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에 와서 1년 만에 아파트 생활을 접고 주변이 논으로 둘러싸인 개인주택으로 보금자리를 옮겼다. 마당도 넓고 텃밭도 있는 이 집으로 이사를 온 뒤로 한 주일이 지났지만, 주변 정리가 채 마무리되지 못했다. 주방과 안방, 사랑방, 책방으로 옮겨다니며 짐을 정리하고, 마당에서 풀 뽑고 텃밭엔 고추를 심었다. 오랜만에 호미며 괭이를 잡아 보니 연신 흐르는 땀이 콧등에서 미끄럼을 탄다. 힘들지만 새삼 느끼는 기쁨이 따라온다. 물을 가득 대어 놓은 논 때문에 이 집은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섬 같다. 이 마을로 들어오는 길목도 좁아서, 위치는 시내에 더 가까워졌지만, 얼핏 보면 세상의 소란에서 벗어난 안가(安家)처럼 여겨진다. 지금 개구리 소리 낭자해도 마을은 아늑하다.
이사 날짜를 잡아두고 한 주일 전에 우리 가족은 남도 여행을 다녀왔다. 사람이 거처를 옮기는 것은 삶의 과정에서 어떤 구비 하나를 넘어 다른 고갯마루에 서는 것과 같다. 우리는 그 고갯마루에서 틈을 내어 잠시 한숨을 돌리는 마음으로 길을 나선 것이다. 목적지는 진도(珍島)였다. 여행이란 새로운 땅을 경험한다는 의미를 넘어서, 누군가 거기서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에 더욱 가슴을 설레게 만든다. 여행 직전에 우연히 인터넷 카페에서 알게 된 벗님의 거처가 진도였고, “환영합니다.”라는 답신을 받아보고, 뭔가 통(通)하는 바가 있으리란 직감 때문에 무작정 그리로 행선지를 정했다.
진도에서 만난 기자영
남해고속도로를 타고 진주와 하동을 지나면 전라도 땅이다. 순천, 벌교, 보성, 강진, 해남을 거쳐 진도에 닿았다. 보배와 같은 섬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개펄이 있는 바닷가는 뭔가 풍성한 것이 마련되어 있는 것 같았다. 거기서 그분을 만났다. 기자영, 그녀는 한쪽 하반신만으로도 해맑은 얼굴을 간직할 줄 아는 벗님이었다. 여전히 암(癌)과 동고동락하는 사이인데도 그녀는 우리 식구에게 위로가 되는 존재로 다가왔다. 가톨릭 신앙과 명상 수행을 통해서 낡은 허물을 벗고 새 몸과 영혼으로 갈아입은 사람 같았다. 사람이 사람을 알아보는 데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은 경우가 종종 있는 법이다. 그녀를 감싸고 있는 기운이 평화롭고, 객관적 불행을 넘어서는 생동감이 느껴졌다. 매일 하루가 빛나는 놀라움을 그녀에게 던져 주고 있는 모양이다.
그녀가 살고 있는 집 앞엔 개펄이 널려 있는데, 그 개펄을 들고나는 물결 또한 잔잔했다. 물살이 서로 손잡고 살금살금 밀려왔다가 흩어지고, 뒤이어 다른 물살이 줄을 지어 종종걸음으로 밀려온다. 결코 서두르는 법이 없다는 듯이, 마치 발뒤꿈치를 들고 걷는 것처럼 조용히, 그러나 끊이지 않고 부는 바람을 따라서 줄줄이 파도가 들고난다. 남도의 바다가 모두 이런지 나는 모른다. 다만 동해 바다가 주는 억센 기운과 사뭇 다른 잔잔함이다. 그 잔잔함 때문에 개펄이 만들어지고, 개펄에는 생생한 목숨들이 저마다 삶을 이어간다. 지천으로 고동이 깔려 있고, 굴이며 따개비가 들어붙은 바위들, 바다에선 김이며 미역이 생육 번성한다. 그녀도 그러하리라. 고요한 가운데 생기를 두루 얻어 가리라.
운림산방 구멍가게에서, 노동시인 박남인
다음날 오전에 접도 뒷산을 올랐다. 자동차가 갈 수 있는 데까지 가서, 바위 정상까지는 결이 손을 잡고 올랐다. 결이는 근사한 작대기를 하나 주워 땅을 짚어가며 잘도 산을 올랐다. 진도의 아늑한 해안선을 둘러보고서 찾아간 곳은 운림산방(雲林山房)이다. 이 지역에선 유명 짜한 조선조 남화의 대가인 소치(小痴) 허유가 말년에 거처하던 화실이 있던 자리다. 둘러보기 전에 박남인 님에게 전화를 해보았다. 십수 년 전에 인천에 살 때, 지역 노동문학회에 아는 사람이 있어 드나들다가 사귀게 된 시인이다. 10여 년 전에 갑자기 고향인 진도로 내려갔다는 소식만 들었는데, 여기까지 온 김에 얼굴이나 한 번 보았으면 했던 것이다. 어찌저찌하여 간신히 통화를 하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바로 운림산방 주차장 입구에 있는 감나무 집에 있다는 거였다.
그이와 인연이 있긴 있는 모양이다. 어쩌면 눈앞에 두고 전화를 하게 되었을까. 감나무 집은 시인의 어머니 집이라는데, 어머니가 편찮으셔서 대신 여기 와서 구멍가게를 봐 주고 있다는 것이다. 시인은 텃밭에 물을 주고 있었다. 바싹 마른 시인은 잔뜩 구겨진 개량 한복을 말 그대로 몸에 ‘걸치고’ 있었다.
1960년대에나 보았음직한 허름한 구멍가게였다. 과자 부스러기와 소주, 사이다 정도가 진열되어 있었고, 들락거리는 손님이라곤 그저 담배를 사러 오는 이들뿐인 것 같았다. 가겟방 귀퉁이에 놓인 가스레인지 옆에 컴퓨터를 얹어 놓고 글을 쓰는 모양이다. 시인을 보는 순간, 마치 시간이 정지한 듯한 느낌이었다. 어슴푸레 우리를 알아보는 듯하였는데, 대뜸 맥주를 꺼내 왔고, 때마침 불쑥 들어온 마을 형님이란 분이 가스레인지에 전복을 구워서 소주 한 잔에 두어 점 집어 먹고 우리 앞으로 접시를 밀어놓고 나갔다.
예나 지금이나 엄청스레 술을 먹는 모양인데, 시인은 아무리 술을 먹어도 주정을 부리는 법이 없었고, 술자리 처음이나 끝이나 그림자 처럼 고요하였다. 예전에도 나이보다 늙어 보였던 시인은 지금도 그 모습 그대로다. 더 늙지도 젊어지지도 않았다. 그이의 말을 듣는다는 것은 그저 먼지를 뒤집어쓰고 앉았던 풀숲에 바람이 건듯 불어 먼지가 툭 떨어져 나가는 느낌이다. 아내는 그이야말로 ‘오래된 영혼’ 같다고 했다.
여러 생애를 살아서 태어날 때부터 노인인 사람, 노인의 지혜를 얻어 평생을 건너는 사람이라는 뜻일 것이다.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을뿐더러, 누구에게도 위협이 되지 않을 사람이다. 신산스러운 생애마저도 그래, 그래, 다독거리며 건너는 사람. 경주에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다는 시인은 언제 한 번, 그야말로 해묵은 도시, 경주에 오마고 약속했다.
벼랑끝 바닷가에서, 장진희 누님을 만나다
강진 남녁교회에서, 김민해 목사를 만나다
무주에 살다가 진도에 한옥을 짓고 옮겨와서 사는 예전 선배 집에서 첫날 밤을 보냈다. 밤늦게까지 막걸리를 마시며 쌓였던 정담을 나누고 뜨끈한 흙방에서 노곤하게 잠을 청했다. 이튿날 진도에 대한 아쉬움을 남기고 경주를 향해 출발했는데, 잠깐 인사나 하고 가자며 강진 남녘교회에 들렀다가 발이 묶였다.
예전에 지구별 방랑자 임의진 목사가 맡고 있다가 한 해 전에 <풍경소리>라는 영성 잡지를 내는 김민해 목사가 광주에서 이곳 강진으로 내려와 교회를 맡고 있는데, 한창 수리 중이다가 마침 공사를 마무리하던 참이었다. 이 일 때문에 교회에 와서 지내던 전직 가톨릭 수사 출신의 형님과 폐교를 빌려 쓰고 있다는 형님과 대낮부터 술판을 벌이게 되었다.
틈을 보아 가던 길을 가려 하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이 한둘씩 늘어나더니, 대낮부터 시작한 술판이 오밤중이 되어도 끝나지 않았다. 게다가 내일은 이현주 목사님도 강진에 내려오신다 하니, 실상 내 마음이 내 발을 붙 잡고 있었던 셈이다. 평소 나는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지만, ‘마음으로 당기는 사람들과 더불어 있는 자리가 술판이면 어떻고 투 전판이면 어떠랴!’ 하는 심정이었으리라. 그네들과 취하고 노래 부르며 너무 행복했다.
김민해 목사가 펴내는 <풍경소리>는 매긴 값이 없이 원하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보내 주는 잡지다. 좋은 것일수록 힘써 나누라는 옛 어른들의 가르침을 좇아서 그리 한다는 거였다. 잡지의 ‘알리는 말씀’을 보자면, 이리 적혀 있었다.
“저희는 이른바 ‘지적 소유권’에 대하여 동의하지 않습니다. 닥치는 대로 모든 것을 소유로 삼다가 마침내 사람의 생각이나 느낌까지도 자기 소유로 삼아서 돈 받고 팔아먹는 자본주의적 생활양식에 동의하지 않겠다는 뜻에서지요. ……누가 무엇을 지니고 있다면 그 무엇은 다른 누군가에게서 받은 것이요, 다른 누군가에게로 가야하는 것이지요. 그것을 제 소유로 움켜잡을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어렵지만 참 좋은 생각이고, 이런 사람들을 어찌 좋아하지 않고 배길 도리가 있을까, 싶다.
결국 교회에서 잘 자고 이튿날은 때마침 ‘부처님 오신 날’이라서, 김 민해 목사랑 다산초당 가는 길목에 있는 백련사에 갔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탄생할 때 지르신 게(偈)가 ‘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 安之’라는데, “하늘 위에서나 하늘 아래서 오직 자아는 존귀한 것이네. 온 세상의 모든 중생이 고통 속을 헤매니 내 마땅히 이를 편안케 하리라.”는 것이다. 참 좋은 날, 좋은 사람들과 동행하니 즐거움이 곱절이 된다.
게다가 절에 오신 수녀님들과 우리 일행은 주지 스님에게서 ‘특별한’ 차를 대접받았다. ‘백련차’인데, 커다란 흰빛 연꽃을 따서 그 모양 그대로 얼려 두었다가, 그 꽃을 통째로 뜨겁게 우려낸 것을 큰 질그릇에 담아서 내왔다. 그 차를 떠서 마시는 맛이란 특별했다. 몸속의 온기가 깊은 곳에서부터 차오르는 맛이라고 할까. 쑥처럼 씁쓸하면서도 달콤한 맛이라 할까. 스님 좌석 뒤편에 걸린 족자에 그려진 관세음보살이 미소 짓는 것 같았다.
이현주 목사님의 실험교회 첫예배 참석하다
그날 오후엔 이현주 목사님이 최근에 시작하신 실험 교회의 첫 기도 모임에 참석했다. 주제는 ‘용서와 화해’였는데, 첫인사로 모두가 모두에게 돌아가며 일일이 절을 올리는 것이었다. 절을 받을 때는 내 안에 계시는 하느님께서 절을 받으시는 것처럼, 절을 할 때는 상대방 안에 계시는 하느님께 절을 한다는 마음으로 ‘지극정성’으로 하는 것이다. 절을 할 때마다 점점 제 마음이 낮아지고, 수없이 절을 받으면서 내가 얼마나 귀한 피조물인지 스스로 새겨두게 되는 것이다. 이 당혹스러운 사태를 당하여 ‘오, 하느님!’ 할 밖에 없었다. 우리들 안에 계신 하느님을 만나라고, 저들 안에 살아 계신 분을 경험하라고 지난 며칠 동안 남도를 떠다녔던 것일까, 스스로 묻고 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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