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세상에 대한 이해는 자신에 대한 정직하고 깊은 인식 없이는 불가능하다. 예수님도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마태 7,5) 하고 말씀하셨다. 그분을 죽인 것도 사람들의 ‘자기 무지’였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약간의 역사
“너 자신을 알라.”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 현관에 새겨져 있었고 소크라테스 가르침의 기초였던 이 말에서 서양철학이 시작했다고들 한다. 소크라테스는, 자기 사명이 사람들의 “몸과 재산이 아니라 (영)혼이 최선의 상태에 있도록 돌보게 하는 것”이라 했다(플라톤, <소크라테스의 변론>, 천병희 역, 50쪽).
이 ‘자기 돌봄’(epimeleia heautou)이란 주제는 세네카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같은 라틴 철학자들도 직역하여(cura sui) 그대로 사용했는데 내용상 ‘자기 인식’과 같다. 자기 이해와 인식이야말로 영혼을 보살피는 수행의 첫걸음이요 고갱이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리스도교 수도승들의 수행론(asceticism)에 엄청난 영향을 행사한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모든 고대 철학자가 사실상 수행자들이었다면, 교부들 또한 그리스도교를 “참된 철학”으로 인식했다. 그리하여 자기 인식 또한 ‘관상’과 함께 “세례를 받고” 교회 전통 안에 정착한 주제가 되었다(Pierre Courcelle, Connais-toi toi-même; de Socrate à saint Bernard, Paris, 1974).
허약함, 또는 ‘상처 입을 능력’(vulnerability)
자기를 안다고 자신하는 사람일수록 더 모르는 경우가 많다. “있는 그대로의 나”와 “‘나’라고 믿는 나”가 다르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알기도 생각만큼 쉽지 않다. MBTI나 에니어그램 같은 성격 유형 분석도 도움이 되리라. 성격 유형이 ‘나의 전부’는 아닐지언정. 심리 분석이나 상담을 통해 성장 과정의 내력이나 무의식적으로 반복되는 심리 패턴을 이해하는 일도 자기 돌봄의 한 부분일 터.
그러나 자기 인식을 꾀하는 모든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정직함이다. 지난달 ‘부끄러움’에 관한 이야기는 사실 죄다 정직함에 관한 이야기다.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진실의 직면이 아닐까. 둘째 수난 예고 끝에 나온 제자들의 반응은 늘 인상적이다.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마르 9,32). 프란치스코 교황 말씀대로 우리는 늘 내 안팎의 실상에 “놀랄 태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
심리학자 브르네 브라운에 따르면 자신의 취약함과 부끄러움을 정직하게 대면하고 드러낼 수 있을 때 사람은 “마음을 다하는 삶”(wholehearted life)을 살아갈 수 있다. 그 토대는 “나 충분히 괜찮아!”(I am enough!)라고 느끼는 근원적 자존감이다. 교회 영성이 이 자존감의 토대가 될 수 있을까?
‘부끄러움’에 대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가르침은 정직해도 된다는 초대이다. “하느님의 얼굴”이신 예수님께서 삶과 죽음을 통해 드러내 보이신 하느님의 참모습이 ‘자비’이기 때문이다. 이 자비를 액면가 그대로 체험할 때 비로소 “나 충분히 괜찮아!” 하며 깊은 안도의 숨을 쉴 수 있다. 그분께서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셔서 우리를 늘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 주신다(마태 11,29). 우리 스스로 뿌려 거둔 결과인 고통의 현장에서도 우리와 함께 뒹구시며 신적 특권이라는 우산을 접고 “함께 비를 맞아”(신영복, <담론>) 주신다.
그렇다면 우리 또한 얼마든지 허약하고 부끄러운 모습 그대로 드러나도 된다. 비로소 (복음적 의미로) ‘겸손’할 수 있다. 영어 단어 vulner-ability(허약함)에는 어원상 ‘상처 입을 능력’(vulnerabilitas)이란 뉘앙스가 있다. 취약함과 부끄러움을 자비의 빛 앞에 드러낼 때, 우리는 더는 취약하지도 부끄럽지도 않은 빛의 자리에 들어선다. 하느님 당신께서 예수님을 통해 먼저 ‘상처 입을 수 있는 하느님’(Deus Vulnerabilis)으로 드러나신 바에야! 심리-윤리적 수준에서 자기 인식이 도달할 수 있는 종착점은 이쯤일 것이다. 여기는 동시에 관상적 수준에서 자기 인식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Habitare secum’, 자기와 함께 머물기
그레고리오 대종은 베네딕토 성인이 “자기와 함께 머물렀다.”(habitavit secum)는 의미심장한 표현을 쓴다. 집 나가 떠돌던 둘째 아들은 굶주림의 순간 비로소 ‘제정신이 들었다’(루카 15,17 참조). 대종은 이 문장의 직역이 “자기 안으로 되돌아왔다.”(in se autem reversus)임을 지적하면서, 둘째 아들이 그때까지 “자기 밖에” 있었던 셈이라 설명한다. 온갖 염려와 애착으로 자기 바깥을 떠돌다가 비로소 자기 ‘마음’(cor)으로 되돌아온 사람은 “(모든 것을 보시는 하느님의) 시선 안에 홀로 (서서) 자신과 함께 머문다”(solus in spectatoris oculis habitavit secum, <대화집>, 2,3).
이러한 자기 인식은 더는 심리적이고 윤리적인 수준에 머물지 않는다. 내가 나를 보는 눈이 더는 내 눈이 아니고 하느님의 눈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생전 처음, 같은 눈으로 나뿐만 아니라 하느님과 세상을 본다. “당신 빛으로 저희는 빛을 봅니다.”(시편 36,10)라는 성경 말씀과 “내가 하느님을 뵙는 눈이 바로 하느님께서 날 보시는 눈이다.”라는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말은 서로 그리 멀지 않다.
자기 인식과 하느님 인식의 여정은 이렇게 겹친다. 그리고, 내가 바뀌면 세상도 비로소 바뀐다. ‘자기 돌봄’과 ‘세상 돌봄’ 또한 겹치는 이유가 여기 있다.
* 이 글은 <경향잡지> 2022년 7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이연학 신부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수도원 창설 소임을 받고 미얀마 삔우륀에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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