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
-고정희
너에게로 가는
그리움의 전깃줄에
나는
감
전
되
었
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우리는 낮 동안에 해야 한다. 이제 밤이 올 터인데 그때에는 아무도 일하지 못한다.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땅에 침을 뱉고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그 사람의 눈에 바르신 다음,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 하고 그에게 이르셨다. ‘실로암’은 ‘파견된 이’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그가 가서 씻고 앞을 보게 되어 돌아왔다.(요한 9,1-7)
진흙을 이겨 소경의 눈에 발라주다
예수님이 태생(胎生) 소경의 눈을 뜨게 해주셨다. 예수님이 하신 일은 땅에 침을 뱉어 흙을 개어 소경의 눈에 발라준 것뿐이었다. 그러고는 소경에게 실로암 연못에 가서 얼굴을 씻으라고 일러주셨다. 때는 공교롭게도 안식일이었다. 이것이 화근(禍根)이 되어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를 공격할 빌미가 되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의 책동에 전혀 마음 쓰지 않고 행동하셨다. 왜냐하면 예수님에게는 당신 사명을 다하는 것이 첫째가는 관건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사명에 비추어 볼 때는 시시한 시비거리였던 것이다. “우리는 해가 있는 동안에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해야 한다. 이제 밤이 올 터인데 그때는 아무도 일을 할 수가 없다.”(요한 9,4)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소경이 육신의 눈만 뜬 것이 아니라 마음의 눈도 열리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소동이 일어났다. 예수님께서 소경의 눈을 뜨게 했다는 소문이 저자거리에 퍼져나가고, 이제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이 더 늘어날 게 뻔한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설치고 다닌다면 가뜩이나 위축된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위신이 끈 떨어진 갓 신세가 될 게 뻔하였다. 그 동안 서민들의 정신적 스승임을 자부하고 인사받는 재미로 한평생 살아왔건만, 너무 강력한 라이벌이 등장하여 신세가 처량하게 될 법도 하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거듭거듭 눈뜬 소경에게 되묻는다. “이 사람이 틀림없이 날 때부터 눈멀었던 자인가. 그가 어떻게 해서 당신 눈을 뜨게 했단 말이오?” 그래서 사사건건 예수님을 흠잡을 꼬투리를 잡느라고 안달을 부렸다. “그가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으로 보아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오.”(9,16)라고 율법 조항 나부랭이를 들어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할 수 없노라고 우겨댔다. 정말 허약한 이유가 아닐 수 없다. 그따위 말로 평생 소경으로 살아오다 이제사 눈을 뜨게 된 사람을 설득시키려는 것은 허사였다.
눈먼 자가 눈뜬 자를 가르쳤다
눈멀었던 사람은 예수님을 ‘예언자’(9,17)로 믿었다. 그리고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자꾸 캐묻자, “당신들도 그분의 제자가 되고 싶습니까?”(9,27)라고 질문하여 바리사이파들의 분통을 터뜨렸다. 그들은 마구 욕설을 퍼부으며 “너는 그자의 제자이지만, 우리는 모세의 제자이다.”(9,28)라고 했다.
그러나 눈멀었던 이는 “하느님께서는 죄인의 청은 안 들어주시지만, 하느님을 공경하고 그 뜻을 실행하는 사람의 청은 들어주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의 눈을 뜨게 하여 준 이가 있다는 말을 일찍이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9,31-32)하고 예수님을 변호해 주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언제나 자신을 상전(上典)으로 모셨던 소경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이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더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인지 “너는 죄를 뒤집어쓰고 태어난 주제에 우리를 훈계하려고 드느냐?”(9,34)하며 그를 회당 밖으로 내쫓아 버렸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한사코 마음의 눈을 열지 않았다. 자신들은 모세의 적자(適者)로 율법에 따라 살면서 하느님을 공경하는 가장 깨끗하고 그르침이 없는 영혼이라고 생각했다. 이 얄팍하고도 오만한 생각이 복음에 눈멀게 만들었다. 불쌍한 영혼이다. 시시한 허세 때문에 미래를 막아버렸다. 회당에서 쫓겨난 눈멀었던 자는 예수님을 직접 뵙고 “선생님, 믿습니다.”(9,36)하고 고백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분과 다정한 대화를 나누었다. 하느님 나라는 이렇게 오늘여기서 이루어졌다. 예수님의 말씀이다.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은 보는 사람과 못 보는 사람을 가려,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못 보게 하려는 것이다.”(9,39)
모세 율법의 전수자라는 백태(白苔)가 끼어 있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여전히 정신 못 차린다. “그러면 우리들도 눈이 멀었단 말이오?”(9,40) 어이없고 무례한 이 질문에 예수님은 아마도 할말을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한마디를 적선해 주셨다. “너희가 차라리 눈먼 사람이라면 오히려 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지금 눈이 잘 보인다고 하니 너희는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9,41)
실로암, 파견된 자
권세와 재물 때문에 눈뜬 장님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마음의 눈이 열린 사람은 부담스러운 희망이다. 걸림돌이며 축복이다. 저주이면서 은총이다. 어두운 터널을 지나 굴 밖으로 나왔을 때의 눈부심, 이 눈부심에 익숙해지면 열리는 대명천지(大明天地)의 새로운 세상을 맛본 이의 입에서 노래가 절로 나오지 않을 까닭이 있는가. 이 노래를 부르라고 파견된 자가 곧 사도이며, 선교사이며 하느님의 자녀들이다. 남들은 이를 두고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른다. 눈먼 소경이 얼굴을 씻고 새 얼굴, 새 눈망울을 갖게 된 자리가 실로암 연못이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실로암이란 ‘파견된 자’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소경의 어둠에서 심안(心眼)이 열려 방랑 설교자가 된 성인이 있다. 그 이전과 그 이후의 삶은 전혀 서로를 닮지 않았다.
프란치스코야, 내 교회를 수리하거라
성프란치스코(St. Francis 1182-1226)는 아시시의 거상(巨商) 아들로 태어났지만 한순간에 복음에 눈을 뜨게 되어 방랑 설교자로 살았더 희대(稀代)의 성인이다. 그는 긍정적 사랑의 노래를 즐겨 부르고, 아시시와 그 이웃 사이에 끊임없이 벌어지던 크고 작은 전쟁에 뛰어들어 싸움을 즐기던 쾌활한 젊은이였다. 그는 야심만만했으며 명성과 명예를 꿈꾸었다. 페루지와의 전쟁에 참여하고 난 뒤에도 프란치스코는 ‘칼로써 세속적 영광을 획득한다.’는 생각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1200년에서 1202년 사이 시실리섬에서 행해졌던 교황의 군대와 독일 군대와이 전쟁에 자원병으로 출전하였다. 그러다가 한 전투에서 생포‧투옥되어 병에 걸리게 된다. 이를 기회로 그의 마음은 좀더 진지한 문제에 쏠리게 되었다.
1206년의 어느날 그는 아시시의 교외에 있는 성다미아노 성당에서 기도를 하다가 제단 위에 그려진 십자가상으로부터 하느님의 계시를 들었다. “프란치스코야, 가서 내 교회를 수리하거라.” 그는 이를 곧이곧대로 실천했다. 그는 아버지의 가게로 돌아가서 가장 좋은 옷감을 한짐 싸서는 그것을 그의 아버지가 소유한 것 가운데 가장 좋은 말에 싣고 장터로 갔다. 그는 옷감과 말을 팔아 상당한 액수의 돈을 성다미아노 성당의 사제에게 가져갔다. 이 불쌍한 신부는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난 뒤에 너무나 두려운 마음이 되어 돈을 받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돈을 넣은 항아리를 창턱에 놓아둔채 떠났다.
프란치스코의 아버지 피에트로 베르나르도네는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아들의 ‘도둑질’에 관해 알게 되었다. 그는 격렬히 화를 냈다. 그는 프란치스코를 아시시의 치안 판사 앞에 세우기로 결정했다. 프란치스코는 자신이 종교에 헌신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주교가 아닌 세속적 권위에 굴복할 수 없다고 선언하면서 소환에 불응했다. 그래서 주교 구이도가 아시시의 성당에서 프란치스코의 재판을 주재하게 되었다. 재판이 열리는 날 프란치스코는 당당하게 나타났다. 주교로부터 아버지에게 돈을 되돌려 주라는 충고를 들었을 때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돈만이 아니라 제가 걸치고 있는 옷도 모두 기꺼이 돌려드리겠습니다.”
이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프란치스코는 입고 있던 옷을 홀랑 벗어버리고, 완전히 벌거숭이가 되어 옷을 주교 앞에 갖다 놓았다. 모두가 난처하고 황망할 따름이었다. 이러한 행동은 용기 이상의 것을 필요로 했다. 이것은 성당 한가운데서 자신의 벌거벗은 몸으로 부와 권위에 도전하는 비상한 행동이었으며, 가난하고 억압받는 자들을 대신하여 이루어진 행동 앞에서 세속적 정의(正義)가 얼마나 보잘것없은 것인가를 선언하는 것이었다. 바리사이파 같은 사람들이 들어설 자리는 아예 없었다.
생명 가진 모든 것에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라
그후 그는 황폐해진 교회를 손질하며 방랑생활을 계속했지만 아직 분명하게 자기 사명을 깨달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던 한 사제가 마태오 복음 한 구절을 읽는 소리에 귀가 번쩍 띄었다. “하늘나라가 다가왔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전을 넣어가지고 다니지 말 것이며, 식량 자루나 여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도 가지고 다니지 말아라. 일하는 사람은 자기 먹을 것을 얻을 자격이 있다.” 그는 무릎을 쳤다. “바로 이거다. 이 일을 온 마음으로 하겠다.”
그때부터 프란치스코는 회개와 사도적 생활의 덕을 설교하며 방랑하기 시작했다. 매일매일 노동으로 생계 유지에 필요한 만큼의 음식만 얻었다. 일거리가 없으면 시주(施主)를 받았다. 그는 돈을 가지고 다니지 않았으며 그날그날 필요한 정도 외에는 음식을 받지 않았다. 프란치스코는 쾌활하고 소박하며, 다른 사람의 불행을 온 마음으로 동정하는 매우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사랑하였고 그에게 감화되었다. 그는 곧 약간의 추종자를 거느리게 되었고, 그들에게 간단한 몇 가지 계율을 정해주었다. 이 계율이 수도원의 통상적인 계율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절대적인 청빈’을 강조한 데 있었다. 수도승들은 언제나 개인적인 청빈을 서약했지만 수도원은 아주 부유해질 수 있었다.
프란치스코는 제 무리들에게 개인으로나 공동으로나 어떤 종류의 재산이든 소유하지 못하게 했다. 그들은 노동을 하거나 구걸해서 살아야 했다. 그들은 돈을 가지거나 심지어는 돈에 손을 대는 것조차 금지되었다. 이런 탁발승들은 속세를 떠나 수도원에 은둔하는 것이 아니라 떠돌아다니며 가난한 자를 돕고 설교를 하면서 세상 속에서 살아가도록 되어 있었다. 프란치스코는 특히 나병 환자를 보살피는데 헌신했다.
한편 그는 모든 형태의 자연, 새, 동물, 달, 해 그리고 바람 등에 대해 보기 드물 정도로 애정을 느꼈다. 야수에 대한 그의 사랑과 이를 길들이는 능력에 관한 많은 일화가 생긴 것은 이 때문이다. 이는 세상과 인간과 사물을 바라보는 프란치스코의 관점이 다른 사람들과 전혀 달랐다는 것을 뜻한다. 그 당시 교회 안팎에는 자연 피조물이 사악하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는 감정적 차원에서 이런 생각이 그릇된 교리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는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러한 믿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을 만큼 자비로운 마음과 말재간을 갖고 있었다. 이는 모든 피조물에게 창조자이신 하느님을 찬미하고 권하는 「태양의 찬가」를 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만만치 않은 현실주의
프란치스코는 조직과 계율을 싫어했는데 그것이 복음적 활력을 빼앗아 가기 때문이다. 단지 하루하루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다. 그래서 그가 짜 맞춘 계율은 복음 선교의 의무와 청빈의 덕을 강조한 성서 구절을 모아놓은 데 불과했다. 이를 두고 1210년 프란치스코가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계율 인가(認可)를 청하자 교황은 곤혹스러웠다. 왜 프란치스코는 기존의 수도원 교단에 편입해 들어갈 수 없는가. 그러나 논리상 예수 그리스도의 생활 방식대로 살게 해 달라는 이 요청을 거절할 명분도 딱히 없었다. 결국 교황은 이 누더기를 걸친 설교자의 요청에 구두(口頭)로 계율을 인가해 주었다.
그러나 1226년 프란치스코가 죽은 뒤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변화가 일어났다. 1230년, 탁발승의 후견인들은 각 지역에서 교단을 대신하여 재산을 소유하고 돈을 기증받을 수 있다는 교황칙서가 발표되었다. 각 지역의 프란치스코회 장상들은 ‘필요한 경우’ 후견인들에게 자금을 요청할 수 있게 되었다. 1245년의 교황칙서는 이 규정의 ‘필요한 경우’란 말을 ‘형편에 따라’로 바꾸었다. 이 칙서는 또한 교단이 점유하고 있는 모든 건물의 법적 소유권을 교황에게 귀속시켰다.
이렇게 됨으로써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재산을 소유하게 되었으며, 한 지역에 수도원을 짓고 정착생활을 하게 되었으며 신학을 공부한 사제가 생겨났다. 결국 프란치스코 정신은 제도화에 굴복하였으며, 성프란치스코의 영혼은 죽어서 더욱 외로웠다. 그러나 한번 눈뜬 영혼의 설교는 이후 눈먼 교회를 변화시키는 개혁운동에서 언제든지 영감(靈感)을 주었다.
마무리 기도
흙을 개어주소서, 주님.
당신 침도 듬뿍 뱉어 이겨진 흙으로
내 눈에 내 얼굴에 발라주소서.
그래야 내 영혼이 내 숨결이
맑아지고 따듯해 질 수 있다면
주님, 제가 진흙탕이라도
끌어안고 뒹굴게 하소서.
내 눈이 열려
어느날 갑자기 문득
낯선 세상 낯설지 않게 보고
눈 익은 세상
낯설게 보는 눈 키워가게 하소서.
아귀 같던 내 마음을 헌 신처럼 버려두고
엑세서리 끼운 옷도 훌훌 벗어두고
알몸으로 온 마음으로 당신만을
따라 걷을 맘
이제사 솟구치게 만드소서, 그래야
내가 당신 닮으오리다.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느님.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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