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
-김창완
하늘이 버린 그를
우리는 가슴 속에 거두었습니다.
그의 가슴 속에 들앉았던 우리
그의 믿음이 곧 우리의 병임을 알았습니다.
그리움 하나로 기다렸고
다부진 어깨 우람한 목소리
더 오랜 기다림도 견딜 수 있습니다.
눈보라 벌판 기울어진 새벽부터
북녘강 얼음 위 달빛 젖는 곳
두루마기 펄럭이며 서 있는 사나이여
저녁놀 끝에 매달린 별들이 보입니까
핏방울 튀어 점점이 박힌
저것을 당신의 눈이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당신의 눈에서 하늘의 밫이
쏟아져 내립니다
헤어진 우리 손 위에
나비 한 마리 날아와 앉을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당신의 가슴팍에 뚫린 총구멍으로
내밀러 마주 잡은 우리 손 위에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 그 뒤에 이미 모든 일이 다 이루어졌음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시려고 “목마르다.” 하고 말씀하셨다. 거기에는 신 포도주가 가득 담긴 그릇이 놓여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듬뿍 적신 해면을 우슬초 가지에 꽂아 예수님의 입에 갖다 대었다. 예수님께서는 신 포도주를 드신 다음에 말씀하셨다. “다 이루어졌다.” 이어서 고개를 숙이시며 숨을 거두셨다.(요한 19,25-30)
때로는 순교보다 위대한 사랑
최양업 신부는 1849년 4월 15일 상해에서 사제서품을 받은 다음 5월에 만주 요동으로 가서 7개월 동안 베르뇌 신부와 함께 병자들을 방문하고 주일과 축일에 교리를 가르치며 어린이들에게 교리문답을 가르치고 이웃 교우촌에 가서 성사를 주었다. 그후 조선에 들어와서는 ‘길의 사나이’라고 불릴 정도로 인생의 대부분을 객지에서 떠돌며 보냈다. 그는 햇볕에 얼굴이 그을어 새까맣게 타서 갓끈 자국만이 하얗게 보일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12년 동안 경기도·충청도·전라도·경상도·강원도를 두루 순회하며 전교했다. 서울과 그 주변을 제외한 남한 전역이 그의 사목 무대였던 것이다. “그는 하루에 80리에서 100리를 걸었다. 밤에는 고해성사를 주고, 날이 새기 전에 떠나야 했다. 나흘 밤 동안 계속해서 과중한 일을 하고 나서 비로소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고 페롱 권 신부가 기억한다. 최양업 신부는 이렇게 온갖 고난과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활동하다가 1861년 6월 15일 영남지방 전교를 마치고 주교에게 사목활동 상황을 보고하려고 서울로 가던 중 경상도 문경에서 갑자기 쓰러져 40세의 아까운 나이로 이 세상을 떴다.
그동안 한국교회 안에서 최양업 신부는 순교한 것이 아니라 순직했다는 이유로 그다지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김대건 신부는 첫 사제이며, 동시에 순교하였던 까닭에 가장 귀하게 여겨져 왔다. 그러나 최양업 신부의 죽음은 순교 못지않게 훌륭한 것이었음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우리 대부분은 종교적 이유로 예수님처럼 죽을 수 있는 환경에서 살지는 않는다. 오히려 안일하게 살아가며 순교자들을 기념할 뿐, 그 뜻을 계승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현실 속에서 순교적 열정으로 살아갔던 사람을 더욱 부각시켜야 하는 이유이다. 사실 어느 때는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큰 용기를 필요로 할 때도 있는 까닭이다.
최양업 신부는 실제로 순교를 각오하며 살았다. 기해박해로 세 명의 사제가 순교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1844년, 최양업 신부는 만주에서 이렇게 썼다. “언제나 저도 신부님들의 숱한 노고와 형제들의 고난에 참여하기에 합당한 자가 되어 그리스도의 고난에 부족한 것을 채울 수 있을까요?” 김대건 신부의 순교 소식을 듣고서는 “저희의 모든 희망은 천주님의 자비에 달려 있고, 저희의 전적인 소원은 그분의 지극히 거룩하신 뜻을 이루는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삶 안에서 죽고 함께 묻히는 것.”이라 하였다.
가난한 동포, 그리고 사제의 애절양
최양업 신부가 살았던 때, 조선 땅의 백성들은 힘겨운 나날을 견뎌야 했다. 17세기부터 18세기 중엽까지 200년 동안에 큰 기근이 무려 52회나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현종·헌종실록에 보면 이 시절의 참상을 잘 알 수 있다. 일시에 내다 버린 굶어 죽은 사람의 숫자는 서울에서만 3,600여 구에 이르렀다. 기근에 지친 부모들은 6, 7세의 어린 자식을 버리려 하는데 자식들이 떨어지지 않으려 하니 부모가 자식을 나무에 붙들어 매놓고 가기도 하였다. 어머니는 이미 죽었는데 젖먹이가 그 옆으로 기어가 젖을 빨다가 젖이 나오지 않자 서럽게 우니 행인들도 따라 우는 상황이 전개되기도 했다. 죽을 배급받아 먹던 남편이 갑자기 옆에서 죽어 넘어져도, 그의 처는 제 죽을 다 먹고 나서야 통곡을 하였다. 게다가 관료들의 폐해가 심해서 백성들은 더욱 도탄에 빠졌다. 1803년 강진에 유배갔던 다산 정약용은 “노전에 사는 한 백성이 아이를 낳은 지 사흘 만에 군보(軍保)에 등록되고 이정(里正)이 소를 빼앗아 가니 그 사람이 칼을 뽑아 자기의 생식기를 잘라 관가에 가지고 가니 피가 아직 뚝뚝 떨어지는데 울며 하소연 하였으나 문지기가 막아버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애절양(哀絶陽)>이라는 시를 지었다. 한편 최양업 신부는 “흉년이 들어 가난한 사람들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쌀 한 말에 20푼이나 25푼 하던 것이 지금은 80푼, 90푼까지 합니다. 어떤 지방에서는 120푼도 더합니다. 그뿐 아니라 별자리에 이변이 생겼다 해서 온 조선이 공포에 떨고 있습니다.”(1858.10.3.서한)라고 전하였고, “백성들은 각종 세금과 공물을 바치느라 가련한 처지로 몰립니다. 관원들, 포졸들, 양반들은 하나도 바치는 법이 없습니다. 해마다 가난한 이들이 애써 일하지만 세금과 공물을 바치기도 어려울 지경입니다.”(1850.10.1.서한)라고 답답한 마음을 토로했다.
교회 안의 양반
양반들은 교회 안에서도 문젯거리였다. 최양업 선부는 말하기를 “양반 족속의 사람들은 대개가 한가로운 생활을 합니다. 아무리 가난하고 처자식들이 굶어 죽어도 절대로 일은 하지 않습니다. 불의·사기·착취 등으로 살아갑니다. 노름과 음주와 향락에만 몰두합니다. 저들이 교회에 나온 후 그런 방탕한 생활이 금지되므로 먹을 것이 없게 되고, 또 먹을 것이 없으니 그전 생활로 되돌아갑니다.” 최양업 신부는 아예 양반제도 자체를 반대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조선 백성의 제도가 좋다고 합니다. 즉 양반의 모든 권리를 인정할 것이요, 상민은 양반에게 복종할 것이며 자기 처지에 만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제도하에서는 우애와 애덕이란 있을 수 없고 양반만 대접받으니 천부적 인간 존엄성은 완전히 무시됩니다. 그것이 없으면 천덕꾸러기로 억눌리기 마련입니다. 인간 존엄성 유린은 그리스도의 정신에도 위배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말씀과 실행으로 항상 가난한 사람들과 비천한 사람들의 편을 드신 반면에 교만한 사람들과 권세 있는 사람들은 엄히 다루셨습니다. 인간의 본성이 부귀와 권세에 아부하고 가난과 비천을 배척합니다. 그런데 우리 양반제도는 인도의 브라만 계급과 같은 고질적인 제도라고는 할 수 없고 가르치고 계몽하면 고칠 수 있습니다. 나도 실제로 경험했습니다. 외인들 중에서도 약간 눈을 뜬 사람들은 현 양반제도가 나쁘다고 하며, 이대로 두면 나라가 망한다고 시인합니다. 만일 어떤 직분에 사람을 채용할 때 그 사람의 출생 신분을 고려하지 않고, 재능과 인격만 보고 채용한다면 양반제도는 쉽게 무너지리라 생각합니다.”(1857.9.15.서한)
그래서 사목자들이 양반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을 걱정하였다. 언제나 양반들을 두둔하던 페레올 주교에게 여러 차례 편지를 올려 양반들을 멀리할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주교로부터 날아온 것은 꾸중뿐이었다. 마침내 페레올 주교가 별세하자, 그들 양반 신자들은 다시 메스트르 신부에게 매달렸지만 추문만 일으킨 채 영영 교회를 떠났다. 따라서 최양업 신부는 저간의 사정을 선교사 파견의 책임을 맡고 있던 리부아 신부에게 편지로 알렸다. “우리나라 양반들은 교만하고 난폭하여 상민이나 천민을 무조건 멸시하고 경멸하므로 모든 악의 근원이 되어 외교인들까지도 미워하고 원수로 여깁니다. 이런 자들이 주교님 측근에서 주교님을 보좌하였기에 교중에 항상 반목과 질투가 있었고 교우들의 열심이 감소되었습니다.”
대를 이은 전통, 연민
조선사회의 신분제도에 대한 반대는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최양업 신부의 조부였던 최인주는 박해를 피해 서울에서 홍주 다락골로 이주하였는데, 하루는 조상의 문적(門籍: 경주 최씨)을 뜯어 지망태를 만들며 “이런 것이 자손의 교만함을 이루기 쉽다.”면서, 자기 종들에게도 ‘영감 마님’이라 부르지 말고 ‘아버지, 어머니’라고 부르도록 하였다. 그리고 부친 최경환은 과천 수리산 뒤듬리에 숨어 살면서 가시덤불과 돌자갈밭을 개간하여 생계를 잇고, 이곳에 교우촌을 만들었다고 한다. 최양업 신부의 경험은 배움이나 재산이 인간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쳤다. “부친은 비록 무식했지만 해박한 교리지식, 열변과 달변으로 강론이나 강의를 할 때에는 외교인들도 그의 호교론에 이굴어굴(理屈語屈) 하여 돌아갔습니다. 밭에서 일할 때나 집에서 일할 때나 길에서 누구와 담화할 때나 항상 천주교 교리와 열심수계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말은 힘이 있고 남을 설복시키는 능력이 있어 모든 이가 감탄하였습니다. 천주님에 대한 사랑과 함께 사람에 대한 동정심도 가지셨습니다.”(1851.10.15. 서한) 그의 부친은 1839년 박해 때 체포되어 포도청에서 태장 340대, 곤장 110대를 맞고도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교우들에게 용기를 북돋아주다가 36세의 나이로 선종했다.
내리사랑, 큰 자비
그런 까닭에 최 신부는 신학생 3명을 말레이시아의 페낭 신학교로 유학 보내면서, 담당 신부에게 이렇게 편지를 띄웠다. “학생들에게 그리스도적 겸손의 덕을 가르쳐주십시오. 조선에선 겸손의 이념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인간의 됨됨이를 평가할 줄 모르며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오로지 세속 영화와 부귀공명에서 찾습니다. 우리 교우들 중에서 신분계급 차이로 서로 질시하고 원수처럼 대하는 이들 때문에 분열이 일어나 큰 걱정입니다.”(1854.11.4. 서한) 이처럼 그의 사상 밑바닥에는 안팎으로 억압받으며 사회 어느 구석에서도 탈출구를 찾아볼 수 없었던 서민층에 대한 따뜻한 애정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한편 제4대 교구장 베르뇌 주교는 1857년 3월에 열린 성직자 회의에서 사본문답(四本問答)을 전부 배우지 못할 경우에는 세례를 주지 말 것을 지시하였다. 이에 대해 최양업 신부는 많은 갈등을 느꼈다. “어린이들은 사본문답과 조만과의 긴 경문을 청산유수로 외우는 반면에, 노인들은 경문 한마디를 하루 종일 배워도 입에 올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1858.10.3. 서한) 그는 대부분의 교우들이 게으름 때문이 아니라 떠돌며 화전을 일구고 살거나, 비신자들과 어울려 살아야 하기 때문에 사본문답을 그렇게 철저히 외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연거푸 두 번이나 교구장에게 이 지시의 부당성을 하소연하였다.
한편 최양업 신부는 우리말로 천주가사를 지어 신자들에게 보급하였다. 이 노래들을 읊조림으로써 신자들은 쉽게 교리를 배울 수 있었으며, 닥쳐오는 고난 속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내세를 기다리는 마음을 담은 천주가사는 박해기의 신자들에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을 주었다. 그리고 부귀영화와 기득권을 끊어버리고, 가난하고 고통스런 신앙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를 깨우쳐 주었다.
“사랑사랑 천주사랑/사랑말씀 다못하나/진심열망 열애하면/위주치명 쉬오리다/예도가서 사랑하고 제도가서 사랑하소/애주애인 자주하면/뉘감히 미워할까.”(애덕가) 또한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 해원(解宽)의 노래들로 불려졌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완전한 새 세계로 옮겨가는 시작으로 믿었던 것이다. “부 귀영화 얻었은들/몇해까지 즐기오며/빈궁재화(災禍) 많다한들 몇 해까지 근심하리/이렇듯한 풍진세계/안거할곳 아니로다/인간영복 다얻어도/죽어지면 허사되고/세상고난 다받아도/죽어지면 그만이라.”(사향가)
목마르다
세상이 허망한 줄을 예수님도 아셨던가. 예수님은 결국 실낱 같은 목숨, 그러나 하느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누구도 함부로 빼앗을 수 없는 목숨을 던지셨다. 빌라도와 유다 지도층 무리의 생각에는 귀찮은 방해물 하나를 해치웠을 뿐이겠지만 예수님 입장에서는 거룩한 생명을 스스로 버려 더 큰 생명을 이루려는 우주적 행동이셨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유다인의 왕’이라는 패찰을 붙여주었으나 실상 예수님은 어느 누구의 왕이 되고자 하신 적이 없었으며, 그렇기에 참된 왕이시기도 했다. 참된 주인은 식솔들을 위하여 목숨마저 버릴 만한 자비심이 있어야 하는 까닭이다. 이 와중에서도 병사들은 저마다 한몫씩 챙기기 위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무엇인지 서로 따져 물었고, 결국 예수님의 옷을 찢어 갖지 말고 제비를 뽑아 한 사람이 독차지하게 하자는 데 합의했다. 우리 속담에는 콩 한 쪽도 나눠 먹는 미덕을 찬양했는데, 이들은 행운을 잡은 한 사람의 독점을 더 좋아했다. 결국 이런 사고방식이 권력독점과 부의 독점을 낳고, 힘없고 돈 없는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어도 좋을 합법적인 공간을 만들어 나갔다. 이게 세상의 질서였다. 바로 예수님은 이런 질서에 반대하셨기에 죽음을 당했고, 그 하찮은 유산인 옷가지마저도 저들에게 넘겨주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에 임박해서도 여전히 사랑밖에 모르셨다. 사람밖에 모르셨다. 사랑하는 제자와 어머니를 두고서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요한 19,26-27)라고 하셨듯이 십자가 앞에서도 새로운 사랑의 관계를 맺어주셨다. 그분이 목말라한 것은 오직 하나, 사랑밖에 없으셨기 때문이다. 그 사랑 안에서 죽음으로써 그분은 자신의 사명을 “이제 다 이루었던”(19,30) 것이다.
한상봉 이시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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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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