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 받아라, 흙탕물로 얼룩진 수도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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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 받아라, 흙탕물로 얼룩진 수도복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1.10.04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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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의 요한복음 묵상 [지상에 몸푼 말씀]-27

입추

-고정희

회임할 수 없는 것들이여
이 세상의 고통에 닿지 못하리니
열매 맺지 못하는 사과나무여
사랑의 도끼에 찍혀 불구덩이에 던져지리니

 

토마스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요한 14,5-14)

<가톨릭 교리 사전>(박도식, 1993년 3쇄, 가톨릭출판사)에서 ‘하느님’이란 항목을 찾아보면, (1) 신은 스스로 존재하는 자존자(自存者)이며 (2) 신은 완전하고 불변하므로 시간을 초월해 계신 분이며 (3) 신은 생명의 기원이며 (4) 신은 공정한 윤리 심판관이며 (5) 우주의 창조주요 우주의 통치자라고 씌어 있다. 중세철학 교과서에서나 들음직한 이야기가 현대세계의 교리 사전에 그대로 나와 있는 것이 참으로 놀랍다.

같은 저자가 쓴 200주년 기념 <천주교 교리>(가톨릭출판사, 1991년 2쇄)에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장을 찾아보면, ‘예수’란 ‘구세주’라는 뜻이며 ‘그리스도’란 ‘기름으로 축성된 자’라는 뜻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왕이요, 제사를 바치는 제관을 가리킨다고 풀이되어 있다. 또한 그리스도의 인격은 삼위일체의 신비를 지니신 하느님의 둘째 위격이신 성자로서, 이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나신 하느님이기에 순수한 하느님이며 순수한 인간이라는 것이다. 한 존재가 신적인 요소와 인간적인 요소를 갖춘다는 것은 철학적으로 모순이지만, 그는 철학을 넘어서는 신비하신 하느님이라고 맺고 있다.

이 모든 것은 교리적으로 인정받은 것이지만, 우리가 어려서부터 들어오던 교리문답 수준을 별로 뛰어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의 뜻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그저 달달 외우는 것으로 영세를 받을 자격을 얻는다. 예비자 교리에서 배우긴 배웠는데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 그래서 우리가 그분에게서 무엇인가 같이 느끼는 바가 있어서, 그분처럼 살아가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들에게 하느님은 그저 높으신 분이며, 신비이므로 뭔지 몰라도 그저 경배해야 한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니 이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종이 주인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으랴! 참새가 봉황의 뜻을 알겠느냐는 말처럼 우리는 단지 믿음을 입으로 고백하면 그만이라는 말일까.

그분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

그런데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요한 14,3)라고 말씀하신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다는 제자들에게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14,6) 라고 하신다. 그러니 예수님을 아는 사람은 하느님도 알게 된다고 하신다. 그러나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은 어리둥절할 뿐이다. “도대체 이 양반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이람!”

그때에 예수님은 “내가 이토록 너희들과 같이 지냈는데도 너희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14,9) 하고 야단치시는 것 같다. 결국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지냈던 나날들을 알지 못하면 결코 하느님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하느님 또는 하느님의 아들은 철학자들이 고안해 낸 말장난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예수의 생애 속에 녹아들어가 있다는 말일 것이다.

예수님을 보고도 믿지 못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일’을 보아서라도 믿으라(14,11)는 말씀은 곧 인간을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행적을 보고 믿으라는 것이다. 결국 구체적인 역사 안에서 사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이해하고 따르는 길이 우리에게 열려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때문에 유다인들과 갈등을 겪고, 당신의 행적을 통하여 하느님을 드러내고, 이에 충실한 나머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부활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이 옳았다는 것을 하느님께서 확인해 주신 사건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리스도요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이 제자들에게서 생겨났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하느님조차 그 자리에 계시지 않는다고 느끼는 어둠과 절망 속에서 하느님을 부르면서 죽으셨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리고 하느님께 거는 마지막 희망이 그분을 다시 살리셨고, 이를 고백하는 제자들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교회를 건설하고 선교활동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 가운데서 수도자들은 예수님처럼 살기로 작심하고 결단을 내린 사람이기에 여러 모로 복음에 대해 깊이 이해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살이의 소금이라면, 수도자들은 교회생활의 소금이다.

 

사진출처=almacativa.tumblr.com
사진출처=almacativa.tumblr.com

세상 안에서 하느님을 체험하는 사람들

수도자들은 세상 속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하느님을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안에 살고 있기 때문에 하느님을 체험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도들처럼 수도생활을 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이 세상 안에서’ 사는 것이다.

그런데 수도자들이 살아야 하는 세상은 억압적 노동과 갖가지 폭력이 난무하는 장소이며, 자녀들의 끼니와 학비를 벌기 위하여 악다구니치는 시장판이며,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 한없이 소외당하는 세상이다. 빈부격차는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권력을 손에 쥔 자들은 영영세세 권세를 누릴 것처럼 온갖 협잡을 일삼는 곳이다. 과학기술이 하느님 대접을 받고, 인간과 마찬가지로 자연 피조물이 온통 기름을 뒤집어 쓴 채 고통당하고 신음하는 세상이다. 돈이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세상이며, 인간의 영혼마저도 상품화시키려고 발버둥치는 세상이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존재를 읽어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느님이 계시는 데도 경악할 만한 세상이 아직도 지속되는 것을 보면, 아마 하느님이란 변두리 인생들이 꾸며낸 거짓말이거나 종교를 상품화시켜 교회당이라는 슈퍼마켓에다 내다 파는 성직자들이 지어낸 광고문구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야말로 도(道) 닦는 수도자들은 일상생활에서 하느님이 무용지물(無用之物)임을 경험하면서 절망하지 않고서 세상을 배울 수 없고, 세상을 구원할 수도 없다.

그리스도의 뒤를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사람들, 특히 버려진 사람들과 어울리고 그들의 동료가 되어 주셨음을 기억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당신의 사람들을 사랑해 오신 그분은 이제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요한 13,1) 라는 말씀은 수도자들로 하여금 어디까지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지 잘 말해준다. 그들은 버림받고 소외당한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을 구체적으로 끝까지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부담을 떠안는다는 것인데,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들이 겪어야 할 아픔을 잘 보여준다.

그러므로 수도생활에서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은 ‘과잉보호’이다. 예를 들어 수도자들의 특권 중의 하나는 오랜 시간 동안 기도할 수 있는 권리이다. 남들은 살기 바빠서 기도할 시간은커녕 주일미사 참례할 겨를도 없는 경우가 많지만 수도자들은 규정에 따라 기도시간을 가지며, 그 시간 동안에 방해받지 않고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수도자들에게 주어진 특권이라면 특권이다. 그러나 삶의 치열함이 빠져 있는 기도란 얼마나 허무한 것이며, 얼마나 부질없는 착각에 빠질 위험이 있는가.

어느 신학자는 말했다. “기도는 우리 사람에서 하느님께로 올라가는 신앙의 부르짖음이다. 우리의 기도가 단조로운 하나의 일과이고 별 의미 없는 하나의 수련이라면 우리는 과잉보호되고 있는 것이다. 신앙의 위험도, 희망의 과감함도, 사랑의 상처도 맛볼 수 없는 상태에 있는 것이다. 하느님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면서 기도는 살아 있는 것, 참된 것이 된다.” 그러므로 수도자들은 기도하는 가운데 얻은 힘으로 세상에 봉사하는 것뿐 아니라 세상의 고통과 희망을 함께 나누는 가운데서 간절한 기도가 요청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종교적 권위주의를 청산하기 위하여

한편 수도자들이 세상 속에서 가난한 이들의 삶을 통하여 하느님을 체험한다는 것은 가장 무력한 이들의 자리에 주저없이 서 있는 것을 뜻한다. 교회 안에서 이뤄지는 권위는 목숨까지 걸 수 있는 사랑과 봉사이지 결코 권력의 획득이 아니다. 교회도 수도 공동체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 세상의 가치에 섞이지 않은 채 불안정한 처지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이다. 예수님이 가정도 없이, 집도 절도 없이 떠돌아다니며 비천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맴돌다 돌아가셨던 것처럼 이러한 불안정성은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본질적인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새로운 가치관과 생활 태도로 살라고 우리를 부른다. 과거에 머물면서 권위주의를 탐닉하는 기성종교가 아니라 항상 새로워져야 할 종교이다. “한 사람이 이 백성을 위해서 죽고 온 민족이 멸망하지 않는 것이 당신들에게 더 이롭다는 것도 헤아리지 못하는군요.” (11,50) 라는 요한복음의 가야파의 말은 과거 세계 안에 머물기를 원하는 권위 종교의 대표적인 입장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권위의 힘은 남을 섬기기 위해 죽기까지 하는 사랑의 연약함이고,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이루는 새로움이다.

예전에는 고위 성직자들이나 수도회 장상들이 ‘선언하다.’, ‘결정하다.’라는 말을 많이 사용했지만 요즘은 ‘방향제시’로 바뀌었다. 권위는 봉사직분으로 한 사람에게서 나오지 않는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장상은 형제 자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모든 수도자는 소속된 수도회에 대해서 책임감을 가져야 하며, 참여는 필수적이다. 보조적인 역할은 중요하고 공동 노력은 장려되어야 하고 역할은 나눠져야 한다.

마찬가지로 고위 성직자들도 권위를 자기 인격 안에서 독점하면 안 된다. 중요한 결정은 항상 많은 이들의 논의를 거쳐 내려야 하고, 하급 성직자들이나 평신도들의 협조를 구해야 하며, 만사를 혼자 처리하려고 욕심을 내면 안 된다. 마치 한 사람이 하느님을 독차지할 수 없듯이. 하느님의 뜻은 만인 안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사진출처=summitdominicans.org
사진출처=summitdominicans.org

예루살렘 밖에서 예언하는 수도자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 예언자라고 말씀하지는 않았지만, 당신을 예언자로 암시할 때는 항상 비장한 마음으로 사명을 수행할 때였다. 그리고 예언자들은 그런 세상에서 별로 환영받지 못한다. “예언자는 자기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한다.” (요한 4,44) 그러므로 사도직에 종사하는 수도자는 주위 사람들의 존경과 대접을 기대하는 처신을 하지 말아야 한다. 복음의 새로움을 살아야 하고 그것을 위해서는 주변의 푸대접에서 십자가를 보는 기쁨을 맛볼 수도 있어야 한다.

과거에는 수도자가 된다는 것이 곧 신분상승을 뜻하는 것이었다. 농노와 같은 평신도 신분에서 귀족과 같은 특별한 계급이 되는 것이다. 수도서원에 대한 이러한 신분적 이해는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교회생활 안에서 볼 수 있는 많은 모순의 온상이 되고 있다. 그래서 당연히 수도자들은 존경받고 우대받아야 한다고 생각해 온 것이 아닐까. 어쩌다 일반 사람들이나 평신도들이 수도자들을 무시하거나, 때때로 수도자들을 향해 언성을 높이면 그 사람들은 당장에 버릇없고 무례하고 성스러운 것을 욕되게 했다는 지탄을 받는다.

그래서 원래 노동과 기도를 주로 하는 수도자들의 작업복이었던 수도복이 티없이 깨끗한 정장이 되고, 예복이 되고, 제복이 되었다. 흙탕물 튀기고 얼룩진 수도복을 입고 거리낌없이 거리를 활보하는 수도자들을 본 적이 있는가. 결국 수도자가 된다는 것은 세상에서 안전지대로 숨는 역할을 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니 수도자들에게 예언직을 이야기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예언자들 가운데 대중에게 보호받고 호사를 누렸던 자가 과연 있었는가. 있었다면 예언자 학교 출신의 궁중이나 신전에 살던 어용 예언자들뿐이었다. 그러므로 다시금 오늘날 청빈과 정결, 순명서원이 갖는 의미를 되새겨 보아야 한다. 수도자들의 서원도 그들이 하는 일생 동안의 선택을 서원으로 요약하는 것이겠다. 재물 대신 하느님을, 가정의 단란함과 생산력 대신 하느님을, 자기의 뜻 대신 하느님의 뜻을 택하는 일생을 약속한 것이다. 이것은 서원을 한 사람의 지위를 격상기키는 것도 신분의 안정과 안전을 보장해 주는 것도 아니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을 전적으로 택한 사람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세상으로부터 소외당하고 욕구를 자제하며 사는 것이다. 입으로는 포기하고 실제로 많은 게 보장된다면 수도자들의 투신은 허위로 낙인찍히고 만다. 그러므로 서원은 어떤 현세적 발전이나 신분상승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택한 사람의 자유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이 자유 안에서 수도자들은 먼저 세상에서 하느님을 잊고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 그들의 일상생활과 그들의 기쁨과 고통 안에서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사람들의 삶 안에서 하느님을 찾는 기도를 가르쳐 주어야 한다. 이렇게 교회와 수도회는 더 이상 ‘산 위의 도시’가 되기 위해 세상 밖에 홀로 우뚝 존재하지 않고, ‘반죽 안의 누룩’처럼 세상 안에 존재하면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서공석, 현대인의 감수성과 수도생활, ⌜종교신학연구 4집⌟, 253-70쪽 참조).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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