면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까지 아몬은 비록 자주 여성들이 진보적인 분야에서 남자들을 뒤로잡아 당긴다고 주장하면서 험상궂게 말했지만 진실로 그에게 헌신하였던 3명 내지 4명의 좋은 여자친구들이 있었다.

그리고 나서 1년 반 전에 메리 래쓰롭이 그와 우리의 삶 속으로 갑자기 들어왔다. 그녀는 28살이라기 보다는 18세처럼 보이는 발랄한 여자이다. 날씬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무희의 튼튼한 다리를 지니고 있다. 그녀는 거의 1년간 저속한 쇼에서 일해왔다. 한번은 그녀가 나에게 “합창부는 괜찮았어요. 다만 노골적인 조롱이 저속했죠. 나는 뉴잉그랜드에 있는 가족에게 충격을 주고 그들과 평등해지고 또한 내 정신과의사에게 돈을 지불할수 있을 만큼의 돈을 벌기 위해서 그 쇼를 했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아침 내내 연습을 했고 오후와 저녁에 공연을 했어요. 그리고 나서 다음주간의 쇼를 준비하기 위해서 그 다음날 아침까지 계속 연습을 했어요. 그것은 힘든 생활이었죠. 쇼를 하는 많은 여자들이 아이들을 부양하고 있었죠”라고 말하였다.

메리가 온지 얼마 안되서, 아몬은 샌드스톤 감옥에서 출감했는데, 그는 오마하 미사일 기지를 무단 침입한 이유로 6개월을 복역하였다. 서부에서 강연여행을 한 후에 그는 시티홀 공원에서 열리는 민방위훈련 반대 시위에 맞추어 뉴욕으로 돌아왔다. 처음 4년 동안 우리 12명은 저항단을 구성하여 시위를 했었는데 그 때 처음으로 1000여 명이 합류하였다. 약 20명이 시위 때문에 체포되었는데 딘 모러, 아몬 그리고 나 자신은 체포되지 않았으나, 그 20명중엔 우리 젊은 친구들 3명(예술가, 속기사, 우리를 방문중이었던 발티모아에서 온 학생)이 있었다. 여자들이 5일간의 구류 선고를 받고 여자구치소에 끌려갔던 그날 밤에 아몬은 구치소 앞에 있는 그리니치가를 왔다갔다하면서 밤새도록 피켓시위를 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메리는 그와 함께 피켓시위를 하겠다고 말했고, 그렇게 했다. 그녀는 언제든지 모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또한 저돌적인 에너지 몇 가지를 버리고 있었다. 아몬은 즉각 그녀 안에 있는 그 에너지를 알아보았으며, 그것을 사랑하였다. 그는 그녀를 쟁기에 잡아매어둘 필요가 있는 야생의 젊은 망아지라고 말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그녀를 길들이려 했으며, 넌즈시 그 의도를 비추었다. 확실하게 그는 그녀에게 힘든 일을 시키기 시작하였다. 그는 모트가에 있는 오래된 성 바드리시오 교회의 7시 미사에 매일 아침 참례하였다. 만일 메리가 보이지 않으면 그는 그녀의 아파트(그녀는 유디스와 나와 함께 방 2개를 나누어 썼다)에 가서 그녀가 나올때까지 기다렸다. 그들은 함께 우편물을 가지러 갔으며, 그는 그녀가 모든 편지의 답장을 쓸 때까지 타자기 앞에 묶어놓았다. 매일 11시경에 그들은 거리에서 신문을 팔았고, 그런 다음엔 민방위 본부나 원자력 위원회 앞에서 피켓시위를 계속하였다. 그들은 저녁을 먹으러 사무실로 돌아왔으며, 아마 밤에도 모임에 참석하러 나갔을 것이다. 그것은 메리에게 매력적인 생활이었다.

그녀는 “나는 아몬과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해요. 왜냐하면 나는 드러내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죠. 아몬도 마찬가지예요”라고 말하였다. 또한 그녀는 덧붙여서 “나는 드러내길 좋아하겠끔 키워졌지요.” 라며 약간 씁쓸하게 말했다. 그녀는 결손가정 출신이었고 두 명의 엄마와 아버지들이 있었다고 슬프게 말하였다. 그녀는 상처받았고 학대를 받았지만 그녀가 어머니와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리고 그들을 얼마나 많이 그리워했는지를 말할 수 있다. 아몬은 그녀에게 또 다른 아버지였으며 그녀는 그에게 기대기를 좋아하였다. 그녀는 아몬이 그랬듯이 과시적이었다. 그래서 아몬은 부드럽게 대하여 그녀의 욕구를 채워주었다.

때때로 그녀는 그의 반복되는 일상에 반란을 꾀했으며 아침마다 꽃 시장에 가서 한 아름의 꽃을 얻어 동상과 타자와 책상을 장식하였다. 처음 그녀가 왔을 때 우리는 스프링가의 다락방에 있었다. 그녀는 다락방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뛰어다니며 인디언 전쟁놀이를 하고 싶을 때 실제로 그렇게 했다(그 다락방은 180 피트로 길어서 그녀의 재능을 발휘하였다!). 다른 때에 그녀는 울음이 나올 정도까지 우리를 웃기면서 활력과 유머가 넘치는 풍자극과 패러디를 온몸으로 연기하였다. 영화 모비딕에 나오는 아하부 대장과 남부에 한 상원의원의 흉내도 똑같이 재미있었다. 그녀는 난폭하고 거칠었지만 동시에 그만큼 부드럽고 호소력 있게 될 수 있었다. 그녀는 아름다운 목소리를 지녔으며 가끔 포크송을 불렀다. 한번은 차를 타고 함께 어디를 가고 있었을 때 내가 “오소서 성령이여(성령송가)”를 암송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울먹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즉시 수녀원에 들어가고 싶다고 말하였다.

그녀는 벽이나 길거리에서 주어온 판자조각, 하수구에서 건져 올린 낡은 침대의 머리맡이나 발판 쪽에 그림을 그리곤 하였다. 우리 아파트 방에서 그녀가 있는 쪽은 벽화들, 사진들, 그림들, 종이, 붓, 책들과 옷가지들로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메리는 옷들을 좋아했다. 그녀는 가난한 이들에게 주기 위한 옷들이 들어오기가 무섭게 자신의 몸취향에 맞는 것들을 찾으려고 뒤졌다.

대부분의 남자들처럼 아몬은 그녀의 주름장식 달린 옷과 곱슬머리, 화장한 얼굴들을 좋아하였다. 그는 여자들이 지닌 어떤 경박함을 좋아했다. 메리는 비록 반 정도 그의 취향에 맞추어 주긴 했지만 그런 태도에 반항하였다. 마음에 든 옷을 입었을 때, 그녀는 아름다움을 감소시키기 보다 오히려 그녀를 돋보이게 하는 누더기 옷이나 드라마틱한 의상을 입고 등장하였다. 후에 어떤 때 그녀는 세련된 뉴잉글랜드 취향의 옷과 상류층 여학교 교복 같은 옷을 입곤 하였다. 나는 이것이 중서부인이자 윌 로저스 타입인 아몬을 매혹시켰다고 확신한다. 그는 그녀를 친구들에게 보여주길 좋아하였다. 그는 “그녀가 솔트 레이크로 나와 함께 갈꺼야”라며 떠 벌렸다. 그 떠벌림은 “그리고 그녀는 나와 결혼하길 원하지”라는 식이 되어 버렸다. 그는 자신이 그녀와 결혼하길 원하는 것이 아니라 메리가 그와 결혼하길 원한다고 주장하였다. 그가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 메리는 자신이 정말로 원하는 것은 수녀원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공표하곤 하였다.

“그러나 저 거칠은 창조물을 어느 수녀원이 받아줄까?” 라고 사무실에 있는 모든 이들이 물었다. “그녀는 젊은 남자들을 위협하고 있어. 그리고 수녀원들은 너무도 관습적이야”라며 그녀 가족의 한 오랜 친구가 말하였다. 그래서 모두가 “그녀는 아마도 아몬과 결혼하는 것이 더 낳을 거야”라며 동의하였다. 이런 대화는 보통 있는 대화였다.

그는 오랫동안 솔트레이크 시로 갈 계획을 세워왔다. 뉴욕에서 몇 년이 지나자 그는 사막과 하늘, 떳떳한 힘든 노동과 깨끗한 땀을 그리워하기 시작하였다. 아마도 그는 자신의 삶의 지주라고 말했던 ‘힘든 노동의 생활“을 사실상 포기한 것에 대하여 스스로를 비난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를 일하기보다는 구걸하고 말만 하고 산다고 비난하였다(글을 쓰는 것과 연설하는 것은 군중들에게 일로 보여지지 않는다). 5년이 지난 후 어찌 됐건 그는 뉴욕을 충분히 경험하였다.” “나는 2년간 더 머물 것이며 그 다음엔 유타로 갈 것이오. 거기엔 다른 주들보다도 가톨릭 신자가 더 적지만 몰몬교들이 정부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아들이지 않고 그들 스스로 서로를 돕고 살기 때문에 나는 그들을 좋아하죠.”

그는 또한 정부에서는 허락하지 않으나 몰몬교가 스스로 용인한 일부 다처제를 좋아하였다. 아마도 자기자신의 모든 여자 친구들을 생각했던 모양이다.

메리는 그가 솔트레이크시로 떠나기 6개월 전에 그의 삶 속에 들어 왔다. 첫 번째 계획은 그녀가 서부로 가서 그와 함께 일하는 것이었다. 이 계획은 어떤 의미에서 비관습적이라고 누군가 지적하자 그는 무정부주의의 원칙들을 무시하고 결혼 증명서를 얻기로 결정하였다. 그는 물론 사제가 주례를 선 결혼도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어려움들이 교회 법정에서부터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교회는 그런 경우엔 느리게 움직인다. 비록 그들이 완전한 독신으로 남아있고 싶어했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관계를 포기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그래서 메리는 솔트 레이크시까지 아몬을 따라갔다. 그들은 우체국 자리에 환대의 집을 열었고 그녀는 아몬과 함께 일했다. 그들은 환대의 집을 죠우 힐 하우스와 성 요셉의 피난처라고 불렀다(죠우힐은 수년 전에 있었던 노동 투쟁 동안에 사람에게 총을 쌌다는 고발을 당한 후 처형된 세계산업 노동자 조합의 조직가 였다). 아몬은 또한 메리의 신심에 대한 양보로 그 집을 성 요셉의 집이라고 이름 붙였다. 아몬은 환대의 집에서 살았고 메리는 근처에 가구 딸린 방을 얻었는데 방세를 지불하기 위하여 가정부 일을 하였다. 아몬은 환대의 집을 유지하기 위하여 짐을 하역하는 일을 잡았다. 몰몬교도들 처럼 그들은 차와 커피와 담배를 끊었다.

그들의 간디와 미라같은 상황은 일반적으로 이해 받지 못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관계를 의심스러워하는 부르조아들에게 분개하였으며 가톨릭과 몰몬교 성직자들 모두에게서 오는 비판을 무릅쓰면서 그들의 관계를 고집스럽게 유지하였다.

여름 내내 그들은 과수원에서 일하였다. 보내온 편지를 보면 아몬은 대부분 과일 따는 일을 하였으며 한편 메리는 관개도랑 옆에 앉아서 멕시코인 일꾼들의 아이들에게 그림 그리기를 가르치고 그들에게 장난감을 만들어 주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나서 겨울이 왔을 때 추위 때문에 그들은 실내에서 하는 일을 하였다. 여관에서 일하는 메리는 힘들었다. 그녀는 매일 아침 미사에 가기 위해 일찍 일어났다. 본당 신부는 작은 환대의 집에 오기 시작한 무리의 남자들로 인해 그녀가 성당에 있을 곳이 없다는 사실을 환기시켰다. 그는 그녀가 가길 원하면 어느 때고 샌프란치스코로 가는 버스비를 그녀에게 주겠다고 제안하였다. 어느날 그녀는 버스표 한 장과 25달러를 그에게서 받았으며 고통스러운 이별을 하지 않고 다음날 아침 일찍 떠났다. 가장 헌신적인 회심자였던 그녀는 아몬의 반 성직주의 때문에 그와 매일 다투었다. 그래서 그녀가 떠난 것은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몬에게 그것은 충격이었고 그는 깊게 상처를 입었다. 그는 나를 비난했으며(왜냐하면 메리가 나를 어머니처럼 생각했었다) 또한 본당 신부도 욕하였다.

그러나 항상 해야 할 일이 있다. 유타주 정부에 의해서 처형당할 세 젊은이들이 아몬의 도움을 필요로 하였다. 그는 항소를 위한 탄원서 작성에 함께 하였다. 그는 리플렛을 써서 배포하였으며 모임을 열고 감옥 앞에서 피켓시위를 하였다. 이 일과 그리고 환대의 집을 운영하는 일이 그의 하루를 빼앗아갔다. 그는 환대의 집을 유지시키기 위하여 음식을 구걸하면서 거리를 걸었다. 그는 심지어 자신은 그런 중독을 비웃었지만 환대의 집 남자들을 위하여 담배도 구걸하였다.

지금 그 집은 매일 밤 큰 가게 집 바닥에 잠잘 곳을 찾고있는 40명 정도의 사람들로 하루종일 운영되고 있다. 아몬은 문가에서 자는데, 그래서 사람들을 안에 들어오게 하기 위하여 밤에 일어날 때에도 걸려 넘어질 필요가 없다. 보호구역에서 온 인디안들, 술자리로 가거나 거기에서 돌아온 카우보이들, 일을 쉬고 있는 스페인계 목동들 그리고 화물선에서 내린 사람들(밤 어느 때고 들어온다)이 있다. 그 남자들은 있을 곳을 아몬에게서 제공받았는데, 술에 취하지 않았으면 그는 그들을 들어오게 하였다. 그것은 공동선의 문제라고 그는 말한다. 어느날 밤 술 취한 멕시코 사람이 그의 친구를 데리고 왔다. 그는 내가 아니고, 대신 그를 받아주시오.” 라고 말하였다. 그의 친구가 은신처를 제공받자, 그 남자는 길 아래로 비틀거리며 갔다.

한 동안 아몬은 그의 주교에게 사형과 일반적인 불의에 대항하는 성명서를 내도록 요청하는 분노의 편지들을 쓰곤 하였다. 나는 그를 가장 호전적인 평화주의자 이며 가장 광포한 무정부주의자라고 책망하였다. 지금 그는 더 이상 편지를 쓰지 않는다. 전에는 결코 통제되지 못했던 그의 분노가 다 소진되어 버렸다. 그래도 그의 일을 항구하게 계속 해간다.

여러차례 그는 지금 그의 딸들이 살고 있는 서해안으로 몇 년이 지나면 이사하겠다고 말하여 왔다. 그러나 내가 최근에 편지에서 아직도 그 계획이 유효하냐고 물었을 때, 그는 솔트 레이크 시에서 삶을 마감하길 기대한다고 대답하였다. 그는 그 도시의 아름다움을 사랑하고 몰몬교에 있는 좋은 점 모두를 사랑하고 있으니 얼마 되지 않아 주교도 사랑하게 될 것임을 나는 확신한다.

 

<빵과 물고기>는 미국 메리놀선교회 출판사인 올비스사에서 1997년에 발간된 Dorothy Day의 <Loaves and Fishes>(빵과 물고기)를 '참사람되어'에서 2000년 3월호에 번역한 것입니다. 도로시 데이가 이 책을 쓴 것은 1963년으로, 가톨릭일꾼공동체 운동이 시작된 지 30년만에 운동의 시작과 일꾼들의 삶을 간결하고도 따뜻하게 회상하고 있으며 운동의 입장과 신앙과의 통합을 선명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편집자

유튜브 강의: 한상봉TV-가톨릭일꾼
https://www.youtube.com/@tv-110

종이신문 <가톨릭일꾼>(무료) 정기구독 신청하기 
http://www.catholicworker.kr/com/kd.html

도로시데이영성센터-가톨릭일꾼 후원하기
https://v3.ngocms.co.kr/system/member_signup/join_option_select_03.html?id=hva8204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