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어찌 해서 당분간 살아야 할 집에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빈 집을 알아보러 다닙니다. 친구네 옆집이 비어 있다 합니다.
집과 땅은 인연이랬습니다. 그 집과 나는 인연이 딱 있는가 봅니다. 주인 아짐이 목포 아들네 집에 살면서도 일년이면 너댓번씩 와서 씨앗도 놓고 콩도 거두어가면서 집을 건사하고 계신다는데 마침 조합장 선거에 참여하기 위해 먼 길을 마다않고 와 계십니다.
주인 아짐은 기골이 장대하니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장정 같습니다. 다만 뭔 수술을 받은 뒤로 귀가 먹었다고 합니다. 당신 귀가 안 들려서 그런지 숫제 소리 높여 외칩니다.
"내가 귀가 먹어서 할 수 없능께, 아들메느리도 손주 봐줘서 좋닥 한께 그라제 내가 왜 이 존 디 두고 씨멘트 콩쿠리트 바닥서 살 것이여? 텍도 없제."
다른 사람 말은 안 들어도 되니 주로 혼자 떠드시는데, 원래 남의 말은 잘 안 듣는 사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여간 손짓 발짓 눈짓 웃음짓 다 섞어 이 집에서 좀 살아도 되겠냐고 묻습니다.
"엉? 그래? 혼자 되야부렀다고? 쯧쯧. 나도 오십도 안 된 나이에 혼자 되얐어. 우리 영감이 새끼들 일곱을 놔두고 혼자 가부렀당께. 그래도 내가 그 새끼들 다 키우고 갈치고 다 했어. 괜찮해! 기양 혼자 살어!"
과분지 홀엄씬지 아닌지 밝히기는 생략하고 가방에서 공책을 꺼내 몇 자를 적어가며 허락을 받습니다. 다행히 천천히나마 글자를 읽으실 줄 압니다.
“잉. 그래. 그래, 여그서 살긋다고?"
사람이 안 산 지 오래 돼서 전화도 전기도 끊겨 있습니다. 굳이 그런 것 다 살려서 살고 싶지도 않고, 기왕에 우물도 안 메워져 있는데 모터를 써서 수도를 끌어대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두레박으로 물 길어 먹고 아직 농사철 아니라 농약 걱정은 없을 테니까 빨래는 집앞 냇가에서 하기로 하고 밤에는 촛불을 켜기로 합니다. 안 그래도 좀 쉬고 싶은데, 먹고 자고 입고 하는 것에만 집중해서 살다 보면 좋은 사람이 될 것도 같습니다. 다행히 핸드폰 안테나가 두세 개는 뜨는 곳이라 배터리만 옆집 친구네서 하루이틀에 한 번씩 바꿔주면 될 테니 급한 대로 핸드폰은 하나 장만해야겠습니다.
첫날입니다. 지은 지 이백년이 넘었다는 집. 냇물을 마주하고 서남간으로 집이 앉혀져 있습니다. 방 한 칸, 마루 한 칸, 정재 한 칸, 그야말로 초가삼간입니다. 70년대 새마을운동 이후이겠지만, 초가는 스레트 지붕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정재간에는 쪽방이 하나 붙어 있습니다. 자식 일곱을 이 집에서 다 키웠다고 하니, 어린 자식들이 이 쪽방에서 태를 자르고 어린 영혼을 살찌웠을 것입니다.
안방 앞에는 냇물을 바라보는 툇마루가 처마 밑까지 나와 있습니다. 햇살 따뜻한 날 해바라기 하기 딱 좋은 곳입니다.
마루방에는 아직까지 단 한번도 도배를 하지 않았는지, 흙벽이 그대로입니다. 바닥에 때묻은 장판이 깔려 있을 뿐입니다. 간단한 살림살이를 장판을 닦아내고 마루방에 놓습니다.우물은 정재간 앞 텃밭 가까이에 있습니다.
해 있을 때 우선 방에 불을 때야 합니다. 정재 아궁이에 가마솥은 아직 구멍 나지 않고 멀쩡합니다. 가마솥에 물부터 채워야겠습니다.
어린 시절 몇 번 해보았던 두레박질이 영 서툽니다. 두레박이 물에 잠기게 하려고 텅텅 소리가 나게 우물에 곤두박질치게 하자니 힘만 들고 물은 반도 차지 않기 일쑤입니다.
그 꼴을 보셨는지 지나가던 마을 아짐이 울도 담도 없는 집 마당에 아는 체를 하고 들어서며 시범을 보여 주십니다. 두레박을 고이 물 위에 내려놓으시고는 두레박끈을 살짝, 그러면서도 순간적으로 힘을 주어 절도 있게 한쪽으로 재낍니다. 두레박은 순하게 물에 잠겨 잠시 후에 하나 가득 물을 담고 표면에 떠 있습니다. 그때 힘들이지 않고 서서히 순하게 두레박을 들어 올립니다. 예술이 따로 없습니다.
두레박을 건네받고 나도 따라 해봅니다. 뭐든 열심히만 하면 최고인 줄 알고 살아온 '요즘것들' 티가 짝짝 납니다. 순하게 천천히 하는 것, 그것 자체의 호흡이 영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흠!흠! 사는 것이 모두 이런 것이렷다! 도 닦는 게 따로 없는 것이 옛 사람들의 생활이었으니, 힘으로 한꺼번에, 빨리 하려다는 죽도 밥도 안 되는 것이 시골살림이었던 것이었던 것이다.
한 번, 두 번, 세 번... 열 번, 스무 번... 이제 호흡이 좀 되어 갑니다. 이웃집 아짐은 '숙달된 조교'의 솜씨를 멋지게 보여주시고, 이 어설픈 제자가 좀 기본이 되어가는 것을 확인하고는 웃음을 짓고 당신 볼 일 따라 가십니다.
오래 안 쓰던 우물이라 물을 되도록 자주 퍼내주어야 합니다. 나는 어느덧 심심해질 때마다 두레박질을 하고 있습니다. 이튿날 밤 별이 총총한 하늘 아래서 우물에 비친 별빛을 깨뜨리며, 차갑고 까맣고 고요한 밤에 파문을 일으키며, 나는 늦도록 호흡을 가다듬듯, 마음을 닦듯, 도를 닦듯 두레박질을 하였습니다.
방에 불을 넣어야 합니다. 아궁이가 있는 정재 한켠에는 주인아짐이 콩을 거두고 난 콩대가 쌓여 있습니다. 불쏘시개로는 딱입니다.
집 근처에서 땔감을 찾기로 합니다. 삼칸 안채에 잇대어 지은 헛간, 지붕이 기울어 흘러내린 써까래 몇 개가 바닥에 나뒹굴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때지 않은 방이라 첫날은 나무를 좀 넉넉히 넣어야 할 것입니다. 내일은 아침 먹고 산으로 나무를 좀 하러 가기로 마음먹고, 오늘은 그 나무를 아끼지 않고 넣기로 합니다.
콩대 타는 냄새가 구수합니다. 구들이 잘 놓아졌는지 불이 잘 듭니다. 따뜻하고 붉은 불꽃이 너울댑니다. 마음이 따뜻하고 편안해집니다. 골치 아픈 이런저런 일들은 생각한다고 나아지지 않을 것입니다. 내비두고 우선은 내 한 몸과 마음으로 쏘옥 들앉습니다. 불을 바라보고 있으면 저절로 그렇게 됩니다.
방이 따뜻해질 동안 청소를 해서 이불을 깔아두고 간단하게 밥을 지어먹습니다. 청소라야 뭐 오래 걸릴 것도 없이 거미줄 한번 걷어내고 쓸고 닦고 하면 끝입니다. 낮은 천장, 이불 깔면 밥상 놓을 자리나 겨우 생기는 넓지 않은 방.
새소리가 좀 요란스러워집니다. 개울 건너 앞산을 비껴 해가 지고 있습니다. 방안은 냉기가 가시고 이제 어두워지기 시작합니다. 촛불을 켤까 하다 문창호지에 남아 있는 빛을 마지막까지 누리고 앉아 있습니다.
세상은 하루에 두번씩 개벽을 합니다. 오늘 하루의 개벽이 또 이렇게 시작됩니다. 전혀 다른 세상. 밤입니다. 이제 마을 아짐, 아제들 발소리도 모두 집에 들어가 있습니다.
내가 언제 전기 없는 집에서 살아본 적이 있었나 싶은데, 전깃불이 없는 방은 생각보다 참 익숙하고 편안합니다. 원래 자연스러웠던 것은 아무리 오랜 세월 멀어져 있거나, 잊혀졌다고 생각해도 순식간에 자연스러움이 되는 모양입니다. 전기불이 없는 밤, 아! 참 좋습니다. 한정없이 그냥 앉아 있어 봅니다. 참선의 제일 경지가 머릿속에 생각 오가는 것을 멈추는 것이라던데 가부좌 틀어야 참선입니까? 어둠 속에 홀로 앉아 있는, 오가는 생각 흘려보내는 구들장 위가 포단입니다.
구들이 참으로 잘 놓아졌습니다. 오래 불 때지 않았을 방인데 장작 예닐곱 개로 온방이 뜨끈뜨끈해옵니다. 내일 해거름까지는 이렇게 온기를 붙들고 있어줄 것입니다.
촛불을 켭니다. 작은 방, 낮은 천장, 흙벽에 오랜 세월 덧붙이고 덧붙여진 여러 겹의 도배지, 역시 오랜 세월 이리저리 선을 끌어다 썼던 전깃줄과 때가 전 콘센트 자국들...... 방문과 마주한, 뒤꼍으로 향한 봉창.
봉창의 턱이 한 자 넓이는 족히 됩니다. 지푸라기 섞은 흙으로만 외때 엮어 발라 만든 벽입니다. 말 그대로 토담집입니다. 봉창 위로는 메주 걸던 장대가 벽을 가로지르고 있습니다. 집이, 방안이 참으로 아늑하고 평안합니다. 사는 걸 좀 쉬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아니, 살다가 처음으로 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거짓말 좀 보태자면 엄마 탯속이 이랬을까 싶습니다. 문득 주인아짐이 내 어머니 같습니다. 그리고 나는 오랫동안 객지를 떠돌다 집에 돌아온 자식 같습니다. 주인아짐 오실 날이 기다려집니다.
작은 불꽃 봉우리가 애타게 하늘로 향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 쫓아 살다가도, 촛불 앞에 앉으면 '영혼'을 떠올리게 됩니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촛불 본 김에 절을 해야겠습니다. 터줏대감 계실 데를 가늠하며 삼배를 올립니다. "고맙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집을 돈 한푼 안 받고 살게 해주시다니요. 집이 겁나 편하고 좋은 걸 보니, 우리 터주님 기운이 좋으신갑습니다요. 헤헤. 잘 봐주세요."
장진희
돈 안 벌고 안 쓰고 안 움직이고
땅에서 줏어먹고 살고 싶은 사람.
세상에 떠밀려 길 위에 나섰다.
장터로 마을회관으로.
무주에서 진도, 지금은 곡성 죽곡 보성강변 마을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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