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12월 1일 우리 과 35명과 그의 과 35명은 종로 낙원회관에서 미팅을 하였다. 종강파티를 고고장에서 한 것이다. 춤을 배운 적이 없는 나는 AFKN에서 독학을 하고 중3인 집주인 아들에게서 교습을 받고 장군의 아들 김두한처럼 보무도 당당하게 낙원회관으로 향했다. 소지품을 보고 서로 짝을 정하고 신상명세와 취미 등을 물었다.
내 짝은 긴 생머리에 흰색 블라우스와 검은색 바지를 입은 좀 새침해 보이는 여학생이었다.처음 밟아보는 무대. 나중에 짝에게 내 춤 실력이 어떠했냐고 했더니 춤은 별로 였지만 얼굴 표정은 재미있었다나.
신나게 흔들고 중국집에서 자장면과 짬뽕을 시켜서 먹으면서 2:2 미팅을 하였다. 기억은 별로 나지 않지만 그의 옆에 앉은 여학생의 이름이 '계선도'였다는 것. 그래서 내가 "집에서 개를 많이 키우십니까?" 하고 좀 썰렁한 말을 했다는 것. 내 옆에 앉은 친구가 잘못해서 짬뽕 국물에 손가락이 하나 들어갔는데 내 짝이 다른 것으로 바꾸어달라고 했다는 것 등이다.
그 뒤로 계속 만나게 되었다. 토요일 집 앞에서 10시간 동안 무작정 기다리기도 하고 함께 자연농원(지금 에버랜드)에 갔더니 어떤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본인들은 못 타겠다고 티켓을 거저 주셨던 기억도 난다. 후름라이드라고 물을 뒤집어쓰며 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것을 타기도 했다.
학교 신문에 "나는 000하고 결혼해서 힘줘서 방귀 뀌는 이쁜 딸을 낳아서 조아라. 잘생기고 착한 아들을 낳아서 조선이라고 하겠다. 조아라 조선 원더플 코리아" 라고 쓰기도 했다. 내가 보낸 신문을 본 그녀가 쫓아와서 화를 냈지만 그걸로 이별이 되지는 않았다. 거절은 영업의 시작, 협상의 시작이다.
1980년 서울역 앞 교회의 지역사회학교에서 야학을 하였다. 도동과 양동에 있는 성매매 여성들의 아이들을 가르쳤는데, 몸에 화상을 비롯하여 상처가 많았다. 캠프를 가면 어린이들이 좀 야한 춤을 추기도 했다. 세족례를 하려고 하면 진창에 발을 담그고 오는 애들도 있었다. 그 곳에서 데모하는데 필요한 유인물을 만들기도 했다. 교회 내 지역사회학교에서 담배를 피다가 교회 전도사님에게 혼이 난 적도 있다.
도서관에서 고시 공부를 하다가, 학생들이 데모를 하다 끌려가는 상황에서 나 혼자 공부를 한다는 것이 미안해서 운동권에 합류하게 되었다. 학교에 있는 가로수마다 유인물을 붙이고, 길바닥에 "군부 독재 철폐!" 라고 스프레이로 쓰고, (제대하고 와서 보니 그 부분이 파여서 글씨를 알아볼 수 있었다.) 노래 가사를 바꾸어 부르고, 새벽에는 토론을 했다. 5월 이후에는 여러 대학 학생들과 화실을 빌려 광주 사태에 대한 유인물을 뿌렸다.
옷을 바꾸어 입으려고 용산에 있는 집에 갔다가 잠복 중이던 형사에게 붙잡혔다. 무료로 전철을 타고 동대문 경찰서로 잡혀갔다. 며칠을 잠을 재우지 않더니 좀 때리고 배후를 묻고 79년 겨울 부터 80년 형사에게 잡힐 때까지 시간별로 어떻게 지냈는지 일기 식으로 쓰라고 했다. 생각이 나지 않아서 1980.5.14. 9:00-11:00 삼국지 1쪽-25쪽 식으로 썼다가 혼이 났다. 배후를 불라고 해서 좀 수상한 사람을 한 명 불었는데 (경찰로 의심되는 사람) 그 사람은 군에 갔다고 하면서 또 때렸다. 반성문 쓰고 석방되어 집에서 누워 라디오만 듣고 지내다가 무기정학, 강제 징집되어 군에 갔다. 군에 있는 동안 무기정학은 제적으로 바뀌어 있었다.
군에 가기 전에 그녀를 만나 사정을 이야기 하고 쓰라린 마음으로 이별을 고하였다.
"나 군대 가... 잘 지내... 이제 안녕이야."
입대한 뒤로 편지도 면회도 오지 않는 나에게 선임하사가 “간첩이냐? 누구라도 면회 좀 오게 편지를 좀 써라.” 하였다. 그녀에게 편지를 썼더니 답장이 왔다. 마지막으로 도와주고 간 숙제가 A+를 받았다고 했다. 그의 글과 그림.
"까닭 없이 눈물이 핑 돌 때가 있습니다.
길을 가다가도
버스 안에서도
친구와 얘기하는 순간 갑자기 생각이 날 때도
차를 마시다가도
책을 보다가도
많은 인파를 바라볼 때와 그 틈 속에서도
하늘을 보다가도
별을 보다가도
달을 보다가도
바람이 불 때도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에도
음악을 들을 때도
테레비를 보다가도
라디오를 듣다가도
식탁 앞에서도
비슷한 사람이라고 느낄 때도
아 그리고
내가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마다"
1981년 크리스마스 무렵에 부대에서 애인 사진과 편지 콘테스트가 있었다. 첫사랑이 자신의 얼굴사진을 넣어 손수 유화로 그린카드를 보내 주어서 1등을 하였다. 그 다음날 내가 쓴 편지다.
"불침번이 근무시간이라고 깨웁니다.
일어나다 말고 미소를 짓습니다.
내 가슴에는 그녀가 짜서 보내준 조끼가 있습니다.
끌어당겨 내음을 맡습니다.
정말 좋은 내음입니다.
낯익은 내음입니다.
한복을 곱게 입은 그녀가 티 없이 웃고 있습니다. 언제 보아도 정다운 모습입니다.
직접 그린 카드도
예쁜 포장지도
그녀처럼 사랑스럽습니다.
글라라 아가씨는 솜씨가 좋습니다.
나는 서울 쪽을 바라봅니다.
어제 저녁 전우들은
저를 부러워 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나이라고.
담담한 한 척 하려 했지만
결국 환한 웃음으로 내 마음을 드러내고야 말았습니다.
그날, 청평에서 돌아오던 기차 안에서
잠든 나를
그녀가 안아보았나 봅니다.
어쩜 이렇듯 크기가 꼭 맞는지....
그러면서도 시치미를 떼고
'못 입을까봐 걱정이랍니다.'
그녀가 내 곁에 있었으면...
살며시 손이라도 잡아주련만....
눈이 내립니다.
내 마음은
서울 하늘입니다."
1983년 제대후, 대학 3학년 때 방배동 성당에서 관면혼배를 했다. 인연은 운명이 되었다. 언젠가 왜 나와 결혼했냐고 했더니 “내 옆에 다른 사람이 있는 걸 상상할 수 없어서”라고 했다.
조기동 사도요한
대야미성당 신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