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네스토 카르데날, 니카라과 민중의 서정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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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네스토 카르데날, 니카라과 민중의 서정시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2.01.14 21: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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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의 요한복음 묵상 [지상에 몸푼 말씀]-41

소외

-고정희 


최후의 통첩처럼
은사시나무 숲에 천둥번개 꽂히니
천리 만리 비로
쏟아지는 너
나는 외로움의 우산을 
받쳐 들었다. 

그들이 뭍에 내려서 보니, 숯불이 있고 그 위에 물고기가 놓여 있고 빵도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방금 잡은 고기를 몇 마리 가져오너라.”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배에 올라 그물을 뭍으로 끌어 올렸다. 그 안에는 큰 고기가 백쉰세 마리나 가득 들어 있었다. 고기가 그토록 많은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 가운데에는 “누구십니까?” 하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요한 21,9-14)

“파수꾼아, 얼마나 있으면 밤이 새겠느냐?” 니카라과의 시인이며 신부였던 에르네스토 카르데날은 ‘0시(零時)’ 라는 시의 첫머리에서 그렇게 묻고 있다. 경찰이 시민에게 발포하며 낮에는 정보원들이 활개치고 밤에는 체포가 이뤄지는 곳, 버스 칸에서 하는 농담이 국가원수 모독죄가 되는 곳, “나는 가끔 담배 한 대 피우면서 한 사내의 처형을 결심하곤 했다.”고 중얼거리는 대통령이 있으며, 다국가적 기업의 횡포가 난무하는 중앙 아메리카의 ‘밤’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 역시 오랫동안 그런 시절을 경험했다. 군사정권 아래서 시인 양성우는 이를 두고 ‘겨울 공화국’이라고 불렀다.

 

니카라과의 서정시

카르데날은 1925년 그라나다에서 태어났다. 레온과 마나과에서 학교를 다녔던 옛 스페인 상류층이었다. 그는 학창시절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그에게는 강과 나무, 꽃, 소녀들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 사회에 깊은 그늘을 드리우던 빈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의 부모는 그에게 외국유학을 주선해 주었고 멕시코에서, 또 뉴욕의 콜롬비아 대학에서 공부하였다. 그는 ‘니카라과의 서정시에 나타난 열망과 언어’란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니카라과에 다시 돌아와서야 참혹한 현실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가 여덟 살 되던 해(1933)에 아나타시오 소모사 장군은 미국의 막대한 지원을 받으며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에 저항하던 아우구스토 산디노는 1934년 소모사에 의해 살해당했다. 그 당시 니카라과의 상황을 카르데날은 이렇게 노래했다.

“우리는 밤중에 총성을 듣는다. 우리는 공동묘지에서 들려오는 총성을 듣는다. 누가 죽임을 당했는지 아무도 모른다. 아무도 뭔가를 모르고 있다. 우리는 밤중에 총성을 듣는다. 이것이 모두다.”

이런 저항시를 쓰던 카르데날은 국가 근위대에 의해 체포되어 고문을 당했으나, 혁명단체에 가담하지 않았던 탓에 곧 풀려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카르데날은 얼마 가지 않아 붓만 가지고 투쟁하는데 한계를 느끼고, 소모사 암살 계획에 가담했다. 그러나 국가 근위대의 습격으로 거사는 실패했다. 이 사건으로 카르데날의 수많은 친구들이 체포당하고 무자비하게 처형되었다. 그는 지하로 잠적해서 미국으로 도망쳤다.

훗날 카르데날은 그날을 기억하며 “4월에 사람들은 죽임을 당했네. 나는 그들과 함께했던 4월의 봉기에서 소총 사용법을 배웠지. 아돌포 바에즈 보네는 내 친구였다네. 그는 비행기 · 트럭 · 탐조등 · 수류탄 · 라디오 · 군견 · 근위대에 쫓겼지. 나는 대통령 관저 위에 피묻은 탈지면 조각 같은 붉은 구름과 붉은 달을 기억하고 있네.”라고 썼다. 카르데날은 인간이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사회질서를 열망했을 뿐이었다. 여전히 소모사 일가는 니카라과 전체 경작지의 4분의 1 이상을 소유했다. 국립항공사 라니카, 호텔 니카라과 S.A., 일간지 노베다데스, 니카라과 텔레비전 방송국, 그리고 숱한 공장을 소유했다.

 

흰눈을 보기 위해 나는 불을 껐다

4월 거사의 실패로 카르데날은 중요한 깨달음을 얻었다. 사회조건의 단순한 변화만으로는 인간을 결정적으로 새롭게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정치적인 길을 걸을 때와 똑같은 철처함으로 내면의 길을 걷게 된다.

“나는 전적으로 하느님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영감을 받았다. 마치 사람이 가정을 위해서 일하듯이 나는 명상에로 가는 소명을 느꼈다. 나는 정치와 문학으로부터 후퇴 하려고 했다.”

카르데날은 유명한 시인이며 명상가였던 토머스 머튼을 찾아갔다. 그곳은 미국 켄터키주의 트라피스트 수도원이었다. 1957년 수련이 허락되고, 카르데날은 봉쇄수도원에서 ‘침묵’에 대한 놀라운 체험에 빠져들었다. 그는 진흙으로 무언가 만드는 일을 하지 않을 때는 항상 묵상에 잠겼다.

“흰눈을 보기 위해 나는 불을 껐다. 창문을 통해 흰눈과 새와 달을 보았다. 그렇지만 나는 눈과 달이 또 다른 창문이란 것을 알았다. 이 창문을 통해 님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신비적 관상은 놀라운 것이었다.

“하느님,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 이제는 내 존재의 유일한 근거요, 나의 유일한 직업이요, 나의 유일한 활동입니다. 이전에 내가 소녀들의 아름다움에 쏟았던 열정으로 당신께 나를 봉헌했습니다. 나에게 남아 있는 것이란 사하라 사막의 말라버린 우물 같은 갈증, 거의 우주적인 사랑에 대한 굶주림, 사라지지 않는 열망, 빈 마음뿐입니다. 이 모든 나의 열정은 죽어버렸고 남은 것은 당신, 이제 모든 사랑을 가지고 사랑하는 당신께 대한 사랑뿐입니다.”

그러나 토머스 머튼은 내적 갱신과 외적 갱신이 만나는 길로 가라고 충고해 주었다. 신비적으로 사는 것은 단순히 자기 자신을 외부 세계에서 떼어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 길을 찾아 카르데날은 켄터키를 떠나서 멕시코의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2년 동안 지냈다. 그후 콜롬비아의 라세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1965년 8월 니카라과의 수도 마나과에서 사제로 서품받았다. 그리고 인간 변화와 사회 변혁을 동시에 이룰 방법을 찾았다. 사회 변혁만을 추구하던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영적 갱신만을 추구하는 수도생활을 동시에 극복하고 싶었다. 그것은 스스로 ‘사랑의 송신기’가 되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기적인 사랑에 한눈을 팔 여유가 없다. 이기적인 사랑이란 모두 절연체(絶緣體)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웃에 대한 사랑보다 자신에 대한 사랑이 더욱 클 때, 그것은 우리 사랑의 흐름을 방해하고 억제하는 것이 된다. 우리는 자신을 송두리째 사랑에 바쳐서 사랑의 고압 전류가 우리 몸을 통해 흐르게 해야 한다. 우리는 사랑의 송신기들이다.”

솔렌티나메에서 나눈 복음

1966년 이후 카르데날은 니카라과의 솔렌티나메 섬에 ‘사랑의 발전소’가 될 그리스도교 바닥 공동체를 세웠다. 여기서 공동체 사람들은 아침에는 낚시질과 장작패기, 식사준비를 나눠 하였고, 나뭇잎으로 지붕을 덮은 작은 집에 모여서 해 돋을 때 지저귀는 새소리를 들으며 성서를 읽고 명상에 잠겼다. 식사를 하고 난 뒤에는 매일 가능하면 한 그루씩 나무를 심었다. 그리고 남은 시간에 노동을 하고, 점심을 먹고 난 뒤에는 긴 낮잠에 들어갔다. 기온이 때로는 50도까지 올라가고 습도는 90퍼센트가 되기 때문에 낮에는 일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주일에는 그 주변에 사는 농부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한다. 복음서를 읽고 강론 대신에 농부들과 대화를 나눈다. “농부들의 성서 해석은 많은 신학자들보다 더 심오했다. 그러면서도 복음서와 마찬가지로 단순했다. 이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복음서가 가난한 이들을 위한 ‘좋은 소식’인 것은 복음서가 바로 그들을 위하여 그들과 같은 사람들에 의해 기록된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날 “그러나 이제 내 말을 듣는 사람들아, 잘 들어라.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해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사람을 축복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학대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어라.”(루가 6,27-31)는 성서를 읽고 토론을 했다.

라우레아노 : 이런 터무니없는 소리는 머리만 복잡하게 만들어요. 얼빠진 소리라구요.

올리비아 : 아주 어려운 말씀이네요. 그러나 그렇게 해야 해요. 복음이 그렇게 하라고 하니까요.

레베카 : 하느님께서는 이 땅에 사는 우리에게 사랑을 베풀려고 오셨기 때문에 원수를 삼지 말고 우리 모두가 서로 사랑하기를 원하시리라 생각해요.

윌리엄 : 우릴 억누르는 원수까지 말인가요?

카르데날 : 우리는 증오 때문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투쟁하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죄를 미워하고 죄인은 사랑해야 한다.”라고 말해왔지요. 나는 혁명가가 증오 때문에 싸운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칠레의 아로요 신부의 집에서 간소한 성찬식을 가졌을 때, 그 사제가 들려준 말을 듣고 나는 대단히 기뻤습니다. 어느 사제가 혁명적 증오를 옹호하자 그 신부는 이 사제에게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사랑만이 혁명적이고, 증오는 언제나 반동적입니다.”

올리비아 : 그러나 사랑은 ‘사랑’이란 말을 세 치 혀로 뇌까린다고 해서 표현되는 게 아녜요. 사랑은 ‘실제로’ 사랑함으로써만 표현이 돼요. 만일 여러분이 어떤 식으로든 증오하는 사람을 도울 수 있다면 그 사람에게서 증오를 없앨 수 있어요. 사랑은 증오를 없애요.

마르첼리노 : 우리가 누굴 증오한다면, 우린 원수에 대항하는 게 아니죠. 우리부터가 약하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적이 되는 거죠. 우리가 원수들과 다른 점은 우리에게 남을 억압하려는 마음이 없다는 겁니다. 다만 그들을 이기심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싸우는 거죠. 단지 사랑만이 우리 역시 지킬 수 있지요.

 

니카라과를 위한 저항과 노래

1970년 카르데날 신부는 쿠바와 아옌데가 집권했던 칠레를 방문하고 나서 사회 개혁이 개인의 삶에도 좋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발견했다. 쿠바 청소년들도 새롭게 탄생하고 있었다. “새로운 인간은 이기심이 없는 인간, 이웃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봉사하는 연대적 인간이다. 새 인간은 사회주의적 사회의 인간, 다른 사람으로부터 이익을 취하는 데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주는 데 의미를 두는 인간이다.”

그뒤로 쿠바를 찬양하는 책을 썼던 까닭에, 카르데날은 국가 근위대에게 체포와 살해의 위협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내가 소유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나는 모든 것을 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빼앗길 것이 없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나를 죽이는 것뿐이다.”라면서 태연했다.

그러던 차에 1978년 니카라과에 변혁의 때가 왔다. 소모사 정권은 부패와 폭력, 그리고 무절제한 소유욕 때문에 국민들의 원망을 샀다. 재야와 국민들, 그리고 산디니스타 민병대가 독재정권에 대항하였다. 노동자와 기업인, 그리고 마지막엔 교회마저도 산디니스타 혁명에 동조하였다. 여러 도시에서 소요가 발생하자 국가 근위대는 도시를 폭격했으며, 항의시위를 하던 젊은이들을 사살했다. 카르데날 신부 역시 무조건 비폭력을 주장할 수는 없었다.

카르데날 신부는 스위스로 호소문을 보냈다.

“니카라과 국민은 한 독재자의 억압과 상상할 수 없는 잔인성으로 어린이와 남자, 여자를 막론하고 고문하고 살해하고 있는 이 멍에에서 벗어나길 원합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저항의 대열에 섰습니다. 니카라과 교회는 분명히 정의의 편에 섰습니다. 교회는 복음과 인간해방의 메시지라는 확신을 가지고 이런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소모사 장군은 라틴 아메리카에 있는 다른 독재자들의 강한 군대와 그들의 지원을 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큰 힘에 직면하여 우리 국민들은 분쇄당할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니카라과 해방을 위해 도와주십시오. 우리의 복음을 진지하게 생각해 주시고, 니카라과에서 투쟁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십시오. 나를 아는 사람들은 내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대의와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기꺼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결국 니카라과 산디니스타 혁명은 성공하였다. 그리고 에르네스토 카르데날은 1979년 10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있은 국제서적 박람회가 주관하는 평화상을 받았다. 그는 미국의 절대적 평화주의자를 향하여 이렇게 말한다. 이 싸움은 골리앗에 맞선 다윗의 형국이었다고. 산디니스타들이 소모사 정부군에 총을 들고 싸운 것은 다윗이 골리앗이라는 폭력의 거대한 괴물에게 던진 돌팔매와 같은 것이었다고 말한다. 고문과 폭력을 종식시키기 위한 마지막 수단이었다는 것이다.

와서 아침을 들어라

배고픈 중생들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도 중요하지만 정작 필요한 것은 굶주림에서 벗어날 음식이다. 억눌린 사람에게 먼저 필요한 것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성서구절이 아니라 그 멍에에서 해방시키는 일이다.

요한복음서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나타나신 곳은 티베리아 호숫가였다. 제자들은 굶주림과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 그물을 던졌지만 허탕이었다. “그물을 오른편에 던져보아라.”(요한 21,6) 하시며 접근하신 분은 예수님이셨다. 과연 그물을 끌어올리기도 어려울 만큼 고기가 걸려들었다. 새벽 여명 속에서 그렇게 제자들은 스승을 다시 만났다.

그분은 다정하게 제자들에게 “와서 아침을 들어라.”(21,12) 하시며, 빵도 집어주고, 숯불에 구운 생선도 집어 주셨다. “당신은 누구십니까?”하고 물을 만큼, 그분이 자기들의 스승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고 성서는 전한다. 예수님은 그런 분이셨다. 배고픈 이의 처지를 헤아릴 줄 아는 분이었고, 말씀을 나누시기에 앞서 따뜻하게 손을 먼저 잡아주시는 분이었다. 우리도 이웃의 손을 잡아주고 있는가. 오늘 ‘예’하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복되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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