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어 성경은 부끄러움과 관련해 두 종류의 단어군을 사용한다. ‘아이스퀴네’(αἴσχύνη)는 자랑스럽거나 떳떳하지 못하며 실망을 불러일으키는 상태를 뜻한다.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표현은 그래서 충직한 신앙고백과 사실상 동의어로 쓰인다(루카 9,26; 2티모 1,8.12.16 등 참조). ‘그리스도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한다.’(갈라 6,14 참조)는 표현으로 뜻이 더 잘 살고, 이어서 ‘자기 약점을 자랑한다.’(2코린 11,30 참조)는 말이 그 구체적 실천의 행로를 잘 드러낸다.
한편 ‘오네이도스’(ὄνειδος)와 ‘오네이디스모스’(ὀνειδισμός)는 주로 비난과 치욕 또는 수모와 관련된 말이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치욕적인 고난을 겪으신 예수님과 함께 우리도 그분의 치욕에 동참하자고 초대한다(히브 13,13; 1베드 4,14 등 참조). 이런 식으로 ‘부끄러움’은 스승처럼 세상에서 몰이해와 무관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가난한 제자들에게 무량한 구원의 가치를 지닌 말로 ‘성변화’ 된다.
공포와 부끄러움: 커츠와 윤동주의 경우
광기 어린 폭력의 화신이 되어 캄보디아 밀림에 자기 왕국을 건설한 커츠 대령은 윌러드 대위의 손에 살해당하면서(정확히는 살해당해 주면서) “두려워! 두려워!”(The horror! The horror!)라고 중얼거린다. 프란시스 F. 코폴라의 영화 <지옥의 묵시록>(Apocalypse Now)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커츠야말로 두려움과 가장 거리가 먼 사람일 텐데, 뭐가 그리 두려웠을까?
원작 소설인 조지프 콘래드의 「암흑의 핵심」(Heart of Darkness, 1899년)은 대답의 실마리를 좀 더 제공해 준다. 그 ‘공포’는 제국적 식민주의의(그러나 모든 종류의!) 폭력 이데올로기에 짐짓 풍덩 뛰어든 이가 인간성의 어두운 바닥, 그 ‘암흑의 핵심’을 맨몸으로 접촉한 데서 터져 나오는 것이었다. 폭력으로 상대를 타자화할 때 필경 상대의 말살만으로 끝나지 않고 자신의 인간성마저 파괴된다는 것을 생생히 느꼈을 터였다.
원작 소설에는 이 단말마 신음이 모종의 정직한 자기 인식의 표현일 수 있다는 암시가 좀 더 있다. “두려워! 두려워!”라는 중얼거림에 희미하나마 ‘부끄러움’이 담겼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구원의 실마리가 될 수 있다.
인간 어둠의 심연을 맨눈으로 응시하는 이 무시무시한 자리는 남뿐만 아니라 끝내는 자기를 파멸시키는 길목이 될 수도 있지만, 타고난 ‘수오지심’(羞惡之心)을 회복하는 출발점일 수도 있다.
역사는 처음부터 ‘부끄러움’의 맑은 인식을 선택한 이들도 보여 준다.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윤동주 시인(1917-1945년)이다. 그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소망했던 이유는 한없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을 리가 없다.
겪을 때마다 새삼 기가 막힌 아이러니가 있다. 정작 심각한 잘못을 저지른 이들은 너무도 자주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얼굴로 서 있고, 무죄하고 결백한 영혼이 ‘대신’ 부끄러워한다는 사실이다.
윤동주의 경우 부끄러움은, 주된 관심이 ‘좋은 시인이 되고 싶다.’는 소시민적 소망에 머문단 사실에서 비롯한다. 사촌 송몽규를 비롯하여, 고향 용정촌의 많은 이가 동포를 위해 목숨을 건 투쟁에 나섰는데도 말이다. ‘서시’ 이후에도 뒤로 갈수록 그의 시에는 부끄럽다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이와 관련하여 문학평론가 신형철(조선대학교 교수)은 이렇게 기록한 바 있다.
“윤동주는 … 1945년 2월 16일에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죽었다. 그는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적었다. … 그러나 그는 시를 쉽게 쓴 것이 아니라 인생을 어렵게 살았다. … 나는 그의 문장을 반대로 뒤집어 나에게 읽혀야 한다. ‘시는 쓰기 어렵다는데 인생이 이렇게 쉽게 살아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한겨레, 2016년 4월 1일 자 ‘신형철의 격주시화’ 중에서).
이런 식으로 시인의 부끄러움에 독자는 감염되었다. ‘복음화’도 결국 부끄러움을 전염시키는 시와 같아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 새삼 부끄러워진다. 갈 길이 멀다.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 미얀마의 사제들
혹독한 재난이나 전쟁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트라우마에 가까운 죄책감에 시달리는 경우를 자주 보고 들었다. 가장 최근에는 작년 이곳 미얀마의 한 교구 사제단 피정에서였다. 군사 정변으로 시민들의 삶이 군홧발에 마구 짓밟히던 때, 본당과 사제관도 그 야만의 현장에서 제외되지 않았다. 피정을 지도하시던 할머니 수녀님은 먼저 신부님들이 느끼는 감정을 서로 나누도록 초대하셨다. 거의 모두 ‘두려움’만큼이나 공통으로 경험한 감정은 ‘죄책감’이었다.
본당 교우 가운데도 많은 이가 잡혀가고 죽어 나갔는데 자기만 멀쩡히 살아남았다는 사실에서 심한 자기혐오와 부끄러움을 겪고 있었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로 끝나는 B. 브레히트의 시 <살아남은 자의 슬픔>(원제: Ich, der Überlebende[‘나, 생존자’]) 그대로였다. 더 놀라운 것은, 그렇게 부끄러움을 털어놓는 순간 치유와 용기와 새로운 힘을 얻게 되더란 사실이다. 1박 2일 피정의 마지막 시간, 주교님을 비롯하여 거의 모두는 가장 구하고 싶은 은총으로 ‘끝까지 양 떼와 함께 있을 용기’를 꼽았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장면이었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부끄러움의 은총’에 대하여 자주 이야기한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이야말로 문제다. 체념(포기)은 ‘닫힌 문’이지만 부끄러움은 ‘영혼의 비밀스러운 초대’요 ‘열린 문’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부끄러움에서 부끄러움으로, 용서에서 용서로 이어지는 여정’이다(2018년 부활 제2주일 강론 참조).
부끄러움에 대한 교종의 가장 최근 언급은 강론이 아니라 공적 고백이었다. 작년 유럽, 특히 프랑스 교회 성직자들의 아동 성 추문 문제가 불거졌을 때 자신과 교회의 부끄러움을 그는 공공연히 고백하였다. “주님께는 영광, 저희에게는 부끄러움이 있을 따름입니다.”
도스토옙스키는 소설 <백치>에서 미쉬킨 공작의 입을 빌려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한다.”고 말한다. 세상을 구원하는 그 아름다움은 부끄러움인지도 모른다.
* 이 글은 <경향잡지> 2022년 6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이연학 신부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수도자.
수도원 창설 소임을 받고 미얀마 삔우륀에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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