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속에서 우리는 기다리시는 하느님을 만난다. 이 사실이 우리의 영적 생활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기다림의 두 번째 측면이다. 그러므로 지금은 예수님의 삶의 마지막 부분에 우리의 주의를 돌려보자. 우선 이야기 하나로 시작해 보자.
나는 매우 아픈 친구를 방문하게 되었다. 그는 53세쯤 된 남자로 매우 활동적이고 유용하며, 충실하고 창의적인 삶을 살아왔다. 실제로 그는 사람들, 특히 가난한 사람들을 마음 깊이 사랑했던 사회운동가였다. 50세가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이 암으로 고통받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후 3년 동안 그는 점점 더 약화되어 갔다.
내가 보러 갔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헨리, 여기 이렇게 침대에 누워서 내가 아프다는 사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모르고 있네. 내 자신에 대해 지금까지 생각해 온 것은 그저 행동, 사람들을 위해 일을 하는 것뿐이었네. 수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나의 삶은 가치가 있었네. 그런데 갑자기 여기 이렇게 힘이 빠져 있는 나는 아무 것도 더 이상 할 수가 없어... 이 상황에 대해 새롭게 생각할 수 있도록 나를 도와주게나. 아무 것도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 속으로 빠져들지 않도록 나를 도와주게. 온갖 사람들이 나에게 모든 것을 해주고 있고 정작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지금의 이 상황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도록 나를 도와주게.”
이야기를 함께 나누면서 나는 그가 끊임없이 다음과 같이 질문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아직도 나는 얼마나 더 일을 할 수 있을까?” 어떻든 내 친구는 무엇을 하는가에 따라 자신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배웠던 것이다. 그래서 아프게 되자 그는 건강이 회복되어 해왔던 일을 다시 하게 되리라는 희망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 별로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을 나 역시 깨달았다. 그는 암이었고 건강은 갈수록 악화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곧 죽을 것이었다. 내 친구가 그런데도 여전히 얼마나 더 일을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에 의존하고 있다면 그에게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까?
이런 생각들이 오고가는 가운데 우리는 함께 <기다림의 크기>라는 영국인 작가 V.H. 봔스톤의 책을 읽었다. 봔스톤은 겟세마니 동산의 예수의 고뇌에 대하여 그리고 십자가로 가는 길에 대해 쓰고 있다. 나는 이 책이 얼마나 강력한 영향을 주었는지 말하고 싶다. 이 책의 도움으로 내 친구와 나는 행동으로부터 수난(고난)으로 움직이는 것의 의미를 더 이해하게 되었다.
행동으로부터 수난으로
예수 체포의 이야기에서 중심단어는 내가 전에 그다지 많이 생각하지 않았던 단어이다. 그것은 “그들의 손에 넘겨졌다” 는 말이다. 그 일은 겟세마니에서 일어난 일이다. 예수님은 넘겨졌다. 어떤 번역들은 예수님이 “배반을 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리스말 번역은 “넘겨졌다” 이다. 유다스는 예수님을 팔아 넘겼다(마르 14,10 참조). 그러나 충격적인 것은 똑같은 말이 유다스에 관해서 뿐만 아니라 하느님에게도 쓰여졌다는 사실이다. 하느님은 예수님을 제외시키지 않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그분을 넘기셨다(로마 8,32).
그러므로 “넘겨졌다” 는 말은 예수님의 삶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참으로 이 넘겨짐의 드라마는 예수님의 삶을 철저하게 둘로 갈라놓는다. 예수님의 삶의 첫번째 부분은 행위로 가득 차 있다. 예수님은 온갖 종류의 행동을 주도한다. 그분은 말씀한다; 그분은 가르치신다; 그분은 치유하신다; 그분은 여행하신다. 그러나 넘겨지자 곧 예수님의 삶은 그분에게 일어나는 다른 일듥로 가득찬 상황이 된다. 그분은 체포된다; 그분은 대사제에게 끌려간다; 그분은 가시관을 쓰신다; 그분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다. 그분에게 일들이 가해지고 이에 대해 그분은 아무런 힘이 없다. 이것이 바로 수난의 의미이다 -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단지 받아들이기만 하는 존재가 되는 것.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요한 19,30) 라고 말하는 의미를 알아듣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분은 단지 “내가 하고자 하는 모든 일들을 다 했다” 는 의미를 말한 것이 아니다. 그분은 또한 “내 사명을 완성하기 위하여 나에게 일어나야 할 필요가 있는 일들을 나는 허용하였다”고 말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소명을 행동뿐만 아니라 수난을 통해서도 성취하신다. 그분은 아버지께서 하라고 당신을 보내신 일들만 아니라, 당신에게 일어나도록 아버지께서 허락한 일들이 되어지도록 허용함으로써도 사명을 성취한 것이다.
모든 행동은 수난(받아들임)에서 끝나는데, 우리의 행동에 대한 결과는 우리의 손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일의 신비요, 사랑의 신비이며 우정의 신비요 공동체의 신비이다 - 즉 이 모든 신비들에는 다 기다림이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의 신비이다. 하느님은 우리의 응답을 기다리는 예수님으로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신다. 바로 그 기다림 속에서 하느님의 최고의 사랑이 우리에게 표현되는 것이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사랑하도록 강요했다면, 우리는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수난(받아들임)은 기다림의 한 종류이다 - 다른 사람들이 하려고 하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가서 그곳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선포하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 선택을 제시하였다: 나의 제자가 되겠는가, 아니면 나의 사형집행자가 되겠는가? 여기에서 중간이란 없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가서 사람들에게 “예” 혹은 “아니오”를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도록 했다. 이것이 예수님의 위대한 수난이야기이다:
그분은 사람들이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를 기다려야 했다. 그들은 어떻게 대답을 할 것인가? 그분을 배반하거나 혹은 따를 것인가? 어떤 의미에서 그분의 고뇌는 단순히 죽음에 다가가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기다려야만 하는 고통이기도 하다. 그것은 하느님이 우리가운데에 어떻게 거룩한 현존을 드러내실 것인가에 대하여 우리의 대답을 전적으로 기다려야 하는 고통이다. 매우 신비스러운 방법으로 어떻게 하느님이 될 것인가에 대해 우리가 결정하도록 허용하는 하느님의 고뇌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육화의 신비를 흘낏 볼 수 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우리 가운데에서 행동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응답들을 받아들이는 존재가 되기 위한 것이라는 신비이다.
예수님의 받아들임에 관한 이 모든 통찰들이 내 친구와 하는 토론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친구는 열심히 일한 후에 그가 해야할 일은 기다리는 일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인간존재로서의 자신의 소명이 행동으로 뿐만 아니라 그의 받아들임 속에서 완성될 것이라는 사실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바로 이 기다림 속에서 하느님의 영광이 우리에게 드러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헨리 나웬(Henri Jozef Machiel Nouwen, 1932-1996)은 네덜란드 출신의 사제이며 영성작가. <상처받은 치유자로서의 사목자> <돌아온 아들> 등을 지었고, 마지막 10년동안 라르쉬 새벽공동체에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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