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가 걷히면 기다리고 있을 풍경
상태바
안개가 걷히면 기다리고 있을 풍경
  • 이슬
  • 승인 2022.01.03 09:3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슬 칼럼-살면서 한 마디
그림=이슬
그림=이슬

다시 아침, 새 일터를 찾아 가는 길이다. 새 일터는 잔잔한 물결 위에 천둥오리들이 놀다가는 넓고 깊은 저수지 근처에 있다. 산골 깊숙이 숨겨진 신비로운 비밀의 장소처럼 꼬불랑 길을 따라 몇 개의 마을을 지나 닿는 곳이다. 아직 길이 익숙하지 않아 천천히 운전하면서 길 위에 만나는 풍경들을 매일 눈으로 하나씩 찍어둔다.

시골 길은 느리게 기어가도 누구하나 재촉하는 이 없다. 어떤 날은 한적한 길이 당연한 듯 겁도 없는 까마귀들이 차가 다니는 길인데도 유유히 내려 앉아 걸어 다닌다. 오히려 차가 까마귀들 눈치를 보며 중앙선을 넘어 피해서 가 준다. 또 어떤 날은 '어르신 운전 중' 이라는 글자를 크게 등짝에 붙이고 가는 트럭을 만났다. 나도 함께 '어르신 운전'이라는 걸 해 보고 싶어져서 추월하지 않고 속도 20으로 한참 뒤를 따라갔다. 어르신 운전은 가히 품위 있게 걸어가는 우아한 학과 같으니...아니다 공작새가 나으려나. 아무래도 방향이 같은 것 같아 계속 쫄랑쫄랑 따라서 가다보면 어르신이 수줍어하시거나 또는 노여워 하실까 싶어 적당한 곳에서 먼저 달아났다.

오늘은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안개가 자욱하다. 저수지 근처에는 안개 낀 날이 잦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일주일 사이에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깊숙이 깔린 안개를 두 번이나 만나니 실감이 난다.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건 어둠처럼 금세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한다. 자동차 불도 켜 보고 비상등도 켜 보지만 소용이 없다. 차라리 어둠이 나을 수도 있는 거구나.

안개 속을 살그머니 기어가고 있자니 문뜩 어떤 이가 들려 준 안개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에게는 아이가 하나 있었는데, 그 아이는 어렸을 적부터 천재 소리를 들을 정도로 공부를 참 잘했다고 한다. 전국에서 알아 줄만큼 기대 유망주였던 그 아이는 그만 심한 사춘기를 겪으면서 순식간에 무너져 갔다고 한다. 이렇게 달라지고 멀어져 가는 아이가 믿기지 않았고 믿고 싶지도 않아서 더 강하고 모질게 잡아주면 똑똑한 아이니깐 금세 돌아 올 거라고 그는 믿었다고 한다.

산 속 깊은 곳 어떤 기관에 잡아 두기도 하고 급기야는 화를 주체 할 수 없어 가위를 들고 아이의 머리카락을 잘라 보기도 했다고. 그럴수록 아이는 멈추기는커녕 더 강하게 틀어져 갔고 그는 바닥으로 질주 하는 아이를 바라만 보면서 이제는 더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절망했다고 한다. 그때까지 실패라는 것이 없었던 그의 삶에 아이와의 관계는 처음으로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러한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너무나 힘들어서 극단적인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고 했다. 그 때 그는 안개 속에 서 있는 자신을 봤다고 했는데, 그 말을 듣던 나는 안개가 어떤 건지 제대로 감이 없어 그 심정을 다 이해하지 못 했었구나 한다. 그리고 지금 안개를 마주하니 아, 안개가 이런 거구나. 아, 안개 속에 서 있다는 것이 이런 거구나 한다. 너무 두렵고 너무 무섭다.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만큼, 길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사람을 무력하게 만든다.

그 때 그는 나처럼 길을 가다가 우연히 안개를 만났고 더 갈 수 없다고 생각되어 갓길로 잠시 차를 세우면서 처음으로 안개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보게 되었다. 안개 앞에 서있던 그는 불현듯 지금의 자신의 처지가 안개 앞에 서 있는 모습과 같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안개 앞에서 도저히 한 발짝도 뗄 수가 없었는데, 그 한 발짝 아래에 낭떠러지가 있을 것 같아서라고 했다. 그는 이러지도 못 하고 저러지도 못 하는 자신을 두고 한참을 그렇게 그 자리에 서서 꺼억꺼억 울었다고 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실컷 울고 난 그는 눈물로 씻어진 눈을 다시 떴는데, 그의 발 끝 바로 앞 바닥이 보였다고 한다. '그래. 이거구나. 길이 보이지 않는다면 발 끝 앞 바닥만큼이라도 보이는 만큼만 걸어가 보자. 그만큼이라도 나아 갈 수 있다면 또 그만큼의 바닥이 보이겠지. 그렇게 자꾸 가다보면 그러면 다시 걸어가게 되는 거다.'

그 뒤에 그는 다시 일상을 차차 회복 했고 힘들었지만 아이와 함께 극복해 가는 과정을 통해 나중에 부모들을 교육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안개 걷힌 길은 여느 때 보다 더 선명하고 맑다. 그 길을 돌아 나오면서 문득 그 때 그에게 한 발 한 발은 어떤 의미였을까. 그의 한 발의 모습들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갑자기 궁금해졌다. 그리고 지금 내 한 발은 어떤 것인가 생각하게 되었다. 동생이 아플 적에 병원에 꼼짝 없이 누워있어야 할 때, 동생이 많이 답답해하는 걸 느끼고서 곁에서 간호하시던 아버지가 동생에게 물어 봤다고 한다. 이 곳을 나가면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뭐냐고.

동생은 아내와 키우던 고양이 두 마리와 방 안에 누워 실컷 낮잠을 자고 싶다고 했다고 한다. 평범한 일상이, 그 중에서도 흔하디흔한 그 낮잠이 동생에게는 그리도 간절한 한 발이였구나. 우리가 떼어 놓아야 할 한 발 한 발은 어떤 의미심장하고 거창한 한 발이 아닐지도 모른다. 아이들과 깔깔거리고 함께 웃고 남편과 차 한 잔에 다정한 이야기를 나누며 온 가족이 둘러 앉아 맛있는 것을 먹고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고 가끔은 친구와 이웃과 수다를 하고 재미난 것들을 공유하는 것, 그런 작은 것들이 한 발이 되어줄 것이다. 잘은 모르지만 안개 속에 서 있던 그에게도 아이와 함께하는 사소한 일상의 한 발이 그 후를 있게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새로운 얼굴을 마주하고 새로운 일을 익히는 것은 잦은 긴장감을 불러오기도 한다. 긴 육아 후에 현실감이 많이 떨어져 있어 자꾸만 자신감이 떨어진다. 작아지려는 어깨와 허리를 다시 또 다시 펴고 숨을 크게 들여 마셔 본다. 그리고 이제 안다. 안개 앞에서 나아가려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면 되는 거라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먼저 반갑게 인사하기, 좋은 말 한 마디 건네기, 궂은일도 기쁘게 하기, 오시는 손님들에게 기분 좋은 인사 건네기... 안개 뒤에도 또 어떤 어떤 사소하고 재미나며 풍성한 일상들이 기다리고 있다면 기꺼이 앞으로 걸어 나가리라.

 

이슬 비아
세상에 온 의미를 찾아가는 촌스러운 이파리.

 

 


종이신문 <가톨릭일꾼>(무료) 정기구독 신청하기 
http://www.catholicworker.kr/com/kd.htm

도로시데이영성센터-가톨릭일꾼 후원하기
https://v3.ngocms.co.kr/system/member_signup/join_option_select_03.html?id=hva82041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