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시 데이는 그의 이상을 함께 나누었던 당대의 작가들과 정치운동가들로부터 지지를 얻으려고 했다. 도로시 데이는 조지 오웰, 다닐로 돌치, 시몬느 베이유 그리고 에디뜨 슈타인, 디트리히 본회퍼에 대해서도 말했다(데이는 본 회퍼의 옥중서간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수 차례 오웰에 대해 크게 경탄한다고 말했다. 그는 런던과 파리에서 오웰이 밑바닥으로 또한 밖으로 향하는 삶에 관해 쓴 것을 사랑했다. 즉 1930년대 위건의 광산노동자들의 조건에 관한 오웰의 보고서, 스페인 내전에 관한 묘사를 사랑했다. 오웰의 가난한 이들에 대한 연민, 좌익의 다양한 부류들과 그가 전개한 이념적 투쟁은 데이의 강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고 이에 관해 공동체를 방문하는 관심 있는 사람들과 긴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오웰에 관해 비판하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오웰이 이런 특징에서 벗어난다고 생각했을 때 그의 저술에 관해 문제제기를 그치지 않았다. 도로시 데이는 오웰의 <런던과 파리에서 밑바닥으로 바깥으로>에 나오는 몇몇 구절들이 방어적이고 냉소적이라고 지적하였다. 야망이 큰 작가가 가난한 이들로부터 배우고 그들의 생명력을 즐기지만, 그들 삶의 내적인 우울에 대하여 표현하는 데에는 실패했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가난에 대하여 큰 관심과 주의를 갖지 않고 묘사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그가 만났던 부랑자들에 대해 큰 배려와 사랑을 가지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나는 그가 이러한 부랑자들과 맺었던 관계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그들에 대해 매우 객관적이며, 드러나는 모든 순간들을 아주 섬세하게 포착하는 훌륭한 이야기꾼입니다.
오웰은 우리들을 부랑자들에게 아주 가까이 끌고 갑니다. 그러나 그는 내가 원하는 만큼 우리를 그들의 내면에 다가가도록 돕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과 한번도 함께 있어본 적이 없는 소설가의 방식으로만 묘사할 뿐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부랑자들의 정신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마음 깊숙한 곳에 대해서 별로 알려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웰이 부랑자들의 자학적인 유머나 그들의 회한, 그들의 잔혹함에 대해서 그리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고통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고 아마도 그 고통을 오웰이나 다른 사람들, 자신들과도 나누지 않았던 (나눌 수가 없고, 나누지 않을) 사람들입니다.
여기에도 부랑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술을 마십니다. 나는 자주 생각합니다. 그들은 울고 또 울고, 또 울고 싶지만 어떻게 울지 모르기 때문에 눈물이 흘러나오도록 하는 대신, 위스키를 들이키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렇지만 오웰이 해 주었으면 좋았겠다고 바라는 것을 내가 어떻게 할 수 있을지 나도 전혀 모릅니다. 다만 이 부랑자들에게는 오웰이 파악하지 못했던 또다른 측면이 있다는 사실만을 알 뿐입니다.”
비록 작가로서 오웰이 이처럼 냉정함과 에너지를 너무나 빈틈없이 통합하고 있는 것에 대해 그가 어떻게 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해도, 오웰에 대한 도로시 데이의 감탄은 내가 보기에 꽤 적절한 것이었다. 그가 오웰로부터 “마음”을 더 원했으며 그리고 자신의 감상적인 측면에 대해 미안함을 표현했을 때 나는 관찰자 작가로서의 오웰과 그가 알아야 할 사람들 사이에 있는 커다란 거리를 도로시 데이가 느끼지 않았을까 짐작했다. 또한 도로시 데이는 오웰이 이런 사람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냈어야 한다고 느낀것 같았다.
나도 이 부분에 대해 민감하게 생각했으며 나 나름대로 “사회적 관찰”의 의미를 이해하였기에 어느날 그에게 오웰의 이런 측면에 대해 물었다.
“나는 언제나 산문가로서 오웰에 버금가는 사람이 없다고 느꼈습니다. 다만 나는 그가 종교에 더 관심을 갖고 가난한 사람들의 영적인 삶에 더 관심을 두었으면 하고 바라지요. 오웰같이 위대한 작가에게 우리는 그 이상을 더 원하게 됩니다. 말하자면 그는 나의 가까운 영적 친구는 아닙니다. 그러나 오웰의 <카탈로니아에게 경의를>이라는 책을 읽었을 때 어떤 이념적인 황야 속에서 방황하며, 길을 잃고 혼란스러움을 느꼈던 나 자신을 기억합니다. 마치도 당연한 것처럼 가지고 있었던 모든 안전밧줄을 잃어버리고 표류하고 있는 것 같았어요.
<실패한 하느님>을 읽을때 나는 <카탈로니아에게 경의를>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비록 오웰 자신은 케슬러와 리챠드 라이트 그리고 실로네가 했던것 처럼 공산주의를 자신의 신앙으로 설정하지 않았지만 말입니다. 오웰의 어떤 초연함은 시작부터 그를 구해주었지만 그러나 내 책에서는 그런 태도에 대한 대가를 치루었지요."
오웰에게서 도로시 데이는 초기의 자신, 가톨릭에 오기 이전의 자신에게 중요한 역할을 한 친구를 발견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도로시 데이가 가톨릭주의에 가져온 현세적 이상주의가 오웰의 큰 환영을 받았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자신의 정치적인 본성, 폭로하는 저널리스트로서의 감수성 때문에 그는 끊임없이 오웰에게 관심을 두었고 늘상 그의 책들을 읽었다.
오웰은 그가 사회주의와 동조하기 위하여 했던 과거의 노력들을 기억하게 해 주었다. 그러나 오웰처럼 그도 사회주의와 끝까지 영합하지 못했다. 이 둘은 모두 고집스럽게 각자의 방식대로 개인주의적이었으며 또한 애국적이었다. 그는 어떤 측면에서 오웰이 철저하게 영국인이었던 것처럼, 철저하게 미국인이었다. 또한 이러한 국가주의는 두사람 모두를 1920년대의 세계주의 정신이나 1930년대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로부터 떨어져나가게 만들었다.
물론 오웰의 국가주의는 2차 세계대전 때에 꽃을 피웠으나, 도로시 데이는 자신의 그리스도교적 평화주의에 충실했다. 그는 가톨릭주의 안에서 자신의 고유한 세계주의적 ‘명분’을 발견하였다. 오웰은 모든 명분들, 특히 국가통제적인 이념들을 빈틈없이 의심하였다.
오웰은 소위 노동계급의 가족들과 가장 편안하게 어울리는 것 같았고 반면 데이는 오로지 종교적 신앙에 의지하는 더 겸손한 사람들과 가장 편안한 것 같았다고 짐작된다. 그들은 자신들이 늘상 파악할 수밖에 없었던 불의에 대해 도덕적인 혐오를, 본 것에 대하여 쓰고자 하는 욕구를, 잘못된 많은 것들을 가능한 한 올바르게 만들고 싶은 강한 개선주의자였고, 그렇게 하면서 더 이상의 새로운 불의들을 발생시키고 싶지 않은 강한 의욕을 가졌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도로시 데이는 개인적인 여정과 사물을 보는 관점에 관한 한 이나지오 실로네에게 훨씬 더 가깝다. 그가 몇몇 사람들에게 되풀이 말하기를 지치지 않았던 것처럼, 실로네는 아주 가난하게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농부였고 어머니는 직공이었다. 그의 원래 이름은 트란낄리 세콘도였다(그는 후에 이나지오 실로네가 되었다. 에릭 블레어가 죠지 오웰이 되었던 것과 같이). 실로네는 가톨릭이었다.
15살 때에 엄청난 지진이 그의 가족이 살고 있던 페시나 마을을 덮쳤다. 1월의 어느날 아침 15,000명의 사람들이 순식간에 죽었다. 가톨릭 성직자들은 그 현장을 떠났는데, 그들은 탈출할 수 있는 특권 계층에 속해 있었다. 반면 가난한 사람들은 죽은 이들을 매장하고 엄청난 고통을 겪었으며 자신들의 방식대로 하느님께 기도했다. 실로네는 살아남았고 종교인들의 위선을 목격하였다. 로만 칼라 뒤에 숨어있는 비겁함과 이기심을 보게 된 것이다.
지진이 일어난 후 얼마 되지 않아서 실로네는 그의 태생 종교를 떠났고 혁명적인 맑스주의의 좁은 통로를 따라가는 고단한 여정을 시작했다. 매력을 느끼고 행동하고 그리고 마침내 오랜 도덕적 성찰을 세계와 저술로서 나누는 여정이었다. 도로시 데이처럼 그도 감옥에 갔었다. 그는 피켓을 들고 파업에 참가했다. 그는 길고도 격렬한 논쟁에 뛰어들었다. 그는 정치인들, 문학인들과 만났고 영향을 받았으며 그들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 죄악을 보게 되었다. 언제나 그의 마음은 이태리의 떠돌이 무산계층 사람들, 다시 말하자면 극도로 가난하고 땅이 없는 사람들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점차 그는 악마적인 음모, 배신, 거짓말, 험담, 악의에 찬 비밀 공작, 살인 등 모든 것이 혁명, 민중, 이념의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는 것을 보기 시작했다.
1920년대 후반, 스탈린의 숙청 바로 직전에 그는 국제 공산당으로부터 떨어져 나왔다. 그는 과거의 가톨릭, 가톨릭의 과거로 돌아갔다. 그는 1294년 불과 수개월 동안 첼레스티노 5세로서 교종의 지위에 있었던 분도회 수도승 피에트로 다 모로네의 이야기에 마음을 빼앗겼다. 뛰어난 수도자였던 이 사람은 유능한 행정가가 절대로 될 수 없는 사람이었으며, 수완이 좋은 정치인과 국가 우두머리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 5개월 동안 교종으로 통치한 후 그는 물러났다.
교회 역사상 이렇게 은퇴한 유일한 교종이었고 기관의 지도자가 되기에는 너무나 그리스도를 닮은 인물이었다. 실로네와 도로시 데이는 이런 모습을 대단하게 평가하였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창설하였다고 주장하는 교회와 그리스도적 성인이 결코 양립할 수 없음을 파악한 것이다. 도로시 데이는 이 교종과 실로네가 그에게 보냈던 여러 서한들에 대해 묵상하기를 즐겼다.
도로시 데이는 이 교종의 짧은 재임이 교회에 내려온 천국으로부터의 빛이며 인류의 종교 역사에 뿌려진 빛이라고 생각했다. 세상 속에서 참다운 덕은 얼마나 쉽게 병들며 또 얼마나 제자리를 얻지 못하고 있는가. 한때 예수와 그분의 제자들 그리고 그들에게 이끌린 사람들로 구성되었던 공동체는 어마어마한 관료체제로 변하고 말았는데, 여기에는 온갖 거래와 청탁, 후원과 탐욕과 이중적인 태도와 뇌물수회 그리고 부정이 가득차서, 성실하고 정직한 사람이 그러한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사태 한 가운데에서 살아남을 수도 없었던 것이다.
<빵과 포도주>의 중심인물인 피에트로 스피나는 파시스트 이태리 체제를 겪어야 했던 혁명가로서 사제로 가장하여 지내는데, 그는 실로네가 보기에 이 13세기의 수도승과 연결되기에 충분했다. 도로시 데이는 이 책에 완전히 매료되었고 잔인한 우익체제하에서 한 좌익 정치지도자가 사제로 가장하고 그의 말과 행동을 그리스도교 전통에 따라 수행하는 매우 민감하고 사려깊은 사람으로 드러나는 역설을 즐겼다. 도로시 데이가 자신의 여정을 묘사한 <유니온 광장에서 로마로>에서 그런 것처럼, <빵과 포도주>의 방향은 정치로부터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서로 나눌 수 있는 사랑으로 옮겨가고 있다.
동료애, 동료관계라는 단어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빵의 나눔”이고, 도로시 데이는 요셉의 집 점심시간을 관찰하면서 사람들은 서로 빵(그리고 스프와 커피)을 주고받는다 <빵과 포도주>에 대해 언급하였고 이 동료애가 그에게 강력한 의미를 주었으며 실로네와 그가 서로 “동료애”를 느꼈다고 여러 번 말했다. 실로네의 도덕, 정치, 그리고 종교적 차원의 추구는 소설 속에 용해되어 있었고, 그는 자신을 성찰하면서 실로네에게 응답하였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외로움을 느끼면서 실로네의 외로움을 정확히 감지하고 예민하게 느꼈다.
<빵과 포도주>에서 열심하고 종교적으로 관상적인 여인인 크리스티나 콜라마르티니가 파시스트들을 피해 떠나간 스피나를 찾아 시골을 헤매고 늑대들에 둘러싸여 있을 때, 도로시 데이 같은 독자는 저자의 의도를 완전히 알고 있다. 그것은 문명세계라고 불리우는 밀림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크리스티나의 영성, 수도생활에 대한 관심은 도로시 데이의 것이었다. 그러나 사제로 가장한 혁명가가 의논하는 또다른 여성 비앙치나는 감각적으로 살아있고 활발하게 움직인다. 그리고 도로시 데이는 이러한 여성이기도 하였다.
[원출처] <DOROTHY DAY, A RADICAL DEVOTION>, Robert Coles, 1987
[번역문 출처] <도로시 데이, 뿌리로부터 온전히 살다>(<참사람되어>2002, 7월호)
로버트 콜스/ 하버드 의과대학의 정신의학과 및 사회윤리학과 명예교수. 청소년 문제 상담 전문가로 활동해 왔으며, 50여 권이 넘는 책을 집필한 작가. 1973년 미국의 다양한 계층과 인종의 아이들을 직접 취재하고 분석한 <위기의 아이들>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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