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온 미래...진실의 증인 되기
상태바
먼저 온 미래...진실의 증인 되기
  • 엄문희
  • 승인 2022.08.01 08:2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엄문희 칼럼
비자림로 숲을 지키기위해 비 오는 밤에 모였던 사람들. 항상 마음에 품고 기억하는 한 장면이다. 그 날의 이름은, 전야. 세상 모든 역사는 ‘ 전날 밤’을 가진다.(사진=엄문희)
비자림로 숲을 지키기위해 비 오는 밤에 모였던 사람들. 항상 마음에 품고 기억하는 한 장면이다. 그 날의 이름은, 전야. 세상 모든 역사는 ‘ 전날 밤’을 가진다.(사진=엄문희)

비질(vigil)

비질(vigil). 경계, 경각, 어떤 일의 출현을 기다리며 감시하는 행위를 뜻하는 ‘vigilance’의 축약어로 철야기도 또는 전야제의 의미를 가진 그리스도교회 언어라고 한다. 나는 이 말을 동물해방 운동하는 친구들에게서 처음 들었다. 그들은 살해당하기 직전의 동물과 도살장 앞에서 마주하는 일을 ‘비질’이라 불렀고, ‘진실의 증인되기’ 활동이라고 말했다.

그 진실이란 이헌 것이다. 동물을 먹는것이 현실이라 해도 그것이 당연한 것은 아니라는 것, 오히려 현재와 같은 공장식 축산업의 착취와 대량살상 시스템, 무엇보다 이 살해는 결코 용인할 수 없는 일이며, 무엇보다 이 폭력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가 역사적으로 소수자와 약자 여성 그리고 자연을 착취하며 타자화했던 바로 그 지난한 맥락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동물해방운동이 가리키는 ‘비질’은 현재를 가능하게한 과거(축적된 시스템 혹은 세계관)를 정면으로 맞딱뜨리는 일이고, 그 과거로 부터 ‘모두’가 해방되기 위해 새롭게 구성하는 미래의 시간대에 먼저 서는 일인 것이다.

그리스도교에서 ‘비질’은 철야, 전야(前夜)제, 대축일 망일(望日)의 의미가 있다. 무엇보다 ‘먼저 와서 기다리는 행위’를 가리킨다. 초대교회에선 대축일과 중요한 기념일에 전야제를 가졌다. 이와 같은 철야, 전야제 행위는 스승 그리스도의 “깨어 있으라(마태 24장).”는 당부를 환기하게 하는 의식이었다. 부활 전야와 성령강림 축일 전날과 매주 주일 전날, 그리고 순교자들의 축일같은 중요한 기념일엔 전야예절 형식을 빌어서라도 깨어있고자 했다. 현재는 20세기 전례 개혁으로 부활축일 전야제를 제외한 모든 전야제를 로마 전례일정에서 지운 상태다. 예전 같은 전야제는 아니지만, 성탄과 부활절 대축일과 성령강림대축일 같은 주요 축일의 전날 저녁미사 형태로 계속되고 있다.

이 철야’들’이 경계에서 새로운 세계의 출현을 지켜보는 목격자 혹은 예언자가 되기 위한 삶의 태도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이 행위는 필히 새로운 세계를 끌어오려는 운동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지켜본다'는 것은 단지 심판의 날을 손 놓고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정신 차리고’ 주의하며 예비하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평생을 길 위에서 진실을 외쳤던 문정현 신부님은 그 밤도 천막에서 성탄전야미사를 집전하고 눈길을 헤쳐 시민들의 천막농성장으로 달려왔다. (사진=엄문희)
평생을 길 위에서 진실을 외쳤던 문정현 신부님은 그 밤도 천막에서 성탄전야미사를 집전하고 눈길을 헤쳐 시민들의 천막농성장으로 달려왔다. (사진=엄문희)

비자림로 삼나무가 베어지던 날,
인간의 자리마저 빼앗긴 날

이 ‘전야’라는 말이 나에게 생겨난 밤이 있었다. 4년 전 여름에 제주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크게 흔든 사건이 하나 일어났다. 많은 이들이 사랑했던 길 비자림로 삼나무가 한 순간에 베어진 것이다. 이것이 여느 개발 벌목과 다른 사건이 된 데는 “해도 너무한다”는 감정의 폭발, 이제껏 침묵했던 파괴에 관한 참을성이 선을 넘었기 때문이다. 사건의 탄생이었다. 개발로 얻게될지도 모른다는 편리와 욕망의 한계없음을 각성한 사람들은 숲으로 달려갔다. 그 숲의 파괴는 단지 그 숲의 파괴로만 생각되지 않았다. 이 숲이 파괴는 인간의 자리도 곧 사라질 꺼라는 예고를 함께 하는 것이었다.

밤이었다. 나는 숲을 지키겠다고 나선 시민 가운데 하나였다. 숲을 지키려는 불침번의 밤이었다. 숲에선 나도 그저 하나의 동물에 지나지 않았다. 하필 밤새 거센 비가 쏟아졌다. 3월 초 제주 중산간의 추위부터 들이닥쳤다. 얇은 천 작은 텐트 안에서 웅크린 채 비가 멈추기를 기다렸다. 외로웠고, 무서웠다. 얼마나 지났을까. 비가 그쳤고, 숲이 조용해졌다. 적막했다. 그런 줄 알았다.

그 순간, 나는 생전 들어본 적 없는 엄청난 아니 많은 소리를 만나게 된다. 들어본 적 없는 소리였기에 그것이 네 발 달린 짐승의 소리인지, 새인지, 다른 차원에서 방문한 음성인지알 수 없었다. 텐트 바로 옆에서도 났고, 나무 꼭대기, 등 뒤로 펼쳐진 긴 숲의 끝에서, 하늘 위에서, 멀리 오름에서도 났다. 너무 많은 목소리가 그 숲에 있었다. 그 숲엔 삼나무만 있지 않았다. 내가 겪은 가장 두려운 밤이었다. 이 많은 목소리는 누구인가? 어디에 있었는가? 더구나 이들은 내일 올 일을 모르고 있지 않은가? 생각이 여기 이르자 한없이 초라해졌다. 나의 삶 어딘가에서 마주친 적 있던 이 비슷한 순간들. 그리고 지금. 여기. 앞으로 일어날 일에 나의 혐의를 부정할 수 없게 된 것이 가장 무서웠다. 나는 그 밤을 ‘전야’라고 불렀다.

전야는 어떤 날의 전날 밤이다. 나의 그 밤은 학살의 전날 밤이었고, 어쩌면 전쟁의 복판이기도 했다. 경계에서 만이 선명해지는 진실. 그것은 최전선이 맨 앞이라는 것을 환기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 시간을 목격한 뒤, 나에게도 새로운 세계가 열리기 시작했다. 이것은 동물해방 운동가 섬나리의 문장이다. 나의 그 밤이 그랬다. 그것은 그의 말처럼 ‘새롭게 열린 세계’였다. 궁극의 현실을 목격한 이의 슬픔은 강력한 확신을 얻게 된다.

다시 4년 전 2018년, 제주도청 앞엔 이 조직적인 살해를 멈추라는 메시지와 함께 시민들이 천막 농성에 들어갔다. 천막의 질문은 다르고 또 같았다. 기후위기를 역행하는 공항의 신설, 그 광대한 규모의 예정지에서 죽음을 예고받은 무수한 존재들, 의료민영화, 마을공동체를 파괴하는 각종 개발사업, 군사기지로 야기되는 불안 등… 이제껏 국가주의에 포섭되어 의견조차 낼 수 없던 질문들이 모여들었다. 이미 그곳은 강정의 내 친구 호수의 표현처럼 ‘먼저 온 미래’였다.

그 재난공동체에도 성탄절이 왔다. 밤이었다. 강정마을에서 전야 미사를 마친 팔순의 문정현 신부님이 중산간 눈길을 헤쳐 도청 앞에 나타났다. 자정 직전이었다. 길에서 평생을 살았던 당신은 그 밤도 길에서 춥고 가난한 마사를 하셨으면서, 역시 길에서 밤을 보내는 사람들 때문에 쉬지않고 달려오셨던 거였다. 야간집회 끝내고 헛헛했던 사람들 마음에 불이 켜졌다. 모여있던 우리는 급히 불을 키워 둥그렇게 모였다. 강정에서 함께 도착한 컵초에 불을 켰다. 촛불이 타올랐다. 누군가는 그 작은 불에 손을 녹였다. 누구랄것도 없이 노래를 시작했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폭풍인지 횃불인지 온통 마음이 뒤엉켜 눈이 무서웠던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거룩하고 고요한’ 밤을 알아차린 순간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힘이 되었고, 서로의 온기가 되었다. 용기가 되었다. 새로운 세계가 열리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고요하고 거룩했던 전야에 함께 몸을 녹였던 동료이자 친구, 얼마전 세상을 떠난 진규범에게 이 글을 바친다.

 

엄문희 
혐오와 희생의 시스템으로 파괴되는 세계를 응시하며 국가폭력에 빼앗긴 목소리들의 투쟁을 위해 2016년 부터 강정마을 주민으로 살아가고 있다. 두 아이의 엄마이며, 여성병역거부자이고, 모든 동물들의 친구다. 1991년 부활절에 가톨릭교회에서 세례를 받았으나 전쟁에 동참하는 군종교구와 여성불평등에 질문하며 세례명으로 호명되기를 거부한다. 

종이신문 <가톨릭일꾼>(무료) 정기구독 신청하기 
http://www.catholicworker.kr/com/kd.htm

도로시데이영성센터-가톨릭일꾼 후원하기
https://v3.ngocms.co.kr/system/member_signup/join_option_select_03.html?id=hva82041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