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속의 사람
-김 소월
잊힐 듯이 볼 듯이 늘 보던 듯이
그립기도 그리운 참말 그리운
이 나의 맘에 속에 속모를 곳에
늘 있는 그 사람을 내가 압니다.인제도 인제라도 보기만 해도
다시 없이 살뜰한 그 내 사람은
한 두번만 아니게 본 듯하여서
나자부터 그리운 그 사람이요.남은 다 어림없다 이를지라도
속에 깊이 있는 것 어찌 하는가,
하나 진작 낯 모를 그 내 사람은
다시없이 알뜰한 그 내 사람은...나를 못잊어 하여 못 잊어 하여
애타는 그 사랑이 눈물이 되어,
한끝 만나리 하는 내 몸을 가져
몹쓸음을 둔 사람, 그 나의 사람?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축제 엿새 전에 베타니아로 가셨다. 그곳에는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라자로가 살고 있었다. 거기에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베풀어졌는데, 마르타는 시중을 들고 라자로는 예수님과 더불어 식탁에 앉은 이들 가운데 끼여 있었다. 그런데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그러자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 제자들 가운데 하나로서 나중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 이스카리옷이 말하였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돈주머니를 맡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돈을 가로채곤 하였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요한 12,1-8)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머리 둘 곳 없이 떠돌아다니셨다는 것을 생각하면 위안이 된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둥지가 있는데 인간의 아들은 머리 두실 데가 없으시다.’ 우리 삶의 불확실함과 불안함을 느낄 때면 우리는 사도들이 바닷가에서 끼니를 때웠으며 옥수수밭을 다니며 옥수수 자루를 따서 허기를 면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잣대는 사랑> 서문에서, 짐 포리스트, 분도출판사)
서른다섯 살의 도로시 데이는 ‘비를 피하려고 보호소에 있는 사람들, 일거리를 찾아보려고 길거리를 헤매는 사람들, 미래에 대한 희망도 없고 지금의 아픔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 <가톨릭일꾼> 신문을 발간했다. <가톨릭일꾼> 창간호는 뉴욕 15번가에 있는 셋방의 부엌, 지하철의 역내, 배의 대기실에서 계획되고 집필되고 편집되었다. 편집실도 없고 전화나 전기 따위에 드는 비용도 월급도 없다.
가난한 이들 속에서 발견한 아름다움
도로시 데이(Dorothy Day, 1897-1980)는 무신론자의 집안에서 자랐으나 종교에 대한 매력에 사로잡혀 혼자서 성공회 성당에 다니곤 했다. 그러나 열광적으로 독서를 즐기던 도로시 데이는 고등학교 졸업반 때 급진적인 정치관에 눈을 떴다. 도로시는 좌익 계통의 책을 읽기 시작했고, 귀족가문 출신이면서 혁명가가 되었던 크로포트킨의 책을 좋아했다. 크로포트킨은 경쟁이 아닌 협동에 바탕을 둔 무정부주의를 주장했으며, 도로시의 생각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업톤 싱클에어의 소설 <정글>을 읽고 가난한 도시생활에 대하여 부끄러워 하지 않게 되었다.
도로시는 그때부터 호수 주변이나 ‘링컨 공원’의 잔디밭을 걷는 대신에 비참한 시카고의 빈민가를 오랫동안 거닐었다. 그 궁핍한 곳에서 도로시는 색다른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손바닥만한 꽃밭과 채소밭이 있었다. 왜소한 옥수수가 줄지어 달려 있기도 하고 토마토도 있었는데, 채소밭 주변은 보통 가지각색의 향기를 뿜어내는 전륜화로 둘러져 있었다.” 칙칙한 거리가 여러 냄새로 구원된 것 같았다. 도로시는 더 이상 주변 사람들처럼 가난한 사람들은 게으르기 때문이며, 가난은 오직 그 사람들 탓이라고 여기지는 않았다.
열다섯 살 때 그 사람들의 거리를 걸으며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때부터 나의 생활은 그 사람들과 연결이 되어 있었고 그 사람들의 이익이 나의 이익이 되었다. 나는 내 일생의 방향과 일을 얻게 되었다.” 한편 도로시는 더 이상 교회에 나가지 않게 되었다. 교회는 가난한 이들에게 친절할지언정 이들을 딛고 서서 부를 축적하는 부자들을 비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부자들에게는 웃음을 흘리고 아부했다. 누구도 겉옷을 벗어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는 것을 보지 못했다. 잔치를 열어 절름발이와 장님을 초대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혁명에서 신앙으로
대학시절 도로시는 기숙사에 머물면서도 여학생 클럽에 드나들지 않았다. 그녀가 자유롭게 대학을 다니고 있을 때 다른 한쪽에서는 가게나 공장에서 젊음을 바치고, 때가 되면 그런 공장에서 노예노릇하는 남자에게 시집가야 하는 처녀들이 있음을 항상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계의 노동자여, 뭉치자! 쇠사슬 외에 더 잃을 것이 없다.’라는 마르크스의 구호는 도로시에게 소시민(小市民)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과 하나가 되라고 요구하는 도전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생계를 위해 힘든 노동을 택했다. 숙식을 제공받는 대신에 빨래하고 다림질하고 아이를 돌보는 일을 계속했다.
그런 그녀에게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는 다시금 ‘종교’에 대한 믿음의 실마리를 제공해 주었다. 산업화로 인간성을 상실한 불구자, 장님, 폐결핵에 걸린 사람, 빚에 허덕이는 바싹 마른 피곤에 지친 농부, 치마꼬리와 뱃속에 있는 아이들의 무게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어머니 등 이런 모든 사람이 도로시를 부르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이렇게 부르짖었다. “사회질서를 바꾸려는 성인(聖人)들은 어디 있는가?”, “노예를 돕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노예제도를 없애려는 사람들은 어디에 있는가?” 그녀는 민중의 종교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영적 긴장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그녀가 졸업 후 여권운동에 동조하여 시위를 하다가 경찰 호송차량에 실려갈 때 서글픈 농장의 불빛을 차창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어쩐지 석양 속에서는 인생과 투쟁이 값싸 보여. 황량한 농촌을 보니 정치적인 권리가 아니라 나 자신의 영혼을 위해 싸워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드는구나…. 오늘은 나 자신이 너무나 자그맣고 외롭게 느껴져.” 도로시는 프란시스 톰슨의 ‘하늘의 사냥개’라는 시를 가장 좋아했다.
“나는 그분으로부터 도망을 쳤다. 밤낮으로
나는 그분으로부터 도망을 쳤다. 세월의 문 속으로
나는 그분으로부터 도망을 쳤다. 내 마음속의 미로 속으로….”
그리고 윌리엄 제임스의 수필을 읽다가 문득 “부를 축적하려는 이상 때문에 잘못되어 가는 것들을 바로잡으려면 종교적인 열정으로 가난을 다시 믿어야 한다.”는 주장에 감동받았다. 특별히 그녀는 딸 타말를 출산하게 되면서 가톨릭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아이를 낳고 나서 내가 자주 느낀 사랑과 기쁨의 홍수를 어느 인간도 받거나 가지고 있을 수 없었다. 예배하고 숭배하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가톨릭일꾼>의 탄생
1932년 도로시는 공산주의자들이 동원한 실직자들의 행진에 참여하면서 가톨릭 교회 안에서 왜 신앙과 사회적 양심이 통합되지 못하는지 안타까웠다. 이날 도로시는 눈물과 고통으로 특별한 기도를 올렸다. 동료인 노동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그녀가 가진 재주를 쓸 수 있는 방법이 생기게 해 달라고.
그녀에게 마침내 피터 모린이라는 이상주의자가 나타났다. 그는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성인(聖人)의 눈을 가져야 함을 역설했다. 피터 모린은 ‘혁명의 이론 없이 혁명이 일어날 수 없다.’라는 레닌의 말을 빌려서 희생자의 무덤 위에 세워지는 붉은 혁명이 아니라 평화적인 녹색 혁명을 부르짖었다. 이를 위해 가톨릭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과 ‘낡은 껍질 속에 새로운 사회를 건설함으로써’ 평화적으로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방법을 선전하는 급진적인 가톨릭 신문을 발행해야 한다고 했다. 도로시가 물었다. “그렇지만 어디서 돈을 구하지요?” 피터는 대답했다. “성인의 역사를 보면 자본은 기도를 통해서 얻어집니다. 하느님께서 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 보내주십니다. 인쇄비를 댈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가톨릭일꾼> 신문 창간호가 나왔다. 여기에 실린 피터의 글은 교회가 부에 매달리는 것에 항변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환금상들은 성전에서 내쫓으셨다. 그러나 오늘날 아무도 고리대금업자를 성전에서 쫓을 엄두를 내지 못한다. 고리대금업자들이 성전을 저당잡았기 때문이다.”
피터가 도로시에게 가르친 사상은 이상한 급진주의였다. 그는 공장에서 줄지어 서서 일하는 것은 감옥만큼이나 비인간적이라고 여겼다. 그러므로 <가톨릭일꾼>은 중앙집권적이 아닌 사회를 지지해야 한다. 강제가 아닌 협동하는 사회를, 공예가들과 장인들이 스스로 조그만 공장의 주인이 되는 사회를 꿈꾸는 것이다. 농경 공동체에서 학자와 노동자는 함께 땀을 흘리고 함께 생각하며 ‘노동자-학자 융합’을 발전시켜야 한다. 사실상 공산주의자나 자본주의자들이나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지평선의 공장 굴뚝을 바라보는 대부분의 도시 사람들은 쟁기질하거나 닭장을 돌보거나 새벽 6시에 젖을 짜거나 오밤중에 송아지를 받거나 가축을 돌보려고 휴일을 포기하는 것을 싫어한다.
이제 그리스도교적인 환대(歡待) 정신을 회복하여 모든 소외된 이들을 맞아들이고, 갇힌 이들을 방문하며, 굶주린 사람들을 먹이고, 집 없는 이들에게 방을 제공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래서 시작된 것이 ‘환대의 집’이었다. 이 집은 가난한 이와 병든 이, 고아 · 노인 · 여행자 · 순례자 그 밖의 곤궁한 사람들에게 열려 있었다. 이 집은 가난한 이들에게 따뜻한 안식처이면서 독서실과 직업훈련을 제공하고, 기도와 토론과 공부를 하는 곳이다.
15번가의 도로시의 집은 ‘환대의 집’의 씨앗이 되었다. 대문은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열려 있었다. 누구나 환영하며 항상 커피가 있었고, 있는 재료를 아무거나 넣고 끓이는 ‘잡탕찌개’가 항상 난로에서 끓고 있었다. 도로시는 기증된 것을 가끔 아낌없이 나눠주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어느날 멋쟁이 귀부인이 다이아몬드 반지를 도로시에게 주었는데, 그녀는 이것을 식사하러 오는 노파에게 주어버렸다. 그러자 어느 직원이 다이아몬드 반지를 금은방에 가져다 팔았으면 그 노파의 1년 집세를 내는 데 쓸 수 있었을 것이라며 투덜댔다. 도로시는 노파가 인격을 가진 인간이므로 반지를 마음대로 할 수 있으리라 말했다. 팔아서 1년치 방값을 낼 수도 있고, 바하마로 여행을 떠날 수도 있고, 멋쟁이 여자처럼 반지를 손가락에 끼고 다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도로시가 물었다. “하느님께서 부자들만 즐기라고 다이아몬드를 창조하셨다고 생각해요?”
그리스도적 평화주의
초대교회는 근본적으로 폭력과 전쟁을 반대했다. 로마의 대경기장에서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수천 명씩 죽어갔다. 군대에 가지 않겠다고 해서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도 있었다. 짧은 재판과정에서 성막시밀리아노는 로마 총독에게 말했다. “나는 이 세상의 군인이 되지 않겠소. 나는 그리스도의 군인이기 때문이오.” 그러나 콘스탄틴 대제 때부터 교회는 제국과 합세하여 변질되었다. 교황은 군대를 지휘하였고 성전(聖戰)을 선포하였다. 무기 없는 삶은 수도자들에게나 해당되는 일이 되었고, 일반 신자들은 나라에서 총을 잡으라면 자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하느님과 국가의 이름으로 수많은 전쟁이 일어나고 수많은 무고한 사람이 죽었다. 1936년, 스페인 내란이 일어났을 때 교회는 반공이고 친가톨릭이라면서 프랑코 장군의 파시스트 군대를 지지하였다. 이때에도 <가톨릭일꾼>은 교회의 입장을 비판하였다. 뒤이어 세계대전이 일어나 미국이 참전하게 되었을 때 뉴욕 교구의 스펠만 대주교 등을 비롯한 전쟁옹호론자들이 전쟁과 승리를 찬양할 때도 도로시는 이를 반대하였다.
전쟁이 끝났어도 도로시는 괴로웠다. 히틀러는 죽었지만 군국주의는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탄이 떨어졌을 때 트루먼 대통령이 ‘기쁨에 가득찼다.’는 이야기를 듣고 도로시는 이 전쟁의 진정한 승리자는 연합군이 아니라 인류를 대량으로 죽일 수 있는 무기의 승리임을 밝혔다. 더구나 이 도시는 가톨릭 신자들이 가장 많이 사는 곳이기도 했다. 도로시는 대통령의 이름을 생각했다. ‘참된 인간(true man)’ 이 얼마나 이상한 이름인가.
“우리는 그리스도를 참된 인간, 참된 하느님이라고 부른다. 트루먼은 파괴를 보고 기뻐하였다니 이 시대의 참된 인간인지는 모르지만, 하느님의 아들도 아니고 그리스도의 형제도 아니며, 일본 사람들의 친구는 더더욱 아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화산재처럼 공중분해된 사람들과 아우슈비츠의 소각장에서 연기로 변한 사람들의 재가 5대양에 부는 바람과 함께 흩어졌을 것이다. 우리는 그 사람들의 재를 들이마시게 될지도 모른다. 그 재는 안개 속으로 다니면서 우리 얼굴을 스치고 언덕 위에 쏟아지는 비에 섞여 우리 몸에 흘러내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핵무기를 실험하기 전에 과학자들이 테네시주의 한 성당에서 기도를 했다는 기사는 도로시를 경악시키기에 충분했다. ‘참된 인간이신 그분은 파괴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기’ 때문이다.
머리카락으로 그분의 발을 닦아드렸다
“이 향유를 팔았더면 삼백 데나리온은 받았을 것이고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었을 터인데 이게 무슨 짓인가?”(요한 12,5) 요한복음서에 의하면 유다는 제자단의 돈주머니는 관리하면서 언제나 제 맘대로 꺼내 쓰던 도둑 심보를 가졌기 때문에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다를 도둑이라고 말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 예수님을 나중에 밀고했던 유다에 대한 요한복음사가의 견견이나 애증(愛憎)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유다가 무척 현실적인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그는 예수님이 새로운 나라의 왕(그리스도)이 되실 것으로 믿었다. 그래서 그분과 더불어 유다 민족을 로마의 식민지에서 해방시키고자 했다. 그는 예수님의 운명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 눈앞에,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에 대한 사랑과 존경보다는 대의(大義)가 중요했다. 혁명과업이 더 중요했다. 더 많은 빵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나눠준다는 것은 좋은 일이고 마땅히 권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사람보다 일을 중심에 두는 삶은 결국 그 일마저 그르칠 위험이 있다.
빵을 나누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 빵을 통하여 굶주린 이들이 인간성을 회복하고, 타인과 형제 관계를 맺는 게 더 중요하다. 예수님께서 “사람은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하신 것은 결코 빵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에 주목하라는 권고일 것이다. 인간에 대한 연민에 근거한 자선과 일만이 사람들에게 미래를 보증한다. 권력과 재산에 대한 욕구가 그대로 남아 있는 사람이 더 많은 권력을 요구하다가 그 권력을 쥐게 되면 마찬가지로 폭군이 되기 쉽다.
마리아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는 분에게 가장 값진 향유(香油)를 선물하고 싶었을 것이다. 쓸 데 안쓰고 푼푼이 아껴 모은 돈으로 샀을 향유를 ‘낭비’라고 나무라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한번도 진짜 사랑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일 것이다. 그 사랑을 예수님은 넉넉히 받아들이신다. 더구나 마리아는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제 머리카락으로 그분의 발을 닦아드렸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을 본 적이 있는가? 이러한 인간적 관계야말로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에라도 영원히 유지될 신앙을 낳는다. 죽음을 무릅쓸 용기가 생겨나게 한다. 그래서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지만 나는 언제나 함께 있지는 않을 것이다.” 가장 영적인 사람이 가장 깊이, 가장 멀리 지치지 않는 자비를 베풀 수 있다.
마무리 기도
밤낮으로 당신에게서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황폐한 세월 속으로
내 마음의 미로 속으로
꽁꽁 숨어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당신이 나를 발견하시고
내가 당신께 매료된다면
난 정말 어쩌지 못할 것 같아요.
당신을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아요.
그래서 나는 사랑이 무섭습니다.
그 사랑이 깊어
나를 잃어버리지 않을까,
내 생각과 내 지능과 내 식욕과
내 색깔을 일어버리지 않을까.
그래도 내가 피할 곳 없으면
자유로, 자유이신, 자유의 하느님께
내 영혼 맡길 밖에요.
이제 나는 당신 거예요,
그렇게 기도하면 안 될까요, 하느님.
이리 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느님.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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