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시 변두리 시골마을에 이사를 왔다.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작은 변화가 몇 가지 있다. 첫 번째로 음악을 잘 듣지 않는다. 나는 대학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했다. 그래서 항상 클래식 음악을 배경음악처럼 두고 생활했다. 결혼 초기 아내는 음악을 끌 수 없냐고 불평할 정도다. 그랬던 내가 오디오로 음악을 듣지 않는다. 음악보다 더 감동적인 소리를 듣기 위해서다. 바람, 비, 풀벌레, 새, 개구리의 소리다.
두 번째로 오전 5시부터 하루를 시작한다. 해가 뜨기 때문이다. 뜨는 햇살에 의지해 성서를 묵상하고 묵주를 굴리며 예수기도를 드린다. ‘주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짧은 기도를 의식하는 순간 하늘의 사디리가 내려와 하느님과 독대한다. 정념이 사라지고 삶에 드리운 안개가 사라짐을 경험한다.
세 번째로 풀을 자주 깎는다. 내가 사는 집 주변은 온통 풀이다. 이사를 오고 보름을 생활하면서 풀을 세 번 깎았다. 낫질로 감당할 수 없는 넓이라 예초기를 사용한다. 기계에 의지해 제초를 해도 3-4시간은 족히 걸린다. 땀으로 온몸이 젖고근육이 뻐근하지만 노동의 기쁨이 나를 위로한다. <안나 까레리나>의 풀베기는 나의 이야기가 된다.
지금 그에게 커다란 기쁨을 가져다 주는 변화가 일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 시간 동안은 자기가 하고 있는 것을 잊어버렸다. 일이 쉬워졌다. 그러나 일단 그가 하고 있는 일을 의식하고 보다 잘하려고 애쓰기 시작하기만 하면, 그는 갑자기 일의 어려움을 느끼게 되고 두둑이 잘 깎이지 않는 것이었다.
레빈은 오랫동안 베어나감에 따라 더욱더 무아지경의 순간을 느끼게 되었다. 그런 때에는 이미 손이 낫을 휘두르는것이 아니라 낫 그 자체가 자기의 배후에서 끊임없이 자기를 의식하고 있는 생명으로 가득 찬 육체를 움직이고 있기라도 하듯이 마치 요술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일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데도 일이 저절로 정확하고 정교하게 되어가는 것이었다. 그런 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레빈은 시간의 흐름을 느끼지 못 했다. 만일 누군가가 그에게 몇 시간 동안이나 베었느냐고 물었다면, 그는 30분 쯤이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벌써 정오가 가까워 지고 있었다.(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농촌에 정척하려는 이유는 지속가능한 삶을 살기 위해서다. 도시는 끊임없이 소비하는 괴물이다. 생산능력이 없는 도시가 생산하는 것은 쓰레기 뿐이다. 살아있는 것 같지만 죽음의 공간이다. 제 스스로 자립할 수 없는 도시는 전대를 흔들며개발이란 두 글자로 농촌을 조롱하고 잠식한다. 농촌에 기생하는 제 모습을 망각하고 있다.
기후위기를 넘어 재앙으로 명명하는 시대에 농촌을 살리지 않으면 도농 모두 생존할 수 없다. 농촌을 살린다는 말은 농촌의 생산활동인 농사와 그 주체인 농부가 제대로 대우받도록 한다는 뜻이다. 또 먹거리를 생산하는 땅과 환경이 개발이란이름으로 망가지지 않도록 한다는 뜻이다.
자본주의 속에 이 일이 가능할까? 달걀로 바위를 치듯 불가능한 일일지 모른다. 하지만 누군가는 꼭 해야 할 일이다. 그리고 불가능을 가능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이들이 아직 많이 있다. 그래서 나는 나희덕 시인의 가능주의자란 시 한 구절을내 마지막 신앙고백으로 삼으려 한다.
저는 가능주의자가 되려 합니다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믿어보려 합니다
이원영
노동이 기도요 기도가 노동인 삶을 추구하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농어촌선교센터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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