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길
-정호승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그들이 아침을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예수님께서 다시 두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므로 슬퍼하며 대답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어,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인지 가리키신 것이다. 이렇게 이르신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
베드로가 돌아서서 보니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따라오고 있었다. 그 제자는 만찬 때에 예수님 가슴에 기대어 앉아 있다가, “주님, 주님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던 사람이다. 그 제자를 본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형제들 사이에 이 제자가 죽지 않으리라는 말이 퍼져 나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가 죽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고 말씀하신 것이다. (요한 21,15-23)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가 싸웠던 30년 전쟁 당시 ‘칭글리’라는 한 스위스 프로테스탄트 신자가 독일 레히 강변의 자유도시인 아우크스부르크에 가죽상점이 딸린 큰 피혁공장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는 그곳 여자와 결혼하여 자식 하나를 두고 있었다. 어느날 가톨릭을 지지하던 황제의 군대가 이 도시에 몰려왔다. 그는 피할 틈이 없어서 염료를 보관하는 마당 안의 굴속에 몸을 숨겼다. 아내는 아이를 데리고 교외의 친척한테 가기로 되어 있었으나 소지품과 옷, 장신구, 침구 따위를 챙기느라 너무 시간을 지체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황제의 병사들이 들이닥치는 왁자지껄한 소리를 듣고는 놀라서 모든 걸 팽개치고 뒷문으로 달아났다.
집에는 아이만 덩그마니 남겨지게 되었다. 그 아이는 거실에 있는 요람에 누워 천장에 매달린 공을 가지고 놀고 있었고, 부엌에서 허드렛일을 보던 어린 하녀만이 그 아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병사들은 맞은편 집 이층에서 온갖 약탈물을 골목길로 내던지고 있었으며, 이 집마저도 술 취한 병사들로 가득찼다. 그들은 이 집이 프로테스탄트 교회 신자의 집이라는 걸 알고 있있기에 닥치는대로 물건을 부수었다. 기적처럼 안나라는 하녀는 들키지 않았다. 그리고 아이도 무사했다. 그러나 주인은 끔찍한 모습으로 죽어 있었다. 숨어 있던 굴에서 병사들에게 발각된 것이다.
하녀는 무거운 마음으로 아이에게 우유를 먹여 요람에 재우고, 시집간 언니가 있는 지방으로 떠났다. 그리고 그 밤으로 형부와 함께 승리에 도취한 병사들 틈바구니를 뚫고 아이의 어머니인 칭글리 부인을 찾아 나섰다. 그들은 커다란 저택의 대문을 두드렸는데, 한참 후에야 문이 빠끔히 열렸다. 부인의 아저씨뻘 되는 키 작은 노인이 머리를 내밀었다. 하녀 안나는 숨가쁘게, 칭글리씨는 죽었으며, 아이는 그 집에 무사히 있다고 알려주었다. 그러나 노인은 자기 질녀는 이 집에 없노라고 잡아떼고 문을 닫아버렸다. 돌아오면서 보니 커튼 사이로 칭글리 부인이 내다보고 있었다. 그 여자는 자기 자식을 부인하는 게 전혀 부끄럽지 않은 모양이라고 안나는 생각했다.
아이를 위해 치른 마음에 없는 결혼
안나는 다시 그 피혁공장 사택으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혼자 있을 아이가 너무 안쓰러웠던 것이다. 쌔근쌔근 숨을 쉬고 앙증스럽게 손을 빠는 아기를 버려둘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안나는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안고 집으로 왔다. 그리고 언니와 형부와 의논한 끝에 시골에 사는 오빠에게로 가서 몸을 맡기기로 작정했다. 거기서 안나는 함께 농사일을 하면서 남들이 쉴 때면 들판에서 집까지 뛰어가 틈틈이 아기를 돌보았다.
그 꼬마는 무럭무럭 자랐고 포동포동 살이 쪘다. 그리고 안나를 볼 때마다 까르르 웃기도 했고 머리를 치켜들려고 용을 썼다. 이윽고 겨울이 되자, 한가해진 주변 사람들은 안나의 남편 소식을 묻기 시작했다. 그 동안 한번도 아이 아버지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칫하면 구설수에 오를지도 몰랐다. 그래서 고민고민하다가 중병이 들어 오늘내일하는 어느 소작농에게 돈을 집어주고 남몰래 결혼식을 올렸다. 교회종도 악대도 들러리 처녀도 축하객도 없는 기묘한 결혼식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그 남자가 죽었다는 소식은 오지 않았다. 그가 죽게 되면 이웃에게 아이 아버지 이야기를 해명하기 쉬울 터였다.
할 수 없이 오빠가 그 소작농의 오두막에 찾아가니, 저승 문턱에 가 있던 그 남자는 셔츠 바람으로 저녁을 먹고 있었다. 건강이 완전히 회복되었던 것이다. 얼마 후 그 소작인은 안나가 몸붙여 살던 오빠 집으로 찾아와서는 식사 후에 집 뒤꼍에서 장작을 패주곤 돌아갔다. 그후로 안나는 병이 나 몇 주 동안 누워 지냈다. 마음이 황망했던 것이다. 결국 안나는 그 남자와 살기로 했다.
손바닥만한 밭뙈기를 일구며 소꿉장난 같은 살림을 꾸려가기 시작했다. 다행히 남편은 별로 까다롭게 굴지 않았다. 오빠도 가끔씩 이것저것 가져다 주었다. 안나는 그런대로 행복했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가 당밀을 가져오려고 마을에 갔다가 돌아와 보니 아이가 없었다. 남편은 잘 차려 입은 부인이 마차를 타고 와서 그 아이를 데리고 갔다고 전했다. 안나는 너무 놀라 쓰러졌고, 그날 저녁으로 먹을 것만 한 보퉁이 싸들고는 아우크스부르크로 떠났다.
라틴 촌뜨기의 재판
안나는 우선 피혁공장으로 갔다. 그러나 아무도 안나를 만나주지 않았다. 그녀는 관청에 뛰어가 누군가 자기 아이를 훔쳐갔다고 소리쳤다. 그녀는 심지어 프로테스탄트 신자가 자기 아이를 훔쳐갔다고 떠들기도 했다. 그러나 세상은 변해 있었다. 두 종파는 강화조약을 맺고 분쟁을 끝낸 뒤였다. 그래도 그녀는 아이를 찾기 위해 칭글리 부인을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
재판관은 이그나츠 돌링거라는 사람이었는데, 바이에른의 선제후(選帝侯)는 그를 ‘라틴 촌뜨기’라고 불렀다. 그러나 하층민들은 민요를 부르면서 그를 칭송하였다. 땅딸막하고 엄청나게 살이 찐 그 노인은 아무 장식도 없는 방에 앉아 있었다. 그는 안나에게 “네가 그 피혁공장을 가로챌 수 있다고는 생각지 말아라.” 하고 협박을 했다. 그러나 안나는 완강하게 내 관심사는 아이뿐이라고 답변했다. 재판관은 조금 누그러진 심경으로 뇌까렸다. “너도 그 꼬마 녀석을 원하고 비단치마를 다섯 벌씩이나 가진 그 계집도 그 꼬마를 원한단 말씀이야. 그렇지만 문제는 그 꼬마에겐 진짜 엄마가 필요하다는 거지.”
재판은 토요일에 열기로 했다. 당일날에 시청 앞 광장에는 한 꼬마를 둘러싼 재판을 보려고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사람들은 모이기만 하면 누가 진짜 엄마고 가짜 엄마인지 저마다 논쟁이 붙었다. 또한 재판을 맡은 늙은 돌링거 영감은 신랄한 말투로 격언을 써가며 재미있게 재판을 하였기에 더욱 구경거리가 될 만했다.
돌링거 재판관은 큰 문 앞에 통통한 찐빵처럼 앉아 있었다. 재판정과 방청석은 새끼줄로 나누어 놓고 있었다. 그러나 재판관은 책상도 없이 평평한 땅바닥에 앉아 있었고, 맨 앞에는 안나와 칭글리 부인, 아이를 안고 있는 유모가 서 있었다. 재판관은 먼저 칭글리 부인을 불렀다. 그녀는 옷자락을 땅에 끌면서 앞으로 나오더니 때때로 손수건을 눈에 갖다대며, 약탈이 벌어졌을 때 황제의 병사들이 어떻게 아이를 빼앗아 갔는지 설명했다. 바로 그날 밤 그 하녀가 아저씨 댁으로 와서 그 아이가 아직도 그 집에 있다고 얘기했는데, 그건 아마 몇 푼의 수고비를 기대하고 그런 것 같았다고 말했다. 그후 피혁공장에 찾아가 보았으나 아이는 없었다고 했다.
그러자 재판관은 그녀가 습격을 받았을 때 정신이 없어서 아이를 위험 속에 버려두고 도망간 것이 아닌지 캐물었다. 칭글리 부인은 어이가 없다는 듯 푸른 눈을 들어 그를 빤히 쳐다보고는 불쾌한 어조로, 어떻게 그런 일이 있느냐고 강변했다. 남편이 죽었기 때문에 만일 아이를 빼앗긴다면 칭글리의 유산인 피혁공장이 삼촌들 손에 넘어가게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그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이를 찾아야 했다.
돌링거 재판관은 헛기침을 한 뒤 재미있다는 듯이, 어떤 어머니라도 자기 자식을 위험 속에 내버릴 수는 없지 않느냐고 물었다. 칭글리 부인도 움찔하면서 “그렇다.”라고 말했다. 재판관은 만약 그런 짓을 한 어머니가 있다면 아무리 많은 치마를 입고 있다고 해도, 그 여자의 볼기를 쳐야 마땅하지 않느냐고 물었으나, 부인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단 한 번 잡아당겨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나서 돌링거 재판관은 이렇게 말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있소. 그리고 진짜 어머니라면 제 자식을 위해 도둑질도 마다하지 않는 법이지. 그러나 그건 법으로 엄금하고 있소. 왜냐하면 소유권은 인정해야 하니까. 그리고 도둑질을 하는 사람은 거짓말도 하게 되는데 거짓말도 역시 법으로 금지돼 있소.” 이런 말을 하고 나서 그는 가슴에 철판을 깔고 뻔뻔스럽게 법정을 속여먹는 인간들의 교활함에 대해서 능숙하고 사정없이 한바탕 꾸지람을 퍼부었다. 그리고 죄없는 암소의 젖에다 물을 섞는 농부들과 농부들한테서 너무 많은 소작료를 받아먹는 지주와 시 당국자에 대해서도 욕을 퍼부은 다음, 증인들의 증언은 끝났으나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고 밝혔다.
이윽고 재판관은 한숨을 쉬면서 말을 이었다. “누가 진짜 어머니인지 확인되지 않았으니 아이만 불쌍하지요. 동시에 두 어머니가 나타났단 말씀이오. 본 법정은 두 사람에게 말할 시간을 충분히 주었지만, 다같이 새빨간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 확실하오. 그러나 이젠 아이 생각을 해야겠지. 이 애에게는 진짜 어머니가 필요하니까.” 그러고 나서 법정관리에게 화난 목소리로 백묵을 가져오라고 하더니 땅바닥에 세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크기로 원을 그리라고 했다. 그러고 그 원 안에 먼저 아이를 세워놓고 말했다. “이제 내가 하려는 시험은 옛날 책에서 본 것이요. 그리고 그건 정말 훌륭한 방법이지. 이것은 누가 진짜 이 아이의 어머니인지를 알아보려는 것이오.” 그러고는 칭글리 부인과 안나를 향하여 말을 계속했다. “당신들은 원 안에 들어가서 그 아이의 팔을 하나씩 잡으시오. 둘 가운데 더 강력한 사랑을 가진 사람이 더 세게 잡아당길 것이고, 그래서 그 아이를 자기 쪽으로 끌어가게 될 것이오.”
두 여자가 원 안에 들어가서 아이의 손을 잡자 사방이 조용해졌다. 울고 있던 아이 역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고 얌전해졌다. 그 아이는 눈물에 젖은 얼굴로 안나를 보고 있었다. 이윽고 재판관이 ‘시작’하고 신호를 보냈다. 단 한 번 힘껏 잡아당김으로써 칭글리 부인은 그 아이를 원 밖으로 잡아채 갈 수 있었다.
안나는 어쩔 줄 모르고 믿겨지지 않는다는 듯이 그 아이 쪽을 쳐다보았다. 아이의 두 팔을 양쪽에서 잡아당기게 되면 아이가 다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에 아이의 손을 놓아버렸던 것이다.
늙은 돌링거가 일어섰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누가 진짜 어머니인가 알게 되었네그려.” 하고 큰소리로 말했다. “저 못된 여자한테서 그 아이를 뺏어와라. 저 여자는 그 애를 잔인하게 두 조각으로 찢어버릴 거야.” 그는 안나에게 고개를 끄덕이곤 재빨리 재판정에서 퇴장했다.(브레히트, ‘아우크스부르크의 원’, <상어가 사람이라면>, 한마당, 1986 참조).
내 어린 양을 잘 돌보아라
돌링거 재판관은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사랑이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사랑하는 사람을 포기할 정도로 사랑하는 것이다. 제 목숨보다 소중한 사랑, 그런 사랑이 요한복음서의 시작이자 맺음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지막 순간에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세 번씩이나 거듭 물으셨다.(21,15.16,17). 베드로는 세 번 모두 “예.”라고 답할 수 있었기에 나중까지 사랑받는 제자가 되었고, 사도 가운데 으뜸이 될 만했다.
더구나 베드로는 사랑의 사람이면서 동시에 슬픔의 사람이기도 했다. 제 사랑이 이해받지 못한다고 여겨질 때, 우리의 마음은 슬퍼진다(21,17 참조). 그리고 사랑 때문에 슬퍼하는 사람은 그 연민이 자라날 때 세상과 인간을 구원 할 힘을 얻는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베드로에게 유언처럼 한마디 남기신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바란다고 한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21,22) 이 말에 대해서 요한복음서 작가가 해설까지 곁들이는 것을 보면 이 말 뜻의 중대함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21,23 참조).
베드로는 사랑을 위해 헌신한 사람들의 장래에 대해서 묻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되겠습니까?”(21,21) 예수님의 답변은 “그저 나를 따라서 살라.”는 것이었다. 장래에 대해서는 우리가 관여할 바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로지 하느님만이 아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장차 주님의 오른편 또는 왼편에 누가 앉게 될 것인가를 두고 옥신각신하다가 예수님께 꾸중을 들었던 제자들을 떠올릴 수 있다. 그때에도 예수님은 “으뜸이 되고자 하면 종처럼 남을 섬기라.”고만 하셨다. 그러므로 참된 그리스도인의 길은 ‘희망 없이도 사랑하는 것’이다. 뭔가 바라지 말고 그저 사랑 때문에 사랑하라는 것이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종이신문 <가톨릭일꾼>(무료) 정기구독 신청하기
http://www.catholicworker.kr/com/kd.htm
도로시데이영성센터-가톨릭일꾼 후원하기
https://v3.ngocms.co.kr/system/member_signup/join_option_select_03.html?id=hva820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