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은 고통스럽다. 그것은 몸과 마음에 깊은 흔적을 남긴다. 파종을 위해 갈아엎어 놓은 논밭처럼. 우리는 그 흔적을 ‘상처’라 일컫는다. 그것은 “등이 휠 것 같은 삶의 무게”가 한바탕 짓이기고 지나간 상흔(傷痕)이다. 생각해 보면, 아니 생각하지 않아도, 인생 전체가 고통이다.
“돌이켜 보면 땅 위에 상처 아닌 것이 어디에 있는가. 어쩌면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이 광막한 우주의 상처가 아닌가!”(이수태, 「나의 초라한 반자본주의」, ‘상처는 세상을 내다보는 창이다’ 중에서)
그리스도의 상처 또는 고통에 대한 이야기, 그 ‘수난’(passio) 이야기는 복음서의 고갱이이고 본론이다. 그런데 ‘고난을 당하다’는 뜻으로 번역하는 그리스어 동사 pascho(πάσχω)나 라틴어 patior는 본디 고통만이 아니라 모든 경험을 대상으로 하는 ‘겪음’을 뜻한다.
이는 고통이 근원적으로는 삶의 전 영역을 망라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개인과 사회의 고통스러운 사건들, 그리고 그것이 몸과 마음에 남긴 흔적만 이 고통의 영역이 아니란 이야기다. 무언가를 이해하고 인식한다는 행위 자체가, 나아가 인간의 모든 경험과 삶이 모종의 ‘고통’을 전제로 한다.
은산철벽 또는 바닥
오래전, 심사숙고 끝에 어떤 선택을 한 적이 있다. 길고 쉽지 않았던 식별의 결론이었다. 그 선택의 결과 치른 대가는 가볍지 않았다. 이후 상처가 덧나 마음이 무겁고 어두워질 때마다 하느님께 여쭈었다. “주님과 함께했던(또는 그랬다고 믿었던!) 그 선택의 의미는 무엇이었습니까?” 아무런 답이 없으셨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끝내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래서 지금 비로소 알아듣는 것이 있다.
고통스레 찾았지만 “답이 없는” 상황이 계속된 것 그 자체가 답이었다. 나에게 계속 질문하게 했기 때문이다. 질문하던 나는 어느덧 질문받는 내가 되어 있었다.
어떤 질문은 답이 없다. 그래야 맞다. 왜냐하면, 그런 부류의 질문은 답을 얻는 게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질문이 겨냥하는 것은 “답이 없는” 상황의 고통이요, 막막함 그 자체다. 간화선(看話禪)의 수많은 화두가 그런 ‘은산철벽’(銀山鐵壁)으로 사람을 내몬다지 않던가.
물론 고통이 최종 목적은 아니다. ‘그라운드 제로’ 상황에 내몰렸을 때만 비로소 벌어지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벌어진다’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너무 흔하고 값싸게 소비되는 ‘은총’이란 말보다 낫게 느껴져서다. 사방팔방이 다 막힌 듯 무력하고 답답한 그 자리에서만 인간의 모든 노력과 시도가 하느님과 관련해서는 얼마나 쓸모없는지 체험한다. 실로 제가 얼마나 아무것도 아닌지, 아니 없는지(1코린 1,28 참조) 알아차린다. “두 손 두 발 다 드는” 자리가 여기다. 그래서 비로소 정녕 다 내맡길 수밖에 없는 자리도 여기다. 사람은 여기서만 비로소 말(생각)하기보다 듣고, 하기(doing)보다 그저 있게(being) 된다. 또는 ‘겪게’ 된다.
복자 뤼스브룩(Jan van Ruusbroec, 1293-1381년)은 <계곡>이란 제목으로 쓴 단상에서, 이 자리를 일러 “제가 얼마나 아무것도 아닌지를 알아듣는 또는 제게 어떤 진보나 보존의 가능성도 남아 있지 않은 가난의 심연”이라고 표현한다.
‘계곡’ 또는 ‘근저’(바닥)라고도 표현한다. 이 자리에 머물 때 “하느님께서 그의 마음을 건드리시지 않는 일은 불가능하다. 이 바닥에서만 그는 비로소 하느님의 뜻에 자기를 내맡긴다.”
복음적 영성의 전통에 따라, 에누리 없이 겪는 허약함과 비참(humiliatio)이야말로 참된 겸손(humilitas)이라고 보는 그는 단상을 이렇게 마무리한다. “겸손의 나락으로 침몰하는 것, 그것은 하느님 안으로 침몰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심연의 근저이시기 때문이다. 겸손은, 너무 어려워 가르칠 수 없는 것을 얻어다 준다. 그것은 사람의 말이 도달하지 못하는 곳에 데려다준다.”
모든 고통은 바로 이 ‘계곡’으로 이끈다. 모든 상처는 바로 그 ‘근저’, 인간 비참의 바닥이지만 동시에 신비롭게도 하느님의 바닥인 이곳으로 이끄는 이정표다. 여기서는 “안 괜찮아도 다 괜찮다.” 그래서 진정한 감사도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짧게 말했지만 이게 몇 년 전부터 내가 알아듣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의외로!) 바로 여기서 선불교나 힌두의 비이원론을 비롯한 동양의 영적 무언가를 이해하고 인식한다는 행위 자체가, 나아가 인간의 모든 경험과 삶이 모종의 ‘고통’을 전제로 한다.
전통과 복음의 핵심이 만난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기쁨은 덤이다.
아직 칠 수 있는 종을 쳐라, 금이 갔더라도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 성인은 ‘바위’를 ‘그리스도’로 해석하던 성경(1코린 10,4 참조)과 교부 전통을 이어받아 아가서의 “바위틈”을(“바위틈에 있는 나의 비둘기”, 2,14) 그리스도의 상처로 해석한다.
이 상처는 “참새도 집을 마련하고 제비도 제 둥지”를 트는 바로 그곳(시편 84,4). 처절하리만치 뚜렷한 상처(허약함과 한계와 죄)로 아픈 영혼이 피신하여 쉴 수 있는 곳이다.
“그리스도의 이 열린 틈(상처)을 통해 나는 바위에서 꿀을 빨고 단단한 돌에서 기름을 얻습니다.” 그리고 놀라우리만치 대담한 고백이 이어진다. “내 공로는 주님의 자비입니다”(Meum meritum, miseratio Domini, 「아가 설교」, 61).
영적으로나 인간적으로 뚜렷한 성과는커녕 허물만 가득한 인생이어도 지금 당장 죽어 안 될 이유가 딱히 없다고 느끼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더 훌륭해질, 심지어 더 거룩해질 필요도 없다고 느끼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오직 감사할 따름이다.
우리의 봉헌과 투신은 언젠가는 가능할지도 모를 흠 없고 거룩한 모습으로 하는 게 아니다. 상처투성이 지금 이대로의 금 간 몸으로 하는 일이다. 음유시인 레너드 코헨(Leonard Cohen)이 그리 노래한 적이 있다. “아직 울릴 수 있는 종을 울려라. 완전한 봉헌 따위는 잊어버려라. 모든 것에는 틈(또는 금)이 있다. 빛은 그리로 들어온다”(‘송가’[Anthem] 중에서).
앞서 인용한 이수태 선생의 문장은 이렇게 이어진다. “우리는 우리가 ‘보는’ 만큼의 상처를 가질 뿐이며 그런 방식으로 가지는 상처의 크기만큼 지혜와 인간적 연대를 확보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다. 온 세상은 그리스도라는 바위의 틈이며 그 아픈 상처다. 상처에 대한 우리 묵상은 이렇게 ‘연민’이란 주제에 가닿는다. 내 상처와 화해하고서야 남과 세상의 상처를 비로소 헤아리고 어루만질 줄 알게 된다.
* 이 글은 <경향잡지> 2022년 4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이연학 신부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수도자.
수도원 창설 소임을 받고 미얀마 삔우륀에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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