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속에 숨겨진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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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속에 숨겨진 소리
  • 이원영
  • 승인 2022.03.14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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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영 칼럼

사순절이 오면 극장가에서는 어김없이 그리스도교 영화가 상영된다. 몇해 전 <사일런스>(silence)가 개봉되었다. 이 영화는 엔도 슈샤쿠의 소설 <침묵>에 바탕을 두고 있다. 1966년에 발표된 <침묵>으로 엔도 슈샤쿠는 다니자키 준이치로상을 수상했다. 1996년 타계하기 전까지 그는 여러 차례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랐으며, 종교소설과 통속소설의 차이를 무너뜨린 20세기 문학의 거장이자 일본의 국민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소설 ‘침묵’은 그리스도교가 혹독한 탄압을 받던 17세기 일본, 배교한 스승 페레이라 신부에 대한 진상조사를 위해 일본을 찾은 포르투갈 예수회 사제 로드리고가 바티칸으로 보내는 서신 형식으로 종교 간의 대화, 문화의 교류와 토착화, 문화적 다원주의, 그리고 인간과 신의 관계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주는 걸작이다.

​그렇다면 일본에서 그리스도교가 박해를 받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1549년 포르투갈 신부인 자비에르가 선교목적으로 일본에 입국하였으며, 당시 권력자였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비호를 받으며 교세를 넓혀 갔고 일부 영주들은 유럽과의 교역이나 선진 과학기술 도입을 위해 스스로 신자가 되기도 하였는데, 1605년 일본의 가톨릭 신자는 75만 명 정도 되었다고 한다.

​뒤를 이은 토요토미 히데요시 역시 초기에는 가톨릭에 호의적이었다. 그런데, 16세기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전국시대가 끝이 나고 통일정권이 수립되자 막부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탄압을 시작한다. 전국시대의 정치화된 불교세력의 위력을 경험하였던 막부로서는 그리스도교의 비약적인 성장과 세력화, 그리스도교를 앞세운 서양세력의 침략 등을 우려하였기 때문이었다. 1587년 하코자키(箱崎, 후쿠오카시)에서 가톨릭 사제를 추방하였고, 1612년과 1613년 그리스도교 금교 조치와 대대적인 신자들의 탄압을 개시하였다.

​이런 와중에 그리스도교 박해의 결정적 사건이 발생한다. 1637년 10월 25일, 큐슈 북서부의 시마하라(島原)와 아마쿠사(天草)에서 일본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민란이 일어난다. 시마하라의 번주(藩主) 마츠쿠라 카츠이에(松倉勝家:1597-1638)와 아마쿠사의 성주 테라자와 타다타카(寺沢堅高:1609-1647)의 무자비한 세금징수와 그리스도교 박해에 항거하여 일어난 민중봉기였다.

​원래 이 지역은 전국(戰國)시대부터 대명(大名)인 아리마 하루노부(有馬晴信)가 그리스도교에 귀의할 정도로 그리스도교가 뿌리 깊게 정착해 있었던 곳이었다. 막부의 그리스도교 탄압정책은 신자들이 많았던 시마하라나 아마쿠사와 같은 지역민들에게는 당연히 불만일 수밖에 없었고, 에도(江戸)시대로 접어들면서 새롭게 이들 지역에 부임한 번주들의 폭정에, 흉작으로 인한 기근 등이 더해지면서 민중봉기로 이어지게 된 것이었다.

​막부의 토벌로 민란군 3만7000여 명 전원이 학살당했다. 농민군이라고 하지만 3분의 2가 노인·어린이·여자였다. 무자비한 칼날에 죽어간 이들에게 가톨릭 사제가 전해준 예수는 무엇이었을까? 강제노동과 조세압박으로 짐승처럼 살아가던 사람에게 자신들과 같은 모습으로 다가오신 성자 하느님은 얼마나 따뜻했을까? 너희 삶의 고통은 윤회에 얽힌 죄의 사슬 때문이 아니라는 구원의 말씀에 그들은 얼마나 자유와 평안을 맛보았을까?

 

​일본 그리스도교 역사는 초기 그리스도교, 그리고 한국 그리스도교 역사와 궤적을 같이 하는데 유대종교에서 죄인이라 멸시받고, 신분제도 아래에서 짐승처럼 취급당하던 이들을 주님의 식탁(성찬)으로 초대하여 한 인간으로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뿌리내리는 곳마다 생물학적 성별, 사회적 신분, 재산의 유무, 신체적 장애를 구별하지 않고 창조주의 형상으로 한 인간을 보도록 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서구유럽과 같이 그리스도교의 복음이 뿌리내린 곳마다 인간이 살면서 보장 받아야 할 성평등, 차별금지, 평생교육, 보편적 의료보건과 복지, 기본소득과 같은 사회적 문제를 제기하고 개선되는 것이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 사건은 고난받는 이들의 눈물을 닦아줄 뿐 아니라 삶의 자리를 실재적으로 변화시키는 전인적 복음이다.

​강생하신 성자 하느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사순절이다. 오늘 한국사회에서 예수님이 함께하시는 사람, 임재하시는 장소는 어디일까? 한국교회는 하느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한 12,43)

 

이원영 
노동이 기도요 기도가 노동인 삶을 추구하는
포천 사는 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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