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년 8월 9일 나치체제를 거부했기 때문에 교수형으로 순교한 프란츠 야거슈테터(Franz Jägerstätter, 1988-1943)를 잊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다만 다른 이들이 그렇게 하지 못했던 때에 그가 세속적인 충성의 위험을 보았기 때문만이 아니다. 또한 많은 그리스도교회 지도자들이 할 수 없었던 때에 그가 권력에 대해 진실을 말했기 때문만도 아니다. 그런 것들 이상으로, 프란츠 야거슈테터가 복음을 너무나 깊이 믿어서 그의 삶이 우리에게 “예수, 예수를 기억하자”라고 만트라처럼 외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거룩한 사람에게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나는 우리가 그를 그리스도의 초상으로 들어올리고 그의 이야기를 나누며 그로부터 힘을 이끌어 내야 한다고 말한다. 요약하자면, 우리는 그를 성인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것은 그가 우리의 옹호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를 절실히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날 하느님의 백성들이 도대체 왜 프란츠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하는지 최근에 다시 각성하였다. 올바른 가톨릭 신앙인은 “올바른 실천”을 먼저 생각한다. 전통적인 신앙의 이름으로 "저항과 예언"이라는 교회의 사명을 피하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은 정치적이다"라는 본래의 가르침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믿음과 실천, 믿음과 정치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볼 때, 프란츠 야거슈테터의 삶은 강력한 증언으로 등록된다. 우리들 대부분은 고든 잔이 쓴 <고독한 증언, 프란츠 야거슈테터의 삶과 죽음> 전기를 읽었고, 읽기를 원하기도 한다. 그러나 고든 잔의 이 전기는 이제 30여년이 지났고 프란츠가 지금 우리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에 대한 토론의 시 작일 뿐이다. 가톨릭일꾼운동의 이상에 투신하는 우리들이 교회 안에서 목소리가 되고자 한다면, 토론해야 할 문제이다.
프란츠 야거슈테터는 오스트리아의 한 작은 시골 마을인 세인트 라데군트에서 결코 주류에 속하지 않았다. 나치가 1938년 오스트리아를 통합하려고 투표를 요구하여 왔을 때 프란츠는 만장일치의 지지에 반대하여 "아니오"라고 응답했다. 그가 마을 공동체에서 이탈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청년기에 그는 술을 많이 마시고 거칠었으며 한 아이의 아버지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의 이런 젊음은 어거스틴 성인 못지 않게 영적인 것에 대한 심취에 길을 양보했고, 그의 열정은 거룩한 삶에 대해 쉬지 않고 엄격하게 투신하는 모습으로 변화되었다. 아마도 그가 결혼했던 여인 프란치스카가 그를 덕으로 이끌었을 것이다. 아마도 농사를 지었던 까닭에 그는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복종을 배웠을 것이다. 또한 본당에서 지도자요 성물방 담당자로 공적 책임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흥청망청하는 삶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확신있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다: 프란츠 야거슈테터의 여정은 교회의 믿음과 실천을 떠나서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라고. 그의 회심은 다시 한번 “그리스도인들은 타고 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교부 터툴리아누스의 격언을 증명해 준다. 그는 가톨릭 신앙 안에서 그 자신을 구원의 역사 속에 각인시키려는 깊은 힘과 열정적인 갈망을 발견하였다. 프란츠는 이름만 가톨릭이 아니었다. 투쟁에 직면했을 때 그가 믿는 이들에게 제안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응답은 “고백성사와 성체성사로부터 새로운 힘을 끌어내고 영원한 목표에 매달리는 것”이었다.
그는 매일 미사 전에 묵상하였고, 자주 점심 때까지 단식했으며, 가난한 이들과 나누었고, 성서를 부지런히 읽었다. 그리고 문제가 시작되었을 때, 즉 1943년 소집되어 아돌프 히틀러의 군대에 복무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그가 했던 모든 하나 하나의 거부는 그가 말했던 것처럼, “나의 가톨릭 종교에 반대되는 것이므로”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교회에 뿌리를 두고 그 전통에 대해 충실했던 프란츠 야거슈테터는 오늘날 사회변화를 위해 일하고 있는 모든 가톨릭신자들에게 도전한다. 완강한 불의에 대한 투쟁을 성공시키려는 희망은 사회운동이나 좌익혁명의 목적과 수단들에 근거를 둘 수가 없다. 그런 방법들은 물질적인 영역에 발전을 가져올지는 모르지만,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방식들을 사회변화의 중심에 자리잡게 하는 마음의 혁명에 집중하지는 않는다.
참으로, 세속적 행동주의의 목표는 하느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충분치 않다. 그러나 프란츠 야거슈테터의 이야기는 다른 빛을 던져준다. 그는 이념이 아니라 세례의 희망, 하느님–이 세상의 권력 있는 자들이 아니라–이 마지막 말이라는 교회의 부활신앙에 의해 강한 충동을 받았다. 오로지 “하느님의 권세는 굴복될 수 없다”는 이 확실한 희망 때문에 그는 전쟁과 죽음의 세력에 직면하고 “당신들에게는 아니오, 하느님께는 예”라는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실상, 그의 삶의 열매들, 세례 받은 “사제요, 예언자요 왕인” 그의 열매들은 우리로 하여금 초기 교회에 귀를 기울이게 만든다. 그 시기에 교회의 가르침은 지식이 아니라 실천, 도덕에 철저히 중심을 두었다. 따라서 현대의 믿음과 실천 사이에 뚜렷이 구분을 두는 경향에 문제 제기를 하고 있다. 양심적인 병역거부를 선택한 그의 입장은 또한 교회의 초기에 뿌리를 내린 그리스도교적인 희망의 증언을 반영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무기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나의 싸움을 하기를 더 원한다.”
“영원한 왕국을 믿는 우리들은 모든 것을 무릅써야 한다.”
프란츠가 교회 전통과 연결하는 모습은 강한 힘을 발휘한다. 그는 성인들의 삶을 알았고, 교회전례력에 따라 살았으며 아마도 사제보다 더 신앙문제에 잘 대답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신앙을 진지하게 받아들였으므로 그것에 따라 행동했다. 그는 –다니엘 베리간이 도로시 데이에 대해 쓴말을 빌려오자면– “마치 진리를 그대로 복사하는 것처 럼”살았다.
“성인인 프란츠”가 진보적이면서 또한 동시에 가톨릭신앙인이 되려고 애쓰는 우리들뿐 아니라 교회 안의 편안한 보수적인 사람들에게도 설득력이 있을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교회의 유일한 공식적인 충고는 프란츠에게 군 복무를 받아들이라는 것뿐이었다. 프란츠가 살고있던 마을 본당 사제 같은 몇몇 친구 사제들 역시 나치의 반대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프란츠의 일상생활의 성소를 강조하면서 그의 가족의 안녕에만 관심을 두었다.
고든 잔의 책을 보면, 프란츠에게 타협을 선택하도록 촉구한 성직자들의 긴 명단을 발견하게된다. 가톨릭신앙과 실천이 그의 삶을 활성화시키도록 허용하면서, 프란츠 야거슈테터는 교회의 교계 그 자체를 거울로 비추듯이 보여주었으며, 교계가 어디서부터 복음과 멀어져 표류해왔는지 드러내 준다.
나치에 순응하라고 촉구하는 교회 사람들은 그들의 신앙이 대중에게 미칠 극적인 영향을 무시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 점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들은 고전적인 원칙들, –이 원칙들은 아퀴나스가 소중히 여겼던 원칙들이다– 양심의 원칙과 악에 협력하지 않는 원칙들을 격하시켰다. 프란츠는 그의 사목자들보다 더 훌륭하게 양성된 종교인이 었다. 신앙을 개인적인 차원으로 만든 이들 사목자들의 선택은 오늘날의 교회에도 위험이다.
“내적인 강박관념”은 세상의 국가들과 권력에 반대하는 우리들의 참여를 질식시킬 수 있다. 종교 지도자들에게 밝혀지는 전통의 가장 깊은 뿌리는 그것이 비판적이라는 사실이다. 프란츠 같은 사람들은 태평스러운 교회기관들이 자주 잊어버리는 심오한 기억의 행위를 제시한다. 이러한 기억은 예수가 그 당시 종교권력 구조에 제시한 메시지와 역사적 사명의 핵심에 닿게 한다.
교회의 가르침은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하느님과 동등하지 않고 하느님의 하인에 불과하다. 하느님의 백성은 그 어떤 때보다도 프란츠 야거슈테터를 부각시켜야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신앙이 길들여지지 않도록, 단지 머리의 문제에 그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프란츠에게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구체적인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이며, 죽음을 무릅쓰고 하느님 나라에 반대하는 제국을 거부하고 사랑의 왕국을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단지 생각의 대상이 아니다. 프란츠는 “모든 것 가운데 가장 확실한 표지는 행위 안에서 발견된다”고 말했다. 예수의 메시지와 교회의 전통에 단순히 동의만 하지 않았다. 그는 예수의 메시지를 살았으므로 그것 때문에 축복을 받을 것이다.
[원출처] <Catholicworker>, 2001년 8~9월호
[번역문 출처] <참사람되어> 2010년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