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23세 교종, 나귀를 타고 온 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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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23세 교종, 나귀를 타고 온 현자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1.08.28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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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의 요한복음 묵상 [지상에 몸푼 말씀]-23

아무도 슬프지 않도록

-정호승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아무도 슬프지 않도록
그대 잠들지 말아라

마음이 착하다는 것은
모든 것을 지닌 것보다 행복하고
행복은 언제나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곳에 있나니

차마 이 빈 손으로
그리운 이여
풀의 꽃으로 태어나
피의 꽃잎으로 잠드는 이여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그대 잠들지 말아라
아무도 슬프지 않도록

이튿날, 축제를 지내러 온 많은 군중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오신다는 말을 듣고서,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 이렇게 외쳤다. "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이스라엘의 임금님은 복되시어라.”

예수님께서는 나귀를 보시고 그 위에 올라앉으셨다.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였다.

“딸 시온아,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너의 임금님이 오신다.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되신 뒤에, 이 일이 예수님을 두고 성경에 기록되고 또 사람들이 그분께 그대로 해 드렸다는 것을 기억하게 되었다.(요한 12,12-16)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이스라엘의 임금,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위하여 새끼나귀를 빌리셨다. 그분이 가시는 걸음걸음 백성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라고 부르며 환호하였다. 이 백성들은 아마도 죽음의 골짜기를 걷는 것처럼 암담한 겨레의 현실을 살아가는 민초(民草)들이었을 것이다. 로마 제국의 강퍅한 지배와 성전 귀족들의 수탈을 메시아에 대한 희망으로 버텨오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로마 제국과 결탁하여 부와 권력을 누리던 제사장들과 사두가이파 원로원 나리들이 득실대는 예루살렘에 입성하는데, 예수님은 그들과 정반대의 모습으로 등장하신다. 새끼나귀는 예수께서 이 짐승들처럼 미천한 처지에 있는 백성들과 한 편임을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가난한 이들의 구원을 위하여 가난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참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제 예루살렘에서부터 새로운 역사가 백성들 마음속에서부터 열리기 시작할 것이다. 마치 교종 요한 23세께서 권위주의적이고 귀족적인 교황의 이미지를 없애고, 서민들과 세상에 열려 있는 겸손하고 혁명적인 성령의 역사를 쓰기 시작한 것과 같이.

 

누나는 천국에 갔단다, 안젤리노

안젤로 주세페 론칼리의 어린 시절은 마리아 가타리나에 대한 슬픈 기억으로 엉켜 있었다. 식구는 많은데다 일손이 딸려 한창 바쁜 철이면 어머니 마리안나도 들에 나가 괭이질을 하며 힘겨운 노동을 해야 했다. 소작인이었던 론칼리의 집안 사람들은 주인집의 추수와 타작에 쉴 짬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안젤리노의 ‘유모’ 노릇은 큰누나인 마리아 가타리나가 도맡았다. 누나래야 아직 학교에도 안 들어간 여섯 살배기였다. 그녀는 아기 요람을 흔들어 주고 음식을 먹여 주고 걸음마를 가르치면서 하루를 보냈다.

아기가 혼자서 노는 동안 누나는 설거지는 물론이고, 침실을 돌며 이부자리를 개고 옥수수죽을 끓이기 위해 불을 지폈다. 불을 피우자면 젖먹은 힘까지 다해 입바람을 계속 불어대야 했다. 당시에는 성냥을 아끼느라고 유황을 바른 대롱과 재 속에 불씨를 살려두었다가 그것으로 불을 지피곤 했다. 그러나 마리아 가타리나의 고생은 오래 계속되지 않았다. 어느날 저녁때 엄마가 일터에서 돌아와 보니 가타리나는 이마에 벌겋게 화상을 입은 채 쓰러져 있었다. 당장 의원이 달려왔지만 그대로 고개를 늘어뜨린 채 죽어갔다.

사흘 후 안젤리노는 자기 ‘유모’가 얼굴이 백지장처럼 되어 꼼짝도 않고 침대에 누워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런 누나에게 엄마는 하얀 옷을 입히고 금빛 머리를 빗겨주었다. 그러자 어른들이 와서 누나를 조그만 상자에 넣어서 노송(老松)이 군데군데 서 있는 곳으로 데려가 버렸다. “엄마, 누날 어디로 데려가지?”, “천국으로 데려간단다, 안젤리노.”

매일 낮 11시면 바카넬로에 있는 프란치스코 수도원에서 종이 울렸다. 이 종소리만 들으면 아이들은 쪼르르 부엌으로 달려가 소리소리 질렀다. “시간 됐어. 엄마, 엄마! 종 쳤어.” 아궁이 위 냄비에서 물이 끓고 있다. 데레사가 옥수수가루가 들어 있는 자루를 가져오면, 엄마는 물이 끓는 냄비에다 옥수수가루를 한 움큼 풀어 넣었다. 그러면 아이들은 서로 다투며 뛰어가서 접시와 숟가락을 집어들고 왕성한 식욕을 과시하듯 접시를 두들기며 장독대로 가서 앉았다.

해가 드는 날이면 장독대가 밥상이 된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옥수수죽 그릇을 들고는 웃고 떠들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숟가락을 흔들어 아는 체를 하는 등 요란하고도 즐거웠다. 비가 오거나 겨울이 닥치면 부엌에서 먹었다. 그럴 때면 말다툼과 소란도 유난히 심했다. 그러다가 거지라도 문간에 나타나면 자리를 좁혀 그 사람이 앉을 자리를 마련하고 데레사가 가서 그 사람의 몫을 그릇에 담아 왔다. “우리와 함께 앉아 있는 이분이 주님이시란다.” 어머니가 늘 하시던 말씀이었다.

영혼의 일기 그리고 가난한 이들

1886년 안젤로 론칼리는 학교 문방구에서 표지가 거무죽죽한 수첩 한 권을 샀다. 첫 페이지에 ‘영적 기록(Note Spintuali)’ 이라고 써넣고, 둘째 페이지에는 이렇게 적었다. ‘매일 할 일’ (1)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는 즉시 적어도 15분간 묵상기도를 바칠 것. (2) 거룩한 미사에 참여할 것. 더 정확히 말해서 미사를 바칠 것. (3) 15분간 영적독서.

‘매주 할 일’ 고백성사와 영성체. 이 수첩은 해마다 권수가 늘어나 먼훗날 <영혼의 일기>라는 제목으로 출판될 것이었다. 그가 철들기 시작하면서 ‘사회문제’가 늘 론칼리의 주변에서 영향을 미쳤다. 공장이 세워지면서 대도시 변두리에는 많은 빈민들이 모여들었는데 빈민들의 처지는 갈수록 비참해졌다. 매일같이 공장에 나가 12시간, 때로는 14시간이나 중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열한 살짜리 소년들, 심지어 아홉 살짜리 어린이들까지 노동을 하였다. 그들은 옥수수죽을 먹고 출근하여 기진하여 공장문을 나섰다.

이렇게 짐승처럼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민중들을 보다못해 마르크스주의 혁명사상이 싹트고 무정부주의자들이 출현하게 되었다. 그들은 민중 속에서 급속히 세력을 확장하면서 새로운 정치적 실험을 시도했다. 그러나 정부는 부유층과 지주들의 탐욕을 옹호하는 데만 신경을 썼다. 질서나 안보를 내세워 데모하는 군중에게 군대를 풀어 총격을 가하기 일쑤였으며, 노동자들의 동맹파업은 거의 언제나 유혈사태로 끝났다. 1898년에는 밀라노 곳곳에 바리케이드가 쳐졌다.

이런 참상에 눈을 뜨고 관심을 보인 주교나 사제는 드물었다. 다행히 몬시뇰 구인다니의 영도 아래 베르가모는 ‘가톨릭 사회운동’의 본거지가 되었다. 개방적이면서 과감했던 니콜로 레차라는 공식 자리에서 이렇게 연설했다. “선량한 가톨릭 신자들은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구원받기 위해서는 신앙과 기도와 극기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사회주의를 실컷 욕하는 것만으로도 부족합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사회정의를 실현해야 합니다.” 많은 서적을 읽던 신학생 론칼리는 이런 말을 마음속 깊이 새겨두었다.

1901년 1월, 베르가모의 신학생 3명이 로마의 아폴리나레 신학교에서 공부하려고 봇짐을 들고 로마역에 도착했다. “안젤로 론칼리라는 학생인가요? 따라오십시오. 방을 안내해 드리죠.” 안젤로가 간 곳은 머리가 천장에 닿을 듯한 골방이었다. 손바닥만한 창이 나 있었는데 그것조차 쇠창살로 막혀 있었다. “여기서는 공기와 햇빛도 배급제인가 보죠?” 이 재기발랄한 론칼리는 마침내 사제가 되어 1904년 8월 11일, 바티칸 대성전 성베드로 무덤 곁에서 첫미사를 올렸다.

베르가모 근처의 소토 일 몬테(Sotto il Monte)의 농부 출신이 갈릴래아 어부의 무덤 곁에서 다음 말을 일기장에 써넣었다.

“나는 존경을 사기 위해 사제가 된 것이 아니다. 돈을 벌거나 안락과 명성과 쾌락 때문도 아니다. 그랬다가는 불행해지고 말 것이다. 나는 어떤 모양으로든지 가난한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기 위해서 사제가 된 것이다.”

 

불가리아 그리스의 교황 사절으 론칼리,
불가리아 그리스의 교황 사절으 론칼리,

가장 아름다운 말, 지상의 평화

1915년 5월,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전쟁이 발생한 것이다. 안젤로 론칼리 신부도 징집영장을 받아 상사 계급장을 달고 베르가모 병원에 배속되었다. 1917년 10월에는 공포가 온 이탈리아를 휩쓸고 지나갔다. 오스트리아군이 전선을 뚫고 베네치아 평원으로 반격해 왔으며, 최후의 예비사단들이 피아베 강으로 투입되고, 열여덟 살배기 소년까지도 징집되었다.

안젤로는 군종신부로서, 홍수처럼 밀려드는 부상병들을 돌보았다. 베르가모 병원은 환자들로 차고 넘쳤으며, 성당들마저 야전병원으로 사용되었다. 안젤로 신부는 붕대와 소독약을 들고 부상자 사이를 돌아다니며 참혹한 전쟁의 병마(病魔)를 절감했다.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죽어갔던가! 드디어 평화의 소식이 왔다. 걸을 수 있는 부상병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고향에 내려가며 안젤로 신부에게 “다시는 주님이 우리를 전쟁에 보내시지 않도록 살아보겠습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아버지 바티스타와 어머니 마리안나는 전선에서 돌아온 아들 넷을 눈물로 맞이했다. 안젤로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지상의 평화! 이보다 더 아름답고 이보다 더 위대한 일이 또 있을까?”

그후 안젤로 신부는 교황청 인류복음화성에서 일했으며 후에 불가리아 · 터키 · 그리스의 교황대사로 봉직하게 되었다. 그리고 거기서 제2차 세계대전을 맞이하여, 그리스의 어린이들과 노인들이 거리에서 굶어 죽어가는 모습을 두 눈으로 봐야만 했다. 어느날 저녁, 전화가 걸려왔다. 유태인들이 독일 나치의 박해를 피해 터키로 배를 타고 왔으나 터키 당국이 입국을 거절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독일의 보복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을 돌려보낸다면 곧 가스실에서 죽을 것이 뻔했다. 몬시뇰 론칼리는 숨가쁘게 두 중립국 대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날 밤으로 안전한 항구로 출발할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나자 몬시뇰 론칼리는 파리 교황대사로 파견된다. 총탄을 맞아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군용기를 타고 파리로 날아가서야 저간의 사정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선임 교황대사 몬시뇰 바레리는 프랑스 해방정부에 의해 거의 강제로 추방당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해방정부는 그 밖에도 독일군에 협력했다는 혐의로 주교 30명의 면직을 요구해 왔다. 교회로서는 체면이 말이 아니었고, 입장은 무척 곤혼스러웠다.

파리의 어느 차디찬 방. 성급하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드골 장군이었다. 론칼리는 신임장을 내밀고, 짧지만 정중하게 외교적 발언을 하였으나 반응은 냉담하고 간단했다. 두말없이 드골은 나치에 협력한 ‘기피주교(忌避主敎)’의 명단부터 내밀었다. 침착한 론칼리는 증빙서류를 보여 달라고 요청하고 세심히 검토한 뒤 다시 드골을 찾아가 탄원하였다. “귀하는 이런 엉성한 자료를 근거로 소송을 제기하지 않으리라 봅니다. 그 증거문서들은 대부분 신문이나 거리에 떠도는 소문이지 사실증거가 되지 못합니다.” 드골이 몬시뇰 론칼리의 합리적인 말에 수긍함으로써 10개월간 끌던 협상은 성공하였다. 30명의 주교들은 모두 구제되었고, 그 중 3명의 주교는 자진해서 주교직을 사임하였다.

1952년 몬시뇰 론칼리는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 론칼리 추기경은 첫 부임지인 베네치아에 도착하자마자 가난한 사람들과 병자들의 집을 찾아가고, 고아원과 학교와 병원을 방문하였다. 발걸음을 멈추어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노 젓는 뱃사공들의 뚝심을 칭찬하고, 바구니를 이고 모퉁이를 돌아오는 늙은 아낙네들에게 따뜻한 말을 건넸다. 한편 베네치아 항구에서 가장 큰 노동자 집결지인 마르게라와 메스트레논도 추기경으로서는 처음으로 방문하게 되었다. 추기경은 만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형제 여러분, 요즘 세상은 뭔가 질식할 듯한 공기에 짓눌려 있습니다. 그것을 정화하십시오. 신선한 공기를 불어넣으십시오.”

나귀를 타고 온 현자(賢者)

1958년 10월 9일, 비오 12세 교황께서 운명하였다. 교황을 선출하는 콘클라베가 열리고, 10월 28일 16시 45분, 잿빛 하늘을 향해 솟아 있는 굴뚝에서 열한 번째 연기가 나왔다. 흰 연기였다. 같은 시각에 시스티나 성당 안에서는 금실로 수놓은 추기경들의 명패가 접히고 있었다. 그 중 하나만 그대로 남아 있었다. 거기에는 ‘안젤로 주세페 론칼리’라고 적혀 있었다. 티세랑 추기경이 그에게 다가와 물었다. “선거결과를 받아들이십니까?” “내 가난함과 미소함을 아는 것만으로도 나는 몹시 당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임을 알기에 머리를 숙여 어깨에 십자가의 멍에를 지겠습니다.” “이름은 어떻게 정하시겠습니까?” “요한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 23세는 추기경들로부터 최초의 인사를 받았다. 예식 주관자는 무릎을 꿇고 손과 발에 입맞추도록 안내를 했다. 그러나 요한 교황은 겸손하게 나귀를 타고 오신 현자였다. 자연스럽게 입을 맞추도록 손을 내민 뒤 먼저 포옹하는 것으로 우정을 표시했다. 한편 소토 일 몬테에서는 거리마다 사람들이 얼싸안고 좋아 날뛰었다. 세 형제들도 들에 나갔다가 급히 들어왔다. 손에서는 흙냄새가 났고 눈에는 기쁨의 눈물이 글썽거렸다. 교황이 전세계에 첫 강복을 주려고 성베드로 성전 발코니에 모습을 드러내자 군중 속에서 한 사람이 소리쳤다. “얼굴은 잘생기지 못했지만 착하게 생기셨네요.”

바티칸에서 보낸 최초의 성탄절, 요한 교종은 혼자서 고요히 성탄절을 지내야 하는 관례를 깨뜨렸다. “제수 밤비노(아기 예수)께 갑시다. 병든 어린이들과 함께 지냅시다.” 그가 병원 복도에 들어서자 어린 환자들이 참새처럼 떠들기 시작했다. “너희들을 보려고 왔다. 잠깐, 이름이 뭐지?” “안젤로.” “나도 전에는 이름이 안젤로였단다. 그런데 지금은 다른 이름으로 부르지.”

카르미네 렘마라는 어린이의 침대 곁으로 갔다. 심한 뇌막염으로 시력을 잃은 여섯 살짜리 사내아이였다. 죽은 듯 누워 있던 아이는 “교황님이죠? 난 알아요. 하지만 교황님을 볼 수가 없어요.” 요한 교종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창백한 손을 한참이나 쓰다듬어 주고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때로는 우리 모두가 장님이란다.”

그후 요한 교종은 교회 역사에서 가장 획기적인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열었으며, 그 첫 회기를 보내고 1963년 그 유명한 회칙 ⌜지상의 평화(Pacem in Terris)⌟를 발표했다. 심한 폭우가 로마 시가지에 쏟아지던 날, “예수님의 저 넓게 벌려진 팔이 내 교황직의 이상이었소. 겸손하고 소박한 교황직 말이오. 그러나 나는 내가 해온 것으로 만족하오. 모든 이를 사랑하려고 힘썼고 모두에게 잘해주려고 힘썼소.”라는 유언을 남기고, 자신의 고통을 어린이와 병자와 노동자들을 위해 바친 채 1963년 6월 3일 19시 49분에 선종하셨다.

 

마무리 기도

야훼의 이름으로 오사는 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
찬미 받으시고 또 찬미받으소서.
싸ㅓㅇ두마차를 거부하고
새끼나귀를 타고 오신 분.
왕후장상을 마다하고
목수의 아들로 우리에게 오신 분.
당신께 영광이 있고
미천한 우리에게 구원이 있습니다. 
우리도 낮은 곳으로
낮은 사람들에게 먼저 찾아가
그저 당신을 뵈올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나의 주님.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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