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일꾼> 신문을 피터 모린과 함께 창립하면서 도로시 데이는 하느님이 원하시는 한 가지 사명을 창립하였다. 첫 번째 창간호는 타자를 치고 인쇄기로 찍어서 나왔는데, 2500부를 만들었고 57달러가 들었다. 첫번 호는 그가 후에 말했듯이 “<네이션>지의 크기와 같은 8쪽짜리 작은 신문”이었다. 기부금은 두 명의 사제, 한 명의 수녀 그리고 두 창립자 중의 한사람 (피터 모린은 전혀 돈이 없었다)으로부터 모여졌다. 사무실도, 직원도, 발송자 명단도, 판매전략도 전혀 없었다. 다만 동료인간들에게 그들의 갈망을 전하고 싶은 두 가톨릭인의 바램만 있었을 뿐이었다.
수천 명의 가톨릭인들, 비가톨릭인들도 <가톨릭 일꾼>에 응답하였다. 신문과 공동체적이고 평등주의, 인민주의적이며 그리스도교적인 목소리가 깊은 절망 속에 있는 미국에 울려 퍼졌다. 처음에 제도로서의 교회는 가톨릭일꾼운동에 아무런 반대도 실제로 표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런 운동을 결국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응답하는 평신도의 노력쯤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937년, 1938년경,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점차 부상하고 있을 때 스페인은 수백만의 가톨릭인들에게 거룩한 십자군전쟁처럼 되어버린 끔찍한 내란으로 찢기고 있었다. 프랑코는 교회 입장에서 그 당시 지칭했던 것처럼 “붉은 공산주의 러시아”를 대리하는 구세주로 여겨졌다. 도로시 데이가 스페인 내란에 대해 취한 태도는 수많은 가톨릭 독자들과 교회 성직자들 사이에 강한 반발을 일으켰다. “무력의 사용에 대하여”라는 그의 사설이 1938년 10월호에 실렸는데 도로시 데이의 입장을 분명하게 밝힌 글이었다. “우리는 프랑코의 승리를 위하여 기도하지 않는다”고 그는 선포하였다. 그러나 또한 동시에 “공화파를 위해서도 기도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했다. 그는 반프랑코파의 몇몇 “지도자들”이 실제로 “종교를 파괴시키려한다”고 주장했다.
오히려 가톨릭일꾼운동 가족들은 “스페인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며, 그들 모두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형제들이며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고, 그리스도의 신비체의 구성원들이며 잠재적인 구성원들”이라고 말했다. 이미 1936년 초에 <가톨릭일꾼> 신문은 독자들에게 “스페인을 잘 관찰하고 스페인의 파시스트들이 공산주의의 박해에 대항하여 교회를 위해 싸우고 있다고해서 파시즘을 좋은 것”이라고 보지 말도록 엄숙하게 경고하면서 “최근에 독일에서 일어난 일들을 보며 교회가 파시즘으로부터 얼마나 사랑을 기대할 수 있는지 또 다른 시각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도로시 데이에게 스페인 내란은 긴 고문과 같았으며, 교회에 대한 그의 충실성이 가슴 아프게 갈라지는 경험이었다. 도로시 데이는 일찍부터 스탈린주의의 반동적인 속성을 그리고 살인적인 측면을 간파하였다. 또한 프랑코도 가난한 이들을 거의 돌보지 않는 파시스트로 보았다. 비록 공화파의 적의에 찬 반성직주의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는 스페인의 노동자들로 구성된 노동조합의 주장에 대해서는 늘 충실한 태도를 견지하였다.
그는 조지 오웰이나 시몬 베유가 했던 것처럼 소위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그룹들의 불성실함이나 조작적인 잔인함에 대해서, 오만한 웅변과 수사들을 끊임없이 과시하는 그룹들에 대해 배우기 위하여 스페인에 갈 필요가 없었다. 그는 개인적으로 좌익들이 다른 어떤 일이나 사람들에게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거짓말과 비열함으로 처신하는 것을 보아왔었다. 그러나 그는 프랑코에 대해서도 어떤 환상을 갖고 있지 않았다. 프랑코가 어떤 사람들과 동맹하는가에 대해서도 의심의 여지를 갖지 않았다.
프랑코는 막강한 지주들과 동맹했는데, 이런 사람들은 무너져 가는 나라의 농업, 농민들의 비참한 실상에 전혀 무관심한 사람들이었다. 또한 프랑코는 조직되어가는 노동운동, 조합운동을 파괴시키려는 기업가들과 한 통속이었고, 그에 못지 않지 않게 교회 역시 도덕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귀족들과 너무나 친하게 지내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1970년대에 와서도 데이는 스페인 내란을 회상하고 그것이 스페인뿐만 아니라 뉴욕에 사는 자신과 가톨릭일꾼운동의 동료들에게 미친 중대한 영향을 생각하면서 슬퍼했고 고통스러워했다:
그 때는 우리가 겪었던 가장 최악의 시기들 중의 하나였습니다. 우리는 가톨릭이었습니다(우리는 지금도 가톨릭인입니다!). 교회는 한 편에 있었고 사제들과 수녀들에 대한 잔학한 폭력들이 일어났습니다. 내 급진적인 친구들 모두가 공화파였습니다. 나는 왜 공화파들이 노동자들, 가난한 사람들, 농민들을 위해 싸우고 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프랑코쪽의 사람들은 애국주의자들이었고 귀족과 부유한 사람들편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도 이편에 있었지요. 나는 20세기의 스페인교회에 대해 알지 못했습니다. 내가 아는 것이라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와 십자가의 성 요한에 대한 책을 읽으면서 파악한 것이 전부입니다.
나는 스페인교회가 굶주리는 사람들 그리고 정당한 임금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도시의 다수 노동자들을 위한 교회가 아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피터는 이 상황에 무척 충격을 받았고 우리 모두가 그랬습니다. 우리는 공화파들이 그들의 신앙과 행동에 있어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우리들이 진심으로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현실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당신은 우리가 어떻게 다른 현실을 알았는지 알고 싶지요. 설명하겠습니다. 나는 스페인에 공화파를 위해서 자원하여 간 사람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공화파로서 애국파에 반대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친구들은 오웰과 시몬 베유가 본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베르나노스가 애국파에서 본 것을 본 것입니다.
그들은 돌아와서 우리에게 말했습니다. 이 친구들은 공화파가 교회 건물이나 그들에게 설교했던 성직자들에게 한일에 대해 놀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무신론자들이었으며, 만일 그들에게 어떤 종교적인 정신이 있었다면 다른 우선 순위들을 취했을 것입니다.
양측에서 모두 나쁜 일들을 저질렀다고 말해주는 한 친구를 기억합니다. 그러나 그는 어떤 쪽이 옳은 쪽인지 알았고 양쪽에는 늘 나쁜점이 있게 마련이라고 계속 말했습니다. 나는 그가 가톨릭 교회에 일어나고 있는 일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아마 그는 교회가 공격을 받아서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건 반동적인 태도입니다.
그는 사람을 죽이는 것, 수녀와 신부 그리고 열심한 가톨릭인들이 교회에서 나올 때 죽이는 것을 절대로 옹호하지 않았겠지만, 어떤 편을 들고 있었고 계속 나 자신에게 “우리는 편을 선택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아니야’ 나는 계속 나 자신에게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택하는 편은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편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것은 이 세계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메시지로 우리가 택해야 할 것이 우리 주님의 말씀과 그분의 모범이라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내 친구들이 스페인의 가톨릭 교회가 파시스트이고 파시스트 동맹에 가담했고 부패했으며 가장 나쁜 것이 보호막이고 스페인에서 가장 착취적인 요소들이라고 계속 말했을 때 나는 동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옳은 말임을 나는 알았습니다.
실제로, 스페인 내란이 시작되기 훨씬 전에 이 나라에는 보통의 노동자들과 가난한 이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가에 대해 그리고 교회가 이들에게 어떤 의미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아무런 관심을 표현하지 않은 가톨릭 주교들과 사제들과 수녀들이 있었습니다.
나의 급진적인 친구들이 거리에서 나를 멈추게 하고 내가 스페인의 파시스트파에 동의서명을 하러 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난 그들에게 우리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말하는 독립적인 인간존재가 되려고 노력한다는 사실을 같은 소수의 사람들이 믿어주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항상 우리 같은 가톨릭인들이 독립적으로 생각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신한다고 조급하게 말합니다. 우리 가톨릭인들은 무엇을 생각해야 할지 다 정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순종하든가 하지 말든가 할 뿐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믿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어처구니없을 때도 종종 있습니다.
우리는 스페인 내란 시기에 수많은 독자들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절대로 다시 우리신문의 독자가 되지 않았습니다. 대공황의 가장 최악의 시기에 우리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이 없는 공산주의’가 러시아에서 스페인으로 수출되는 정책에 관련된 모든 것을 우리가 지지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은 다른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나는 스탈린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알고 있으며, 러시아인들이 스페인에서 하고 있는 일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하고있는 일을 좋아하지 않는 것만큼이나 그것을 거부했습니다.
또한 프랑코를 좋아하지 않으며 수많은 교회 사람들이 스페인과 이곳에서 그에게 환호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나는 이런식으로, 즉 좋아하지 않는다든가 혐오한다는 식으로 표현하지 말아야 합니다. 당신은 우리들의 언어가 우리의 위험에 대해서, 우리의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위험에 대해 어떻게 말해주는지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가톨릭 일꾼>에 우리 독자들이 해야하는 기도를 게재 하였습니다. 그 내란에서 싸우고 있는 모든 사람들, 그리고 거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살해에 묶인이들을 위한 기도, 이어지는 학살, 복수에 따르는 또다른 복수; 모든 세상, 그 비참한 전쟁을 보고있고 편을 들며, 한 그룹의 살인자들을 옹호하고 또 다른 그룹의 살인자들에 대해서 소리치고 있는 모든 세상을 위한 기도를 실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상처를 받으신다면 바로 그런 상황에서입니다.
나는 늘상 사람들로부터 수많은 비난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미쳤다고, 아니 그보다 더 최악이라고 말하는 신부들과 수녀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입장을 고수하였고 우정과 감사의 편지도 몇 통 받았습니다. 그리고 아주 적은 수의 신부들과 수녀들이 우리와 함께 같은 입장을 취했습니다. 나는 아직도 그들을 기억하고 그들이 한 말을 생각합니다. 우리가 그 어떤 우정어린 웃음과 끄덕임이라도 필요로 하고 발견할 수 있을까 괴로워했던 때에 그들이 우리에게 주었던 힘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원출처] <Dorothy Day, a Radical Devotion>, Robert Coles, 1987
[번역문 출처] <도로시 데이, 뿌리로부터 온전히 살다>(<참사람되어>2002, 7월호)
로버트 콜스(Robert Coles)
하버드 의과대학의 정신의학과 및 사회윤리학과 명예교수. 청소년 문제 상담 전문가로 활동해 왔으며, 50여 권이 넘는 책을 집필한 작가. 1973년 미국의 다양한 계층과 인종의 아이들을 직접 취재하고 분석한 <위기의 아이들>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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