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이라 하면 사족을 못 쓰는 내게 무허가 이발소에 관한 김수영(金洙暎)의 때 묻고 해묵은 글발은 다시금 마음속 깊이 그에게 갈채를 보내게 했다. 그가 무허가 이발소를 스케치하는데 왜 나는 굳이 ‘교회’를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나에게 교회란 어쩜 1970년대의 동심을 판자 위에 얹혀 놓고 상고머리를 깎아 주던 기찻길 옆 그 이발소의 냄새 나는 의자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버즘 먹은 얼굴로 가는 야매 이발소
우리는 늘상 기찻길에서 놀기를 즐겼다. 대못을 철로에 얹혀 놓고 귀를 기울여 기차의 쇠바퀴 울리는 소리를 잔뜩 긴장한 채로 반쯤 기대감에 부풀어 듣곤 했다. 기차의 육중한 무게에 눌린 채 납작하고 날카롭게 벼린 못꼿을 더욱 날 서게 갈아서 나무에 던지고, 땅에도 꽂아 가며 땅 따먹기 놀이에 빠지곤 했다. 기찻길을 떠날 때면 어김없이 이발소 옆에 뻐쭝하게 큰 키로 서 있던 해바라기 씨앗을 빼내 집에 가서 볶아 먹곤 했다.
아이들의 일상 한가운데 언제나 편안하고 낯익은 얼굴로 있던 그 ‘야매’ 이발소. 우린 무허가 이발소를 그렇게 불렀다. 합법적인 권리를 얻지 못한 채 주변부 이발소로 남아 있던 야매 이발소는 그렇게 출세가도의 주변부만 맴돌던 가난한 날들의 동심을 머리카락 헤아리듯 매만져 주었다. 버짐 먹은 얼굴과 기계충으로 짓무른 땜통을 머리에 이고 살았던 어린 시절을 새삼 다정하게 불러 주는 무허가 이발소를 김수영은 이렇게 묘사하였다.
무허가 이발소의 딱딱한 평상에 앉아서 순차를 기다리는 시간처럼 평화로운 때는 없다. 시내의 다방이나 술집 중에서 어수룩하고 한적한 분위기를 찾아다니는 것을 단념한 지는 벌써 오래고, 변두리인 우리 동네의 이발관에까지도 요즘 와서는 급격하게 ‘근대화’의 병균이 오염되어서, 라디오 가요의 독재적인 연주에다가 미인계를 이용한 마사지의 착취까지 가미되어 좀처럼 신경을 풀고 앉아 있을 수가 없다.
좌석 버스나 코로나 택시에서까지도 가요 팬의 운전사를 만나게 되면, 사색은 고사하고 그날 하루의 재수가 염려될 만큼 신경 고문과 세뇌 교육이 사회화되고 있는 세상에서는 신경을 푼다는 것도 하나의 위법이요 범죄라는 감이 든다. 무허가 이발소에서야 비로소 군색한 사색을 위한 신경 휴식이 가능하게 되었으니, 사색이 범죄라고 아니 말할 수 있겠는가.
하기는 무허가 이발소에도 라디오의 소음이 없는 것은 아니다. 향군무장(鄕軍武裝)을 보도하는 투박한 뉴스 소리가 귀에 거슬리고, 인기 배우를 모델로 한 전축 광고 포스터 같은 것이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만, 그래도 수십 명의 승객들의 사전 양해도 없이 제멋대로 유행가를 마구 틀어 놓는 운전사의 무지와 무례에 비하면, 무료한 이발사의 이 정도의 위안은 오히려 소박한 편에 속한다.
이런 뒷골목 이발소의 고객들이란 주로 동네 꼬마들과 시골서 올라온 인근 공장의 직공 아이들인데, 스무 살도 채 안 되는 아이들의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정중하게 인두질을 해주고 게다가 우스갯소리까지 해주면서 기껏해야 50원을 받는 이 영리營利 행위는 너무나 바보스럽고 어처구니없이 불쌍해 보이기까지도 한다.
저 다 해진 신에, 저 더러운 옷에, 저 반짝거리는 머리가 어떻게 어울린다고 저 불필요한 치장을 하나, 하고 처음에는 화도 내 보았지만, 자세히 생각하면, 불쌍한 저 아이가 저렇게 정중한 우대를 받고 사람 대우를 받는 것은 무허가 이발소에서밖에 있으랴 하는 측은한 감이 들고, 사랑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가를 얼마나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있는 우리들인가 하는 원시적인 겸손한 반성까지도 든다. 참 할 일이 많다. 정말 할 일이 많다. 불필요한 어리석은 사랑의 일이!” _ 김수영, <시여 침을 뱉어라>, 민음사, 193~194쪽.
모든 것이 자본주의식으로, 모든 것이 큰 것 위주로, 모든 것이 합법적인 제도 안에서 은근짜로 도적질 해먹는 세상에서 진정한 보시(布施)는 비합법적인 삶의 뒷골목에서 이뤄지는 게 아닐까? 실용주의자들에게는 불필요해 보이고, 세상의 지혜롭다는 자들의 눈에는 어리석게만 보이는 행위에서야 진짜배기 사랑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이 만고의 진리인 세상은 슬프지만 여전히 지금도 사실이다.
세상의 이치를 모르는 바가 아니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바보를 자청하는 무허가 이발소 같은 사람이 있을까? 그런 공동체가 있을까? 아마도 2천 년 전 목수의 아들이었다는 예수가 꿈꾸었던 나라가 그렇게 바보 같은 ‘이반’들의 나라가 아니었을까? 그는 실상 바리사이파 사람들 눈에는 ‘무허가 종교 인사’로 보였을 것이다. 로마인들에게는 비합법적인 체제 도전자로 비추어졌을 테고, 권세 있다는 빌라도 총독 앞에선 어리석은 자로 조롱받았을 게 뻔하다.
백 년 전 봉건적인 아시아 제국을 풍미하던 예수회 선교사들이 참으로 지혜로워서 아시아의 지식층과 지배층을 개종시키면 그에 따르는 권속과 백성들이 개종하리라고 헛되이 기대하였던 것과 마찬가지다. 예나 지금이나 세상에 속한 교회는 부질없이 중심부 인사들과 어울리느라고 ‘가난한 자의 복음이었던 예수’를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일까? 이제 교회는 한사코 제도 안에 머물기를 고집하고, 성직자는 거룩한 직무 대신에 단순히 종교 전문가로 만족하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스럽다.
설법보다 강생을
어느 고상한 무리가 따지고 들지는 모르지만, 버즘 먹은 아이들과 가난한 직공들에게 굽실대고 갖은 향응을 베푸는 교회를 보고 싶다. 세상에서 천대받는 무리들이 사람대접을 분에 넘치게 받아 누리는 곳이 교회라면 얼마나 좋을까? 어느 현명한 분이 전자계산기를 코앞에 디밀며 수지타산을 논박하더라도 못 들은 척하고, 약간은 푼수처럼 “대안(大安)! 대안!” 하며 시정(市井)을 맴돌며 천민들에게 설법하던 대안 거사를 닮거나 원효처럼 춤추고 노래하며 극락왕생을 빌어 주는 공동체, 백성들에게 곰살맞고 세도가에게 거만한 줏대가 있고 서글픈 아름다움이 온몸 그득히 배여 있는 사람이 있는, 그런 공동체가 내가 귀의한 교회였음 얼마나 좋을까?
예수처럼 제대로 살 자신이 서지 않는다면, 상업주의 기획사의 논리대로 ‘사랑’을 운운하는 걸그룹 연습생처럼 찬송가를 부르지 말 일이다. 사제들은 강론대에서 쉽게 ‘하느님의 자비’를 입에 올리지 말고, 신학자들은 저들만 아는 하늘나라 언어로 ‘고상한’ 말투에 담아 짐짓 복음을 선포하려 들지 말 일이다. 강생(降生)신학을 설법하기 전에,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이 낮은 데로 강생하였는지 돌아볼 일이다. 자신의 스킨로션 냄새가 버짐 먹은 아이들의 얼굴 속으로 강생하였는지 먼저 맡아 볼 일이다. 면병과 포도주를 축성하는 내 손이 예수처럼 목수의 손으로 강생하였는지 커닝할 일이다.
예전에 어느 선배에게 넌지시 물어 보았다.
“형, 요즘 같은 시대에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해야 할 사명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젊은 날 내내 교회 안에서 일해 왔던 선배의 대답이다.
“그건 교회를 떠나는 것이지.”
무 자르듯 던져진 말에 당황한 나는 다시 물었다.
“그건 왜죠?”
“지금, 교회는 권력이기 때문이지. 예수는 권력과 아무 상관없거든.”
“그건 성직자들에게나 해당되는 게 아닌가요? 우리 평신도들도 그렇다는 건가요?”
“당연하지. 신자들은 단지 성직자들에게 자신의 권력을 위탁했을 뿐이야.”
선배의 말은 우리 신자들이 성직자로 대표되는 교회를 통하여 사회적 권력을 나누어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교회 안에서 또는 교회를 통하여 저도 모르는 사이에 기득권을 보장받고, 이해관계를 관철시키는 것이란다. 마치 우리가 <조선일보>를 사서 보는 것이 결국은 <조선일보>로 상징되는 반북 보수 이데올로기에 이바지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논리다. 만일 교회의 성직자가 권력화 된다면, 이를 뒷받침하는 신자들이 있기 때문이라는 말씀이다.
이게 빈말이 아님을 나는 안다. 이 말은 예나 지금이나 신앙과 신학 사이에서 방황하는 내 정신을 번쩍 뜨이게 만든다. 제대로 된 신앙, 권력에 복무하지 않는 신앙이 가능할까? 그동안 나는 교회의 관행 속에서 빛과 어둠, 희망과 저주의 갈피를 헤집어 보느라고 애써 왔지만, 어쩌면 그 해답은 ‘내 안에 깃든 파시즘’을 얼마나 솎아내느냐에 달려 있다. 그래서 내 안에 이미 깃든 폭력성을 충분히 성찰하고, 아직도 성령이 내게 머물고 있는지 자문해 볼 필요를 느낀다.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일꾼 코디네이터
저도 그런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항상 깨우침이 있는 글..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