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고통받는 사람은
-이성복
오래 고통받는 사람은 알 것이다
지는 해의 힘없는 햇빛 한 가닥에도
날카로운 풀잎이 땅에 처지는 것을그 살에 묻히는 소리없는 괴로움을
제 입술로 핥아주는 가녀린 풀잎오래 고통받는 사람은 알 것이다
그토록 피해다녔던 치욕이 뻑뻑한,
뻑뻑한 사랑이었음을소리없이 돌아온 부끄러운 이들의 손을 잡고
맞대인 이마에서 이는 따스한 불,오래 고통받는 이여
네 가슴의 얼마간을
나는 덥힐 수 있으리라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그리고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다.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자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라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생각났다.(요한 2,13-17)
로마가 놀란 위대한 성전
“아, 그 성전! 아그리파는 성전을 잘 보았다. 성전은 여인들의 뜰, 그 앞으로 이스라엘의 뜰이 있고 또 사제들의 뜰이 있는데, 그것들이 정결한 정도에 따라서 하나가 다른 하나 위에 펼쳐져 있었다. 금으로 덮인 성소의 지붕은 햇빛에 반짝였고, 넓은 주랑 현관 앞에는 그 유명한 장막이 드리워져 있는데, 그 장막은 히아신스로 수놓은 바빌론의 직물로 만든 것이며, 자주와 진홍색의 고운 세마였고 천체도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뒤 ‘성소’ 에는 일곱 촛대와 향 제단과 진설병이 놓여 있다. 맨 끝에 어둡고 조용한 방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지성소’ 이다. 거기에는 대제사장만이 오직 1년에 한 번씩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미셸 끌레브노, 한국신학연구소, 39쪽 참조) 로마 제국의 한 장수가 예루살렘 성전을 보고 이렇게 감탄했다.
이두매아 사람이었던 헤로데는 자신이 이방인 출신이라는 더러운 이름을 만회하기 위해 기원전 20-19년경부터 성전을 짓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기에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건축공사를 벌였다. 그러나 헤로데의 건축에 대한 열정 때문에 유다 백성들은 죽을 지경으로 착취당했다.
인구가 백만 명밖에 안 되는데, 헤로데는 수없이 많은 종류의 세금과 통행료, 양조세를 계산에 넣지 않더라도 한 해에 천만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천 달란트를 갈취하였다. (한 데나리온은 유다 서민의 하루 생활비였다.) 그는 거룩한 도시에 공연장과 타원형의 경기장, 그리고 도시 근교에 계단식 극장을 건축했다. 그리고 거룩한 법을 무시하면서 성전 정면에 독수리 금상을 세우기까지 했다.
예수에게 낯선 세계, 성전과 사제
로마와 결탁하여 정권을 잡은 헤로데가 증축한 이 성전에 문제가 발생했다. 성전 정화 사건이 그것이다. 과월절에 발생한 성전 정화 이야기는 요한복음서뿐 아니라 공관복음서에도 나온다(마르 11,15-18; 마태 21,12-17; 루가 19,45-50). 그러나 공관복음서에서는 과월절 사건이 예수님 생애의 마지막 부분에 단 한 번 나타나지만, 요한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이 세 번이나 과월절 순례를 하였으며, 그 중에서 성전 정화 사건은 처음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을 때 일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마르코복음서를 이미 알고 있었을 요한이 이렇게 성전 정화 사건은 앞에 놓은 것은 아마도 참된 예배를 중시하는 그의 신학적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에게는 사제와 성전 체제가 자주 출입하지 않던 낯선 세계였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강도를 당해 쓰러져 있던 사마리아 사람 앞을 사제로 하여금 멈추지 않고 그냥 지나가게 했다. 예수님이 여러 차례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고 전하는 요한복음서조차 그 당시 관례대로 예수님이 제사를 드리고 음복(飲福)을 했다거나 제사에 희생된 짐승의 고기를 먹었다는 말은 전혀 하고 있지 않다. 최후만찬 때도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빠스카의 어린양을 먹었다는 말은 전혀 없다.
그런 예수님이 제사드리는 장소인 성전에 직접적으로 도전하셨다. 예수님은 비둘기 장사꾼들을 성전 마당에서 내쫓고,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버리며 그 상을 ‘둘러엎으셨다.’ 게다가 밧줄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를 모조리 성전 뜰 밖으로 내쫓아 버렸다. 여기서 우리는 성전 장사꾼들이 지정된 자리, 곧 이방인들의 마당에서 합법적으로 장사를 하고 있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이들 장사꾼 덕분에 순례객들은 유혈제사를 드리는 데 필요한 제수용(祭需用) 짐승들을 현장에서 살 수가 있었다. 불법무도(不法無道)한 장사가 아닌 바에야 예수님이 이렇게까지 흥분하여 판을 깰 수 있는 노릇인가. 실제로 멀리서 온 순례객들에게는 도움이 될 법도 한데 말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유혈제사(流血祭祀) 자체를 반대하신 것이라고 생각할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아마도 예수님은 유명한 호세아의 예언을 기억해 냈을 것이다. “내가 반기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사랑이다.”(호세 6,6)
강도의 소굴에서 제사를
요한복음서가 쓰여졌을 로마 지배하의 헬라 지역에도 성전은 물론이고 제사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았다. 티아나의 아폴로니우스는 이렇게 말했다.
“만물을 초월하시는 위대한 신에게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제사를 드리지 말 것이다. 동물을 희생으로 바치지 않고 불도 켜지 않으며 아무 말 없이 그 무엇보다도 위력적인 로고스(말씀)만을 바치는 그 사람이야말로 그 위대한 신을 가장 합당하게 공경하는 것이며, 우리에게 있는 가장 고상한 것, 사유(이성)를 가지고 가장 고상한 그분께 간청하는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의 필론 역시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제사는 영신적 차원에 속한다.”라고 하면서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느님의 거처는 역시 눈으로 볼 수 없는 영혼이다.” 라고 했다.
한편 마르코 복음의 성전 정화 이야기에서는 “또 물건들을 나르느라고 성전 뜰을 질러 다니는 것도 금하셨다.”(11,16)라고 전한다. 여기서 물건이란 그리스어로 ‘그릇’을 뜻하는데 보통 제사에 사용되는 물품, 그러니까 제수(祭需)나 제기(祭器)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더이상 제사를 드리지 못하도록 철저히 훼방 놓으신 셈이다. 예수님이 보기에 이 성전은 시든 무화과나무에 지나지 않았다 (마르11,12-14. 20-26).
“돌들이 어느 하나도 제자리에 그대로 얹혀 있지 못하고” (13,2) 이 성전은 깡그리 파괴되고 말 것이었다. 어떻든 성전은 더이상 미래가 없다. 바로 성전의 핵심인 번제 바치는 제단이 돌이킬 수 없이 모욕을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더이상 성전에서 하느님을 만날 수 없다. 성전은 제국주의 로마와 결탁한 헤로데의 더러운 손으로 세워졌으며, 온갖 협잡과 장삿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강도의 소굴로 변해버렸다. 그래서 종교를 앞세워 상품을 팔아먹는 신앙은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렸다. 하느님 대신 우상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여기서 예레미야의 예언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너희의 생활태도를 깨끗이 고쳐라. 너희 사이에 억울한 일이 없도록 하여라. 유랑인과 고아와 과부를 억누르지 말라, 이곳에서 죄없는 사람을 죽여 피를 흘리지 말라. ··· 너희는 훔치고 죽이고 간음하고 위증하고 바알에게 분향하고 있다. 알지도 못하는 다른 신들을 따라가고 있다. 그리고 나의 이름으로 불리는 이 성전으로 찾아와 나의 앞에 나서서 살려주셔서 고맙다고 하고는 또 갖가지 역겨운 짓을 그대로 하고 있으니, 나의 이름으로 불리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둑의 소굴로 보이느냐? 너희가 하는 짓을 나는 이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예레 7,5-6. 9-11)
스스로 성전이 되신 인격
이를 두고 장사꾼들과 성전 사제들이 그냥 있을 리 없었다. “당신에게 이럴 권한이 있음을 증명해 보시오, 도대체 무슨 기적을 보여 주겠소?” 하고 예수께 대들었다. 예수께서는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요한 2,19) 하고 대답하셨다, 마태오복음에서는 “그때 예수께서는 성전 뜰 안에 있던 소경들과 절름발이들이 앞으로 나오자 그들을 모두 고쳐주셨다.”(마태 21,14) 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정작 요한복음서는 기적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다만 예수께서 ‘성전’이라 표현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것이라고 한다 (요한 2,21). 왜냐하면 예수님은 성전을 당신 인격 안에서 완성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이제 하느님은 예수님 안에서 완전한 모습으로 거처하시며,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을 만난다. 예수님의 몸은 죽어도 죽지 않고 사흘 만에 부활하실 영원한 생명이며, 파괴하여도 사흘 만에 다시 세울 하느님의 참된 성전이 된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당신 전당에의 열성에 나는 불타고, 남을 욕하는 자들의 그 욕이 내게 떨어지지 않았나이까?”(시편 68,10) 하신 시편을 떠올린 것은 당연하다. 그것은 자신의 열정을 불살라 스스로 성전이 되신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오로 사도는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느님을 향한 열정으로 스스로 성전이 되기를 바란다.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이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성령이 계시는 성전이라는 것을 모르십니까?”(1고린 6,19; 3,16 참조)
<마무리 기도>
바알과 몰록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시는 하느님,
권력과 황금으로 얼룩진 성전을 마다하시고
오로지 바람처럼 자유롭게
유랑하는 천막을
당신의 거처로 삼아
가장 낮은 사람에게로 가장 질박하게
하늘을 닮아 사는 이들에게 오시고
제사보다는 자비를 즐기시는 하느님,
상업주의의 밥상을 둘러엎으시고
교회를 사랑의 매로 정화하시는 주님,
탐욕과 경쟁, 이윤과 속임수로
무너진 성전을 당신 몸으로
사흘 만에 새롭게 건설하시는 당신,
우리도 당신처럼
온몸으로 성전이 되라고 도닥거려 주시는
다정하시며 강건하신 당신을
오늘 밤 다시 뵐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느님.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종이신문 <가톨릭일꾼>(무료) 정기구독 신청하기
http://www.catholicworker.kr/com/kd.htm
도로시데이영성센터-가톨릭일꾼 후원하기
https://v3.ngocms.co.kr/system/member_signup/join_option_select_03.html?id=hva820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