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6년 3월 19일, 피터 클레버는 카르타헤나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 그는 도시에서 수품 된 첫 번째 예수회 사제였다. 그는 그의 일생을 바친 일, 즉 아프리카 노예들을 섬기는 일에 즉각 착수하였다.
첫 번째로 그는 노예들에 대한 사목으로 알려진 동료 예수회 회원인 알폰소 데 산도발 신부(문지기 알폰수스와 혼동하지 않기)와 만났다. 피터가 카르타헤나에 도착했을 때, 알폰소는 이미 그곳에서 40년 동안 사목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는 피터를 자기 휘하에 두고 많은 것들을 가르쳤다. 예를 들면, 알폰소는 피터가 아프리카 관습과 언어를 배우는 것이 얼마나 귀중한 일인지 알려주었다. 노예들이 알아듣는 말과 상징들을 사용한다면, 금방 그들의 신뢰를 얻을 것이었다.
알폰소 신부와 일하면서 피터는 노예들에 대한 사명을 더 굳혔다. 열악해지는 노예들의 상황과 그들의 존엄성이 훼손당하는 방식들을 목격하면서 피터는 노예들을 위하여 전 생애를 바치고 싶었다. 그는 자기의 정체성을 “피터 클레버, 아프리카인들의 노예”라고 말하기 시작했다(그는 후에 “종들 중의 종”으로 더 알려지게 되었다).
알폰소와 피터는 같은 사람들을 다른 방식으로 섬겼다. 알폰소는 보통 노예들을 그들이 일하고 있는 탄광이나 농원으로 방문하였다. 그러나 피터는 노예선이 도착하자마자 그들을 만나기로 했다. 그는 노예들이 신세계를 처음 접했을 때 연민과 존엄성을 느끼기를 원했다.
매달 노예선이 바다 멀리 나타날 때마다, 피터는 작은 배를 타고 그들을 마중 나갔다. 그는 노예선에 올라타서 그들을 갑판에서 만났다. 그런 후 불결하고 악취가 나는 선창으로 서둘러 내려갔다. 배의 바닥은 진흙과 배설물로 가득했고, 그 속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껏 빈약해도 요깃거리를 제공하였다.
노예들은 서로 가까이 쇠사슬에 묶여 있어서 그가 그들 사이로 돌아다니는 것이 어려웠다. 그렇지만 노예들한테로 가면서 피터는 웃음을 지었고 사람들에게 인사했으며, 과일, 비스킷, 사탕과 담배를 돌렸다. 이런 행동이 얼마나 큰 파장을 일으켰는지 우리는 짐작해 볼 수 있다. 대부분의 노예들은 병들었고 공포에 질렸으며 수개월동안 다정한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들은 그런 관대한 대접을 거의 받아본 적이 없었던 사람들이었다.
피터의 이러한 친절함은 그렇지 않으면 지옥 같은 곳에서 신선한 공기를 호흡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노예들은 그가 억압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노예들의 옹호자요 친구였다. 그는 그들 역시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똑같이 존경을 받을 만한 사람들이라고 믿었다.
성 피터 클레버의 편지에서 발췌
“어제, 1627년 5월 30일, 거룩한 삼위일체 대축일날, 수많은 흑인들이 아프리카의 해안에서 끌려와 큰 배에서 상륙했다. 두 광주리의 오렌지와 레몬, 달콤한 비스킷만 가지고 우리는 그들에게 서둘러 달려갔다… 아픈 사람들에게 갈 때까지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을 밀치고 길을 만들어야 했다. 많은 아픈 사람들이 젖은 땅위에 아니 진흙 웅덩이 속에 누워 있었다… 그들은 벗은 채였고, 그들을 보호할 아무런 헝겊조차 없었다…
“그래서, 우리가 입은 망토로 그들을 덮었다… 그들이 우리를 보았을 때 눈에서 기쁨을 볼 수 있었다.
“우리는 말이 아니라 우리의 손과 행동으로 그들에게 말했다. 그리고 실상, 그들이 이곳에 온 것은 먹히기 위해서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차에, 다른 말은 지극히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이 증명되고 있었다. 우리는 앉았다, 아니 무릎을 꿇고 그들 옆에서 그들의 얼굴과 몸을 포도주로 씻겼다. 우리는 우정 어린 몸짓으로 그들을 격려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다했다. 그들의 면전에서 어떻든 자연스럽게 아픈 이들의 원기를 북돋는 감정을 표현하였다.”
<출처> [성인들과 사회정의>, 브랜든 보트
<번역문 출처> [참사람되어] 2017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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