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필요한 경우에 일치를,
애매한 경우에는 자유를,
어떤 경우에도 사랑을.(성 아우구스티누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말씀하셨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도록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께서는 아들이 아버지께서 주신 모든 이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도록 아들에게 모든 사람에 대한 권한을 주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저에게 하라고 맡기신 일을 완수하여, 저는 땅에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였습니다. 아버지, 세상이 생기기 전에 제가 아버지 앞에서 누리던 그 영광으로, 이제 다시 아버지 앞에서 저를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께서 세상에서 뽑으시어 저에게 주신 이 사람들에게 저는 아버지의 이름을 드러냈습니다. 이들은 아버지의 사람들이었는데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켰습니다. 이제 이들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모든 것이 아버지에게서 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말씀을 제가 이들에게 주고, 이들은 또 그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이들은 제가 아버지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참으로 알고,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들을 위하여 빕니다. 세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을 위하여 빕니다. 이들은 아버지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저의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고 아버지의 것은 제 것입니다. 이 사람들을 통하여 제가 영광스럽게 되었습니다. 저는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않지만 이들은 세상에 있습니다. 저는 아버지께 갑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키시어,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저는 이들과 함께 있는 동안,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켰습니다. 제가 그렇게 이들을 보호하여,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멸망하도록 정해진 자 말고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저는 아버지께 갑니다. 제가 세상에 있으면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이들이 속으로 저의 기쁨을 충만히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저는 이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주었는데, 세상은 이들을 미워하였습니다.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빕니다.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저도 이들을 세상에 보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들을 위하여 저 자신을 거룩하게 합니다. 이들도 진리로 거룩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요한 17,1-19)
그리스도냐? 하느님이냐?
처음 그리스도교가 생겨날 적에 유다인들은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신흥종교 또는 이단으로 여겼으며 때때로 박해하기를 서슴치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은 신흥종교가 언제나 그러하듯이 확신에 차서 열정적으로 자신들의 신앙을 변호했으며 복음을 선포하였다. 그러므로 공동체 안에서 어떤 불평도 반대도 빛을 잃었다. 그래서 복음서에서조차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받겠지만 믿지 않는 사람은 단죄를 받을 것이다.” (마르 16,16)라고 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교회 안에도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들어오면서 좌충우돌하게 되었다. 그러자 바오로 사도는 이런 갈등과 분열이 피할 수 없는 것임을 받아들이고, 이런 분열에 닥쳐서도 용기를 잃지 말라고 신도들을 격려하였다. “하기야 여러분 가운데서 진실한 사람들이 드러나려면 분열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고린 11,19)
한편 바오로 사도는 “훗날 사람들이 거짓된 영들의 말을 듣고 악마의 교설에 미혹되어 믿음을 버릴 때” (1디모 4,1) 가 올 것이니, 말을 가지고 논쟁을 벌이지 말라고 충고하면서 “그것은 아무런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듣는 사람들을 파멸에 이르게 합니다.” (1디모 2,14)라고 경고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공동체의 현혹자들을 “악마 · 불신자 · 살인자 · 거짓말쟁이 · 개 · 단죄받은 자” 따위로 서슴없이 비난하였다(1디모 1,6 ; 10,20 ; 2디모 1,16-18,26 ; 3,1-9 ; 디도 1,10-16 ; 3,9-11 ; 필립 3,2 ; 갈라 1,8 참조). 이런 모진 말들은 교회의 역사에서 이단자들을 영원한 지옥벌의 불꽃 속으로 던져 넘기는 종교재판관들이 으레 내세우는 근거가 되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로마의 박해를 받던 처음 3세기 동안에도 그노시스나 도나투스와 같은 이단이 발생하였으나 자못 일시적인 분열 현상이었다. 그러나 로마의 국교가 되고 난 뒤에 권력에 교회가 묶여 들어가고 나서는 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론 등의 교리에 대한 표현상의 다른 생각들 마저도 교회분열을 만들어 냈다.
이를테면 콘스탄티노플의 네스토리우스 대주교는 알렉산드리아의 치릴로 대주교와 격력한 논쟁을 벌였는데, 네스토리우스가 성모 마리아를 ‘그리스도의 어머니’라고 부를 수는 있지만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부를 수는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치릴로는 그리스도가 하느님이므로 당연히 그리스도의 어머니는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표현만 다를 뿐 실제 내용은 별로 차이가 없는 것을 두고 싸우다가 네스토리우스는 단죄 · 추방당하여 451년에 유배지에서 죽었다. 그래서 네스토리우스를 지지하던 동방교회의 동지들은 따로 교회 (경교 景敎)를 만들었으며 나중에 생생한 수도생활을 낳았고 아라비아와 인도 심지어 중국에까지 활발한 전교활동을 전개했다.
시몬느 베이유, 교회의 뜰 밖에서
그후 교회는 여러 종교회의와 공의회에서 어떤 가르침에 대해서는 오류 또는 이단이라고 선언하고 이런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은 아예 파문시켰다. 파문당한 사람들은 구원을 주는 성사(聖事)를 모실 수 없으며 교회생활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교회의 권위 있는 교리나 선언 이외에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숨죽이고 살아야 했으며 나름대로의 생각을 밝힐 때에는 곧 사회적으로 매장될 각오를 해야 했다.
1942년에 프랑스의 시몬 베유가 쓴 글에는 ‘파문’ 이라는 이 낱말 때문에 자기는 교회의 문턱을 넘을 수 없었다는 고백이 나온다. 차라리 이 낱말 때문에 교회 문밖으로 밀려난 사람들과 한편이 되는 게 좋다고 생각한 것이다. 프랑스 파리에서 유다인 의사의 딸로 태어난 시몬 베유는 뿌리 잃은 사람들의 역경을 구제하는 데 깊이 투신했다. 대학 교수직을 거절하고 르노에서 공장 노동자로 살았던 그는 사회계층의 맨 밑바닥에서 가난하고 권리를 빼앗긴 모든 사람들과 하나가 되고자 했다.
아시시의 한 성당에서 베유는 어떤 드높은 힘에 의하여 무릎이 꿇리며 스스로 놀랍게도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그는 신약성서를 읽고 감동을 받았으며 영적으로 고스란히 그리스도께 사로잡혔다. 그러나 동시에 그가 경험한 교회는 염증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는 하느님께서 교회 밖에도 좋은 사람들이 있도록 보장하신 게 틀림없다고 믿었다. 실제로 그가 만난 좋은 사람들과, 가난한 이들의 해방과 구원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교회 밖에서 서성거렸던 것이다. 결국 시몬 베유는 파문하길 좋아하는 교회 밖으로 내쫓긴 사람들과 함께 지내기로 했다. 제도교회 밖에서 깊은 신비체험을 했던 시몬느 베이유는 서른세살로 요절할 때까지 마치 성인(聖人)처럼 살았다.
종교재판과 잔 다르크
이단이란 개인이든 집단이든 교회가 신앙의 오류라고 생각하는 바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붙여주었던 이름이었다. 이단자들은 다른 종교를 믿는 이들보다 더 가혹하게 취급되었는데, 부유하고 권력을 가진 제도교회에 반대하며 청빈운동을 벌였던 왈도파 · 알비파 · 후스파 등이 대표적이었다. 이를 두고 교회는 한사코 단죄하였는데 이단목록을 하나하나 정하고 국가권력의 도움을 받아 죄인들을 회개시키거나 제거하려고 했다. 물론 교황에 따라서 이단문제를 처리하는 방법도 달랐다.
관대한 편이었던 교황 알렉산더 3세는 무고한 사람을 처벌할 위험성을 무릅쓰기보다는 차라리 죄인을 내버려 두는 것이 낫다는 원칙을 따랐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였던 루치오 3세는 훨씬 강경한 조처를 취하여 주교들로 하여금 사람들에게 선서를 하게끔 명령하여 이를 거부하면 즉각 이단자로 낙인찍어서 처벌하였다. 이런 절차를 가리키는 ‘종교재판’ (이단심문 inquisitio) 이라는 말은 오늘날도 잔인성을 나타내는 말로 통한다. 12세기 말부터 신앙의 순수성을 보존할 목적으로 종교재판이 이뤄졌는데, 그저 파문(破門) 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불로 지지는 고문 · 유배 · 투옥 · 재산몰수 · 교수형을 비롯, 혀를 자르고 산 채로 화형시키는 방법 등 여러 가지가 있었다.
교회 안의 이단문제는 교회 안의 종교재판소에서 다루었다. 1232년 그레고리오 9세는 주로 도미니코 수도회 회원들을 판관으로 임명하였으며 이들은 범인을 목숨만은 살려주기 바란다는 청원과 함께 속권(俗權) 에 인도하였고 그들은 여지없이 죽음을 당하였다. 만약 형리들이 사형집행을 주저하면 그 사람도 이단으로 몰릴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주교들은 고문하는 것을 피하기도 했지만 예외적인 경우였다. 이 무렵에 이르면 대중들은 광신적 열정에 사로잡혀 구경거리를 찾듯 이단자 화형을 즐겼다. 이단자의 둘레에서 불꽃이 너울거리는 동안 사람들은 “거룩하신 하느님, 우리는 당신 이름을 찬미하나이다.” 하고 노래불렀다. 이러한 종교재판으로 족히 1천만 명이 처형되었다. 종교재판의 잔인성과 종교권력의 무지막지한 독선이야말로 진짜 이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잔 다르크(1412-1431) 라는 소녀는 하느님의 영감을 받아 정치적 소명을 느끼고 프랑스 북부를 영국의 점령하에서 해방시키고자 했으며 마침내 성공하였다. 그러나 그뒤에 이단이라는 죄목 아래 체포 구금되었고 재판정에 끌려갔다. 고문에 의해 잔 다르크는 거짓 가르침을 퍼뜨렸다고 자백했으나 곧 그것을 철회하였다. 그러자 종교재판소는 잔 다르크를 이단자일 뿐 아니라 상습범이라고 판단하였다.
판결문은 이렇게 적시하고 있다.
“하느님의 자비로 보베의 주교가 된 피에르와 이 법정에서 정신착란적 이단의 심문자로 이름난 장 그라브랑 박사를 대리하는 장 르 매스트르 수사는 이른바, ‘소녀’라는 그대 잔 다르크가 배교자요 우상숭배자요 사탄의 숭배자임을 선고하노라. …이렇게 우리는 그대가 상습적 범행에 의하여 옛 오류와 이단으로 되돌아가 그대 스스로 짊어진 파문에 새삼 떨어졌음을 확인했기에 우리가 그대에게 선고하는 이 판결로써 우리는 그대가 불붙는 가지로서 교회의 일치에서 추방되어 다른 지체들을 감염시키지 못하도록 교회의 몸에서 찢겨나감을, 또 속권에 인도됨을 선포하는 바이다. 우리는 세속의 정의가 이 선고를 완화하여 그대를 죽이거나 그대의 지체를 절단하지 말기를 청원하노라. 또한 그대에게 진정한 개선의 표지가 뚜렷이 드러난다면 참회성사가 집전되리라.”
이 판결문이 낭독된 직후 단죄받은 소녀는 처형자에게 넘겨졌고 화형대에서 산 채로 타 죽었다. 그뒤 1449년 샤를 7세가 잔 다르크의 재심을 명령하여 그녀의 결백이 밝혀졌다. 1920년 5월 16일 그녀는 성녀로 선포되었다. 그녀는 양심의 자유의 표징처럼 보였다. 이처럼 양심의 자유를 엄숙히 인정한 사람들은 서양역사에서 인본주의자들과 신비가들밖에 없었다.
불행한 교회분열
제도교회의 관행에 도전했던 반항아들은 모두 이단자로 죽어야 했다. 다행히도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만이 그의 단순성과 교회에 대한 헌신으로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받아들여졌고 총애를 받았다. 프란치스코는 교회를 안에서 쇄신하는 운동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그는 반항없이 그저 삶의 증거를 통하여 교회의 문제점을 환기시켰다. 그는 자신의 복음적 지향, 즉 가난을 통하여 교회의 부(富)를 축적하는 모든 이를 자매와 형제로 인정함으로써 교회의 옹졸함을, 교회의 법률주의를 문제삼은 것이다.
그렇다고 교회에서 추방된 다른 이단자들이 교회쇄신을 위해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 것은 아니다. 교회 안의 복음적 열정은 복음대로 살지 못하던 교회 안에서 항상 새로운 이단을 만들어 냈고 이단의 역사가 교회를 조금씩 바꾸어 갔다. 그러므로 이단자에 대한 승리는 거짓 가르침에 대한 승리가 아니다. 흔히 과거에 이단이었던 것이 오늘날에는 정통으로 뒤바뀌는 경우가 많다.
중세 말기에 이르면 교회의 타락상이 극에 달하여 마르틴 루터를 포함하여 복음적 열망에 목말라하던 종교개혁자들은 가톨릭 교회의 구조와 신학과 규율이 쇄신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당시 교황청은 이들을 단죄하기에 급급하였다. 로베르토 벨라르미노와 라우렌시오 성인(聖人) 마저도 종교개혁자들을 ‘배교자 · 후레자식 또는 악마의 새끼’라 부르기를 서슴지 않았으며 전혀 반성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물론 상대편도 이에 못지않게 무례하였다. 마르틴 루터는 ‘터키 출정군에게 행한 설교’에서 욕설을 퍼부었다. 루터는 터키인들을 외부에서 그리스도교 진영으로 몰려오는 ‘반(反) 그리스도’라 불렀고 교황을 그리스도교 내부에서 미쳐 날뛰는 ‘반(反) 그리스도’라고 했다. 교황과 교황청은 소돔과 고모라보다도 악하며 바야흐로 교회에 하느님의 진노를 불러들이고 있다고 선언했다. 서로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상대방을 거꾸러뜨리려고 아우성을 쳤던 것이다.
1925년에 와서도 베드로 카니시오 시성식을 앞두고 교황청 기관지는 새로 성인품에 오르는 이를 루터와 정면으로 대립시켰다. 카니시오와 루터, 이 두 이름을 빛과 그림자, 진리와 이단, 순종과 반역, 참 학문과 거짓 학문으로 말이다. 이런 태도는 종교개혁자의 개혁의 본뜻을 깨닫지 못한 처사였다. 종교개혁자들은 성직 중심의 위계질서보다 하느님 백성을, 스콜라 신학보다는 성서를, 라틴어보다는 모국어를 존중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런 열망은 적대감 속에서 교회를 둘로 갈라놓았으며 450년이 지나 요한 23세 교황에 와서야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하여 가톨릭 교회에 거의 모두 수용되었다. 요한 23세 교황은 1960년 ‘그리스도교 일치 사무국’을 설립하였고, 1964년 공의회에서 ‘일치운동에 관한 교령’이 채택되었으며, 이어서 동방 정교회와 영국 성공회 수장(首長)들이 로마를 방문하였으며 교황은 콘스탄티노플과 제네바를 방문하였다. 그리고 1979년 2월 23일 ‘로마 · 제네바 협력위원회’에 보낸 편지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일치 회복이 촉진될 수 있도록 노력을 강화하기 바란다’는 희망을 나타냈다.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하느님
오늘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때가 왔습니다.” (요한 17,1) 하고 말씀하시며 당신이 겪어야 할 고난의 시기가 코 앞에 와 있음을 알려준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소명을 수행하고 이제 인생의 막바지에 와서 담담하지만 결의에 찬 표정을 지으며 마지막 사명을 이루기 전에 하느님께 당신의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를 드린다. 예수님은 이제 죽음을 맞이하겠지만, 그래서 이 세상을 떠나게 되겠지만 그분의 제자들은 이 땅에 남아서 더욱 강퍅한 인생을 견뎌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 사람들을 지켜 달라고, 거룩하신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제발 흩어지지 아니하고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17,11). 이 사람들을 미워하는 사람들은 세상의 질서에 속한 사람들이며 이 사람들은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기 때문에 고난을 당해야 한다는 것.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위로를 주시고, 더 의연하게 “진리를 위하여 몸을 바치는 사람들이 되도록”(17,17) 당부하신다. 만약에 이들이 세상의 질서에 굴복하여 진리를 버리면, 무력한 자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능력을 거부하고 인간적인 권력을 탐닉한다면 제자들과 그들의 공동체는 언제든지 분열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아드님 예수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이 그들에게도 함께 함으로써 모든 제자들과 온 교회가 일치하고 하나 되기를 기도하시는 것이다(17,26). 이제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자신을 세상에 파견하셨던 것처럼 당신의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코자 하신다. 그리고 천지창조 이전부터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사랑하여 주신 영광을 당신의 제자들도 얻어 누리게끔 기도하고 위로한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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