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치유하는 농사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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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치유하는 농사법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2.08.01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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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의 뜻밖의 소식

농사란 천지창조의 깊은 뜻을 새기는 원초적 노동이다. 창세기의 첫머리는 이렇게 장식되어 있다.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내셨다.” 그 하늘 아래 그 땅 위에 물을 내시고, 해와 달과 별을 박아 두시고, 온갖 동식물과 사람을 창조하셨다. 처음부터 땅에 푸른 움이 돋아났는데, 낟알을 내는 온갖 풀과 씨 있는 온갖 과일나무가 돋아났다. 사람에겐 이 작물들을 양식으로 삼으라는 명령도 내려졌다. 이 모든 걸 하느님은 흡족해 하셨다.

처음에 사람은 자연스레 돋아난 곡식과 과일을 얻어먹었으나, 점차 거두어들인 작물의 씨를 이듬해 다시 뿌려서 더 큰 수확을 기대하게 되었다. 그래서 생겨난 게 농사라면, 농사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는 이들이 누리는 원초적 은총이다. 그리고 이런 기쁨을 얻어 누리기 위해선 당연히 수고로운 노동이 요구되었다. 성서에선 인간의 첫 범죄 이후에 받은 벌이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의 의향대로라면 아마도 노동이 깨어진 인간성을 회복시키는 치유력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노동은 자연과 더불어 농사짓는 가운데 가장 적절하게 효능을 발휘하는 것 같다.

농사에 대한 이야기는 성경에서 하느님과 예수님에게도 닿아있다.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요한 15,1) 이 발언은 예수의 입에 담겨 전해졌다. 성서 문맥을 떠나서 예수의 이 발언은 세상의 모든 농부들에게 복음이 되기에 충분하다. 농부로 산다는 것은 하느님을 닮는다는 것인데, 어찌 그 마음이 기뻐 뛸 만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현실은 늘 다른 이정표를 보여준다.

예전에 농사는 양반들의 필요에 따라서 ‘사농공상(士農工商)’의 반열 가운데 앞머리에 두어졌으나, ‘농투성이’라는 말이 지시하듯이 문명개화의 속도에 따라서 계속 뒷전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편의적인 발상이긴 하지만, 최근의 추세에 따르자면 ‘상사공농(商士工農)’이란 표현이 더 적절한 것처럼 보인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요즘은 장사꾼이 세상을 지배하는 이른바 신자유주의 시대 아닌가.

 

노동을 외면하고 입으로만 떠드는 사랑의 설교는 위선이나 다름없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짚신을 신고 매일매일 호미를 손에 들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의무가 생활의 중심이자, 사회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사진출처=pixabay.com)
노동을 외면하고 입으로만 떠드는 사랑의 설교는 위선이나 다름없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짚신을 신고 매일매일 호미를 손에 들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의무가 생활의 중심이자, 사회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사진출처=pixabay.com)

정치도 장사에 이바지하지 않으면 인기를 얻을 수 없고, 학자들은 지식을 팔아서 장사를 돕는 게 부끄러울 게 없고, 공장 노동자는 장사할 상품을 생산하고, 농부들 역시 수익성이 높은 농작물을 생산하느라고 여념이 없는 게 현실이다. 게다가 농부들은 투기작물을 재배하다가 실패하여 빚더미에 오르거나, 산 좋고 물 좋은 시골에 살면서도 농약 중독으로 몸을 망가뜨린다.

파종기에는 그야말로 해 뜨기 전에 밭에 나가서 날이 어둑해져야 괭이에 묻은 흙을 떨어내고 집에 돌아온다. 그만큼 고달픈 노동 탓인지 농부들은 대개 나이보다 늙어 보인다. 피부가 상하고 거친 손마디가 마른 나무껍질 같다. 무슨 영화를 보자고 이 고생인가. 그러니 인지(認知)가 깨이기 시작하면 아이들은 도회지로 유학 가고, 일가족이 아예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 밥벌이를 찾는다.

하느님은 '농부'처럼 생명을 심고 보살피고 거두신다

예수님이 육적으로 요셉의 아들이라서 목수였다면, 영적으로는 하느님의 아들이라서 마찬가지로 농부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아버지가 농부라고 고백했던 예수님은 아버지처럼 생명을 심고 보살피고 거두는 거룩한 천직을 마다할 것 같지 않다. 그는 농사에 대해 일가견(一家見)을 갖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 탓일까, 그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농사짓는 이야기를 통해 사람들에게 전달하고자 하였다.

‘씨 뿌리는 이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농부였다. 어느 농부가 씨를 뿌리러 나갔는데, 어떤 씨는 길가에 떨어져 새들이 쪼아 먹었고, 어떤 씨는 돌밭에 떨어져 햇볕에 말라죽었으며, 어떤 씨는 가시덤불 속에 떨어져 열매를 내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몇몇 씨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수확을 냈다고 한다(마르 4,1-9).

이 이야기는 어느 멍청한 농부의 한심한 파종을 묘사하는 게 아니다. 팔레스타인에선 건기(乾期)가 대략 4월에서 10월까지 오래 지속되기 때문에 이 기간 동안에 밭 가운데로 사람들이 지나 다녀 길이 생길 수 있었고 돌밭이 되거나 잡풀이 자랄 수도 있었다. 그러나 11월에 우기(雨期)가 시작되면 본격적인 농사철로 접어드는데 이 때 내리는 비의 양이 엄청나 어제 사막이었던 곳에 오늘 갑자기 강이 흐를 정도라고 한다. 따라서 좋은 땅과 나쁜 땅을 미리 가려낸다는 것은 역부족이었고, 오히려 여기저기 씨를 뿌려 두는 것이 더 유용했을 것이다.

그러면 박토가 옥토 되고 옥토가 박토 되는 상황에서 예기치 않은 곳에서도 좋은 소출을 낼지 모른다. 마찬가지로 예수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여기저기 심는 데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 심지어 사마리아 땅에선 이야기를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어느 여인과 야곱의 우물가에서 몇 시간을 보내면서도 그 시간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어느 날 문득 그 땅이 옥토가 될 지 누가 알겠는가. 이처럼 예수는 농부들의 사정을 잘 알고 적절한 비유로 하느님 나라를 설명하였다.

그 하느님 나라는 나무처럼, 여느 작물들처럼 하루아침에 결실을 맺는 게 아니다. 농사는 절기마다 해야 할 일이 정해져 있다. 땅에 거름을 내야 할 때가 있으면 씨를 뿌릴 때가 있고, 물을 줘야 할 때가 있으면 김을 매야 할 때가 있고, 지주를 세워서 묶어 줘야 할 작물이 있으면 튼실한 줄기가 뻗도록 가지를 쳐야 할 작물이 있고, 나락을 거둘 때가 있으면 참깨를 털어야 할 때도 있다.

농사란 마음이 조급하면 망치는 법이어서 배추처럼 거름을 많이 내서 좋은 작물도 있고, 거름이 적어야 결실이 많은 콩과 같은 작물도 있다. 농사는 부지런하되 서두르지 않는 게 상책이다. 새벽마다 빠짐없이 밭둑을 걷노라면, 그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작물이 자란다는 말도 있다. 섬세하게 관심을 가지면서 무리하게 욕심을 내지 않아야 한다. 한 번 농사를 망치면 일 년이 헛수고이고 한 번 몸을 망치면 평생 농사를 망친다.

예수는 농사의 과정을 익히 알고 있기에, 하느님 나라를 겨자씨에 비유할 줄도 알았다.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할까, 혹은 무슨 비유로 그것을 표현할까? 겨자씨앗과 같습니다. 그것이 땅에 뿌려지면 자라서 어떤 푸성귀보다도 크게 되어 큰 가지를 뻗칩니다. 그리하여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습니다.”(마르 4,30-32) 눈에 뵈지 않는 땅속에서도 겨우내 생명이 자라고 있음을 눈치채지 못하는 농부는 좋은 농사꾼이 될 수 없다. 말하지 않아도 보이지 않아도 중생의 가슴 속 응어리진 상처를 알아채고 어루만져 줄 수 있을 때 그만큼 하느님 나라는 가까이 온다.

매일매일 손에 호미를 쥐고

러시아의 작가 레오 톨스토이가 말년에 농사에 마음이 빼앗긴 것은 돈강 유역에 살던 테모페이 본다료프라는 농부 때문이었다. 그는 “그대 이마에서 땀을 흘려야 그대의 빵을 얻으리라”라는 성서 말씀을 묵상하면서, <근면과 무위도식-농민의 승리>라는 책을 썼다.

“하느님이 사람에게 시킨 일을 요약하면 두 가지다. 즉 남자는 땀을 흘려 빵을 생산하고, 여자는 고통을 치러 아기를 낳으라는 것이다. 여자가 맡은 일은 변동이 없었다. 황후도 아기를 낳으려면 고통을 치러야 한다. 그런데 남자들이 하는 일에는 불합리한 변화가 생겼다. 일하는 자와 일하지 않는 자로 나누어졌으며, 모든 일 중에 가장 근본적인 일에 해당하는 농업을 오히려 멸시하는 풍조가 나타났다. 돈으로 빵을 산다. 돈만 있으면 된다. 그 결과, 하느님이 당부한 일을 회피하기 위해 온갖 수단 방법을 다 쓰게 되었다.

들판의 짐승이나 하늘을 나는 새나 물 속의 고기들이나 하느님이 시킨 대로 살고 있는데, 교육받고 지식이 있다는 인간만이 사명을 회피하고 있다... 노동을 외면하고 입으로만 떠드는 사랑의 설교는 위선이나 다름없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짚신을 신고 매일매일 호미를 손에 들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의무가 생활의 중심이자 사회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똘스또이>, 민병산, 창작과비평사, 1985)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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