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가하는 새
-황 지 우
새는
자기의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
자기가 앉은 가지에
자기가 남긴 체중이 잠시 흔들릴 뿐
새는
자기가 앉은 자리에
자기의 투영이 없다.
새가 날아간 공기 속에도
새의 동체가 통과한 기척이 없다.
과거가 없는 탓일까.
새는 냄새나는
자기의 체취도 없다.
울어도 눈물 한 방울 없고
영영 빈 몸으로 빈털터리로 빈 몸뚱아리 하나로
그러나 막강한 풍속으로 거슬러 갈 줄 안다.
生後의 거센 바람 속으로
갈망하며 꿈꾸는 눈으로
바람 속 내일의 숲을 꿰뚫어 본다.
이튿날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기로 작정하셨다. 그때에 필립보를 만나시자 그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이르셨다. 필립보는 안드레아와 베드로의 고향인 벳사이다 출신이었다. 이 필립보가 나타나엘을 만나 말하였다.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 나타나엘은 필립보에게,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하였다. 그러자 필립보가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이 당신 쪽으로 오는 것을 보시고 그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하고 물으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러자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에게 이르셨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이어서 그에게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요한 1,43-51)
“그건 정말 기이한 만남이었다. 나는 그때 우리 집 대문 앞에 서있었다. 그때 길 건너쪽에 웬 소년 하나가 지나가고 있었다. 그는 머리를 꼿꼿이 세우고 맨발로 걸어가고 있었는데 그 발이 어찌나 가볍게 땅바닥을 스치고 지나갔던지 먼지라곤 거의 일지 않을 정도였다.
저 소년은 누군가? 분명 이 지방 사람은 아니었다. 나는 그를 쳐다 보았다. 그는 내 눈길을 느꼈는지 누군가가 자기를 부르기라도 한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때 그가 나를 보았다. 우리는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아이들이 그러하듯 서로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러나 우리는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그는 조용히 미소를 짓더니 상당히 무례한 행동을 했다. 내게 집게손가락을 구부려 보인 것이다. 오라는 뜻이었다. 이런 얼토당토않은 요구가 어디 있담!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나는 깨달았다. 그가 구부려 보인 집게손가락이 나를 향해 던진 낚싯바늘이었음을.
물고기는 미끼를 물었고 다시는 그 낚싯바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오늘까지도 물고기를 낚은 어부 역시 한번도 낚싯줄을 늦추지 않았다. 물고기는 그의 것이었다. 그 소년에 대한 생각은 내 마음 한가운데 자리를 잡았다.
그는 여느 사람들과는 달랐다. 그의 어디가 어떻게 눈에 띄었길래 내가 그를 잊지 않았을까? 그건 내가 마음속으로 백번도 넘게 던진 질문이었다. 내가 그 소년을 만난 그날부터 그리고 훨씬 후예도 나는 수없이 나 자신에게 그 이유를 묻곤 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는 누구였으며 그가 무엇을 지니고 있었기에 그와 한번 만난 사람은 그를 결코 잊지 못했는가?
사람들은 그를 사랑할 수도 있었고 미워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를 보고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그건 불가능했다. 그는 단지 거기 있을 뿐이었고 그는 다름아닌 그 자신이었다. 그리고 그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나의 이 사랑은 샘물에 비교될 수 있었다. 어떤 한순간에 터져나온 이 사랑은 끊임없이 땅속을 흐르면서 나의 삶의 방향을 결정했다. 그건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단단히 매인 끈과 같은 것이었다.” (루이제 린저의 「미리암」 중에서)
루이제 린저는 그의 소설 「미리암」에서 막달라 여자 마리아의 입을 빌려 예수님을 처음 만났던 때를 이렇게 기억시키고 있다. 예수님이 제자를 부르시는 데는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를 본 이는 그분에 대한 인상을 가슴에 아로새길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을 정도로 그분은 색다르고 강렬하면서 부드러웠다.
나는 보았다
요한복음서를 지은 이가 자신을 ‘사랑받던 제자’(요한 19,26)로 소개하고 있는 것은 요한 스스로 예수님을 사랑 덩어리로 체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서와 그의 제자 공동체에서 쓴 편지들 (요한 1·2·3서)에서 ‘사랑’이란 낱말을 빼어놓고는 어떤 문장도 성립하지 않는 것 같다. 이 모든 사랑은 ‘보는 것’ 에서 시작되며, ‘봄’으로써 완성된다.
제일 먼저 본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었다. “요한은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다시 그곳에 서 있다가 마침 예수께서 걸어가시는 것을 보고”(1,35-36a) 나서야 “하느님의 어린 양이 저기 가신다.” (1,36b) 라고 증언할 수 있었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가자 예수님이 이들을 “보시고”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 (1,38). 제자들이 거처를 알고 싶다고 여쭙자 예수님은 “와서 보라” (1,39) 고 하신다.
안드레아가 형 시몬을 데리고 가자 예수님은 그를 “눈여겨보시며”(1,42) 그에게 게파(베드로, 곧 바위라는 뜻)라는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신다. 예수님이 갈릴래아로 가시던 길목에서 만나 제자로 삼으신 필립보는 의심쩍어 하는 친구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면” (1,46) 알게 되리라고 권한다. 예수님은 나타나엘을 “보시고” (1,47) 그가 무화과나무 아래 서 있는 것을 “보았다” (1,48) 며 환대하시고 그야말로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말씀하신다. 깜짝 놀란 나타나엘이 예수께 선생님이야말로 이스라엘의 왕이시라고 고백하자 예수님은 이제 더 놀라운 일을 “보게 될 것” (1,50) 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본다고 무조건 믿거나 본다고 새로운 영물(靈物)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먼저 보는 눈이 새로워야 한다. 익숙한 것도 낯설게 보려고 해야 한다. ‘가난 구제는 나라도 못 한다.’는 말이 있듯이,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기에 그저 그렇게 있을 법하고 있을 수 있는 거리 풍경의 하나로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오늘 내가 만난 거지조차도 낯설게 보고, 아직도 헐벗고 한몸 누일 공간이 없는 사람이 있음에 놀라고, 아직 세상이 안녕하지 못함을 안타까워할 눈이 있어야 한다. 짜장면 집에서 젓가락을 들기 전에 성호부터 긋는 내 습관을 낯설게 바라보며, ‘아참! 나는 천주교 신자였군!’ 하며 놀라고, 정말 예수님처럼 살고 있는지 거듭 살피는 게 새로운 눈을 얻는 길이다.
새로운 관계를 여는 낯선 만남
누구나 예수님을 알아보는 것은 아니다. 세례자 요한에게 새로운 안목이 없었다면, 주변 사람들을 낯설게 보는 눈이 없었다면 그는 멀찌감치 걸어가던 예수님을 보지도 못했겠지만, 더군다나 그가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단지 수많은 행인 중 하나였을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이 낯설게 보았던 사건이 다른 제자들에게 예수께로 가는 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 양으로 보았기에 다른 제자들도 메시아로 알아볼 눈을 얻게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나타나엘을 낯설게 보는 눈을 가졌기에 나타나엘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길을 걷다가 만나게 되는 사람이 어디 한둘이며, 사람들이 무화과나무 아래에만 서 있었겠는가. 집에서 하품하며 창턱을 괴고 앉은 사내, 빨래 널다가 힐끗힐끗 쳐다보는 아낙네, 물 긷는 처자, 동네 강아지까지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유독 무화과나무 아래 있던 한 청년을 기억하고 있었으며, 그 인연으로 나타나엘은 예수께 매력을 느꼈다. 예수님은 그를 새로운 이스라엘의 진짜배기 백성으로 알아보았고, 나타나엘은 예수님을 진짜배기 메시아로 알아챈 것이다.
이런 안목은 하느님에게서 나온다. 바꾸어 말하면 하느님께 마음이 열려 있는 자만이 이런 혜안(慧眼)을 얻을 수 있다. 다른 사람들처럼 나타나엘도 “나자렛에서 무슨 신통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 (1,46) 하고 투덜거리며 필립보를 따라왔지만 그는 “거짓이 조금도 없는” (1,47) 사람이었기에 (나타나엘은 ‘하느님께서 주신다’ 라는 뜻), 예수님을 직접 보고는 진실을 속일 수 없었다. 그는 예수님이 낯선 분임을 알았다. 평범한 ‘요셉의 아들’ 이상임을 느낄 수 있었다.
하느님께 경건한 이는 하느님의 사람을 알아본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예수님조차 낯설게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마치 가장 가까이 언제나 늘 곁에 있는 아내와 남편, 그리고 자녀들의 귀중함을 일상 속에서는 너무나 익숙해서 깨닫지 못하고 넘어가는 것과 같다. 외국에 나가면 애국자가 되듯이, 여행을 다녀보면 가족이 소중해지듯이 예수님을 낯설게 봐야 그분이 우리 삶의 메시아이심을 알아본다.
세례자 요한에게서 예수님에게로
요한복음서는 기본적으로 예수 부활 이후 건설된 교회상황을 잘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공관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이 직접 제자를 부르시지만 (마르 1,16-20; 마태 4,18-22; 루가 5,1-11) 요한복음서에서는 증인들이 제자를 규합한다. 세례자 요한이 산파 역할을 했고 안드레아와 필립보가 베드로와 나타나엘을 예수께 데려왔다.
그리고 이들은 배나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요청받지 않았으며, 먼저 자신의 종교와 사상을 버리라고 요청받았다. 그래서 그들은 세례자 요한의 곁을 떠나 예수께 왔다. 그리고 시몬은 베드로(게파)라는 새로운 이름을 받았다.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자신을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옷 입는다는 것을 뜻한다. 고대사회에서 이름은 곧 자기 자신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제자들은 예수님처럼 이 세상에서 낯선 존재로 살아간다. 세상과 사뭇 다른 생활방식을 받아들이며, 다른 가치를 추구한다. 그래서 온통 새로운 것 투성이다. 그래서 세상을 이제 정말 낯선 곳으로 보게 되며, 만나는 사람마다 낯설고 새로운 이름뿐임을 깨닫게 된다. 여기서 새 생명이, 새 공동체가 탄생한다. 그러면 과연 우리 자신과 교회는 얼마나 자신을 낯선 존재로 다시 바라보고,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물어볼 차례이다.
오늘은
왠지 낯설게만 느껴지는 하느님.
어린시절
무섭게 벌 주러 오시던 분,
사랑 사랑
노래가사로만 맴돌던 분,
방에 콕 박혀 지낼 때
이따금 더오르던 분,
내가 힘들다고 느낄 때만
절실하게 부르던 그 이름 야훼.내 하루살이에
별로 개입하지 않다가
주일날이면
미사 때 입에서
우물거리던 그 이름.
이제사 내 등 뒤에 한 눈이 있어
나를 보고 또 보고
나를 부르고 또 부르고
먼저 손 내밀고 기다리는 당신을
내가 깨달을 수 있다면.낯설지만 내 생애의 어느 한 순간
만나 연분 맺은 적이 있는,
어디선가 본듯한 당신을
낯설게 그러나 친근하게
생활의 한가운데서 느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느님.
우리 주님.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종이신문 <가톨릭일꾼>(무료) 정기구독 신청하기
http://www.catholicworker.kr/com/kd.htm
도로시데이영성센터-가톨릭일꾼 후원하기
https://v3.ngocms.co.kr/system/member_signup/join_option_select_03.html?id=hva820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