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가지 없는 점주로 남으리>(몽스북, 2022)라는 책을 내고 좋은 점이 있다면 이런 거다. 예전엔 그냥 투덜쟁이인 줄 알았는데, 책까지 쓴 걸 보니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에 깊게 사색하고 비판하는 성격인 모양이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것. 나는 책을 출판하기 전이나 지금이나 똑 같은 사람인데, 상대방이 나를 보는 눈이 변한 것이다. 내 글을 읽고 내 투덜거림의 근본 원인에 대해 귀기울이게 된 것이라면 책을 내길 참 잘했다.
편의점에 오는 손님 중에 계산할 때 열 번 중에 대여섯 번 쯤 나를 불쾌하게 하는 사람이 있다. 이 손님은 주로 현금 계산을 하는데, 계산이 끝나서 거스름돈을 세고 있으면 그제서야 주머니를 뒤져 동전을 털어서 낸다. 포스기는 전자계산기 기능이 있다. 손님이 낸 현금을 입력하면 자동으로 거스름돈이 찍힌다. 포스기에 찍힌 대로 거스름돈을 내주려고 돈을 세고 있을 때 뒤늦게 몇백 몇십 원을 추가로 내면 계산기 기능에 익숙한 계산원은 멘붕이 온다. 주머니에 있는 잔돈을 털 거면 처음부터 내면 될 일인데, 계산 끝나서 돈을 세고 있을 때 사람 헷갈리게 할 일이 뭐냐고 속으로 투덜거린다.
어느 날 남편과 교대를 하는데 예의 그 손님이 와서 또 그렇게 잔돈 털이를 시도했다. "손님, 계산 끝나기 전에 미리 낼 잔돈을 주세요. 매번 계산 끝난 뒤 이러셔서 정신 없어 하는 거 보셨잖아욧!"
손님이 미안하다며 서둘러 나가자 옆에서 이 장면을 본 남편이 한 마디 한다. 계산하기 힘들면 반품을 하고 다시 입력하면 될 일인데 뭘 화를 내냐고.
"이렇게 얘기해주지 않으면 그게 당연한 줄 알 거 아니야? 저런 계산이 일반적인 건 아니잖아."
말은 당당하게 했지만, 정말 내가 손님에게 심했나 하는 생각에 찜찜했다.
우리집에는 사업하다 망한 시댁 어른이 맡긴 짐이 십 년째 보관되어 있다. 이번에 작은 집으로 이사를 하게 돼서 우리 짐도 줄여야 할 마당이니 더 이상 친척 짐을 맡아줄 수 없게 됐다. 시어른이니 짐을 가져가 달라고 남편에게 전화를 하게 했다. 딱히 가져다 놓을 곳이 없는 줄 알기 때문에 내 입장에서는 미안한 마음이었다.
그런데 전화하자마자 너무나 흔쾌히 버려달라고 했다는 말에 허탈했다. 그럴 걸 십 년 동안이나 쌓아뒀다니! 남편은 편안하게 통화 내용을 전하는데, 수십 박스나 되는 짐을 치워야 하는 나는 불쾌한 마음도 들었다. 그래도 시댁 어른이고, 사정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서 넘어갔다.
그런데 이틀 뒤 남편이 다시 전화를 받았다며 짐 속에 비싼 그릇들이 있으니 그건 버리지 말고 챙겨 가져다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확인해야할 박스만 40여 개가 넘는다.
저녁을 먹다 그 소리를 듣고 나는 폭발해버렸다. 버리는 것도 쉽지 않은데 그중에 좋은 것을 골라서 가져오라니 그게 쉽냐? 그리고 나는 그냥 시키면 그대로 하는 일꾼이냐? 그 동안 짐을 보관해 줘서 고맙다, 바쁜 너한테 또 짐을 치우는 일까지 맡겨서 미안하다, 뭐 이런 인사가 어렵냐?
화를 냈지만 나는 저 짐을 어떻게 분류하나 이미 그림을 그리고 있고, 하는 김에 찾아주는 게 뭐 힘들다고 그러냐는 속편한 소리나 하는 남편은 티비를 보며 낄낄거리고 있다. 이 상황을 지켜본 아들 보기 머쓱해서 내가 화내는 게 이상하냐고 물었더니 대답 없이 내 등을 슬쩍 두드려주고 방으로 들어간다.
어짜피 할 거면서 나는 왜 소득도 없는 화를 냈을까?
십 년 전 중국 한인성당 여름 캠프 때 있었던 일이다. 저녁을 먹으며 교류를 하는 시간이었다. 주일학교 교사 자격으로 참석하다 보니 어쩌다 총회장님 테이블에서 인사를 할 기회가 생겼다. 누군가 나를 주일학교 선생님이라고 소개를 했더니, 총회장님이 "저 자매님 낯이 익다." 며 인사를 받았다.
그 자리에 우리 성당 최고의 애처가인 영사관 영사가 부인과 함께 앉아 있었다. 총회장님과 내가 어디서 만났더라,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데 술 취한 영사가 톡 나섰다.
"어디 노래방에서 만났겠지!"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서 생각을 하려는데 술 취한 영사는 계속 노래방에서 부킹하다가 만났겠지, 어쩌니 떠들었다. 우리 성당 사람들 대부분이 애처가라고 인정하고 본인도 그것을 큰 자랑으로 여기던 사람이었다.
거듭되는 그 사람의 말에 내 얼굴이 구겨지는 것을 본 주변 사람들이 어찌어찌 수습을 하고, 캠프에서 다들 즐거운데 뭐라 해봤자 나만 까칠하단 소리 들을 게 뻔해서 그 자리에서는 넘어갔다. 캠프에서 돌아와서 몇 사람에게 그 얘기를 하며 사과를 받아야겠다고 했더니, 농담한 걸 갖고 뭘 그렇게 까칠하게 구느냐는 소리만 돌아왔다.
"그래요, 내가 까칠하다고 쳐요. 그럼 그 사람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구요. 그 사람이 어디 가나 모시고 산다고 자랑하는 그 마누라한테 누가 그런 식으로 농담하면 그 사람 반응이 어땠을까요?"
"아... 그럼 그 분이 안 참을 것 같은데요."
자기는 못 참는 걸 나한테 했는데, 그걸로 화내는 나한테 까칠하다고 하면 다 똑 같은 사람들 아니냐고 했더니 사람들이 안절부절하는 표정이었다.
드디어, 다음 주 미사 시간. 사과를 받겠다는 마음은 주변 사람들의 꺼려하는 시선을 의식하자 이제 싸울 태세로 바뀌어 있었다. 독한 마음으로 미사가 끝나길 기다렸는데 부임지가 바뀌어서 우리 성당을 떠나게 됐다며 그 가족이 울며불며 인사를 했다. 애처가 영사는 여전히 자기 아내와 딸들 사랑을 과시하고.
미사가 끝나고 성당 마당에서 다들 아쉬워하니 또 거기서 어떻게 따지나. 아름다운 성가정이라고 작별 인사를 하는 무리 밖에서 혼자 이 사태를 어찌하나 고민하다 결국 사과는 커녕 말도 못 꺼내고 돌아섰다.
다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넘어가는 일에 까칠하게 구는 사람이라고 해서 마냥 맘이 편한 것은 아니다. 단골손님인데, 집안 어른인데, 사회적으로 다들 덕망 있다는 사람인데 유독 나만 삐딱하게 구는 건 아닌지. 말하고 나면 후련하기보다 찜찜함이 더 많이 남는다. 참아볼 걸 하는 후회도 크고.
그러나 내가 잔돈은 미리 내달라고 말하지 않고 넘어가면 그 손님은 다른 데 가서도 계산원을 불편하게 할 것이고, 시어른이라고 무례를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면 그걸 보고 자란 내 아들이 결혼 생활에서 시집의 권위는 이런 것이라는 생각이 은연 중에 익숙해질 것이고(이게 제일 무섭네!), 공직 생활자의 말 실수를 참아주면 그래도 되는지 아는 그 혀 때문에 인생 폭망하는 수가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
불쾌함을 말하는 사람을 주변 사람들은 까칠한 사람으로 볼 것이 아니라 충분히 화낼 만 했다고, 화내놓고 찜찜한 마음 가질 것 없다고 한 마디 해주면 좋겠다. 말이 힘들면 등이라도 살짝 두드려주는 것만으로 잘못됐다고 말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닐까? 편안하게 자기 생각을 말하다 보면 쉽게 풀 수 있는 일을 말려서 싸움꾼을 만드는 사람은 싸움의 상대가 아니라 그걸 지켜보는 주변인들인 경우가 많다. 화를 내야할 때는 화내게 하자. 안 되면 투덜거림에 귀기울여주는 척이라도 하자.
나는 불합리한 상황을 만났을 때는 투덜거리기라도 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야 재발이 안 되고 설사 재발이 되더라도 그 정도가 약해진다고 믿는다.
박규옥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하고 십여 년간 학원에서 국어 논술을 가르치다 중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중문학 석사를 거쳐 문예학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한 후 3년여 시간 동안 심혈을 쏟아 중국 기업 조사와 관련된 사업체를 운영하다 돌연 접고 편의점 일을 시작했다. 회사를 운영하며 컴퓨터를 들여다보는 일이 바코드 찍은 일보다 체면치레는 될지 몰라도 적성에 맞는 일이 아니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하던 일을 과감하게 접었다. 이제는 작은 가게에서 시간에 맞춰 몸을 움직이는 단순한 노동을 하며 산다. 지금은 경기도 분당, 오피스텔이 있는 한적한 동네에서 GS25 편의점을 운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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