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시 정부청사에 근무하는 중견 공무원은 허구한 날 저녁밥이 고민이다. 밖에서 해결하고 집에 들어가자니 쓸쓸하고 무료하다. 가끔 총각 후배들 초대하는데 처음 환호하더니 이내 시큰둥한 게 아닌가. 맛이 뻔하기 때문이란다. 일주일 한 번에서 한 달 한 차례, 서울의 집을 다녀오면 잠깐 신선했던 냉장고의 풍요로움이 이내 시들해진다. 퇴근하며 반찬가게에 들리는데, 배고프면 조심해야 한다. 얇은 비닐에 둘러싸인 스티로폼 접시의 소담한 반찬마다 맛나 보이기 때문이다. 마음껏 사면 냉장고에 남아돈다. 먹성 좋은 후배를 모시지만, 그들도 지친다. 냉장고를 속절없이 차지하던 반찬들은 한꺼번에 쓰레기통으로 향하기 일쑤다.
일상은 비닐로 시작된다
은퇴를 앞둔 직장인의 저녁도 녹록한 건 아니다. 텔레비전 앞 소파에서 쫓겨나지 않으려면 삼식이를 면해야 한다. 그래서 그런가? 요리학원에 등록하는 남성이 많다는데, 무슨 재료가 어떤 맛을 내는지 알지 못하는 한 사내가 묵은 김치에 순두부를 넣고 끓여 보았다. 김치와 순두부의 오묘한 ‘섞어찌개’가 완성될 거라 굳게 믿었는데, 웬걸.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사방팔방에 은근한 도움을 청했다. 귀한 친구의 묘방은 라면스프였고, 에라, 넣었더니 먹을만 했다. 하지만 그 과정을 아내에겐 이실직고 하지 못했다. 그랬다간 소파를 지키기 어려울 거 같아서.
라면스프는 작은 비닐봉지에 담겼다. 라면도 비닐봉지에 담긴다. 생각하니, 라면은 필시 비닐과 제 운명을 키운 거 같다. 비닐이 없었다면 늦도록 소파를 고집하는 ‘야식이’도, 나트륨 중독에서 당뇨로 직행하는 배불뚝이도 드물었겠지. 비닐 이후 기저질환자가 대거 늘었고, 오호통재라! 젊은이들이 가소롭게 여기는 코로나19가 중년 이상의 연령층에 무섭게 다가왔는지 모른다.
우리 집 감자를 누가 재배했는지 잘 알던 시절, 짚으로 만든 꼬투리에 달걀 한 꾸러미나 반 꾸러미 담아 팔던 동네 가게는 주전자를 가지고 가야 막걸리를 한 되 퍼 담아 주었다. 아버지 막걸리 심부름 가며 두부 한 모 사오던 아이는 이웃 농부가 광에 감자를 쏟아 넣었다는 걸 짐작하면서, 신문지 없으면 두부와 생선은 사고 팔 수 없을 거라 믿었다. 유튜브가 신문을 대신하는 요즘은 어떨까? 비닐 없으면 두부부침과 고등어구이는 꿈꾸기 어렵겠지.
언제부터 전복을 라면에 넣을 생각을 했을까? 완도 일원에 여객선 드나들기 빠듯하게 집중된 전복 양식장 덕분인데, 그 양식장은 태풍을 조심해야 한다. 뒤집히면 스티로폼 조각들이 바다를 한동안 더럽힌다. 스티로폼으로 양식장을 띄우지 않는다면 전복이 라면에 들어갈 수 없고, 우럭 매운탕이 주당의 ‘최애메뉴’로 등극할 수 없다. 비닐이 없다면 편의점에서 온갖 과자를 쉽게 만날 수 없고, 짜장면과 짬뽕 배달이 원활할 수 없다. 그래서 ‘배달의 민족’은 대기업의 지위를 넘보기 어려웠겠지.
지금은 석유 파티중
“한국은 선진국보다 선도국이 되어달라!” 코로나19 방역에 남다른 성과를 보이는 우리나라를 경이롭게 바라보는 서양학자의 당부가 그렇단다. 뿌듯하다. 4차산업이 궤도에 오르는 시점에서 한국은 방역을 넘어 민주주의와 경제의 선도국이 되어 달라고, 저명한 미래학자가 조언했다고 우리 언론이 전했다. 그도 그럴 게, 바이러스를 효과적으로 차단하는 마스크와 방진복은 물론, 코로나19 감염을 빠르게 확인하는 진단키트를 세계 각국의 호응으로 수출한다. 우쭐해진다.
비닐과 플라스틱이 없었다면 우리는 코로나19는커녕 일본의 수출규제도 이길 수 없었다. 플라스틱으로 적절하게 전기를 차단하거나 표면을 코팅하지 않으면 반도체가 정교하면서 가벼울 수 없다지 않던가. 결국, 석유다. 석유를 가공해 얻는 비닐과 플라스틱이 있어야 자동차를 생산할 수 있고 초고층빌딩으로 하늘을 찌를 수 있으며, 제3세계 앞바다의 물고기 씨를 말릴 수 있다. 대형 어선으로 바닥에서 훑는 ‘쌍끌이 어업’은 플라스틱으로 만든 거대한 그물이 있기에 가능했다.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의 젊은 기자는 <석유종말시계>(크리스토퍼 스타이너, 시공사, 2010)에서 갤런 당 2달러인 석유 가격이 4달러가 되면 고등학생은 운전을 포기하고 부모차에 의지하면서 대화가 무르익을 거로 전망했다. 12달러로 오르면 승용차 포기하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이웃과 살갑게 사는 마을이 도심에 늘어나고, 16달러가 되면 원양어선이 사라져 초밥은 자취를 감출 거라 예상했다. 나아가 20달러 이상 치솟으면 전투기를 띄울 수 없으므로 세계는 평화로워질 거라 상상했다. 재치 있는 상상인데, 석유가 고갈되면 비닐과 플라스틱은 귀중품으로 등극할 게 분명하다.
2007년 한 저널리스트는 <파티는 끝났다>(리처드 하인버그, 시공사, 2006)에서 2005년 즈음 유정에서 퍼 올리는 석유를 소비량이 초과했다고 분석했다. 코로나19로 잠시 주춤하지만 머지않아 바닥을 드러낼 거라는 주장인데, 기껏 100여 년 전 존재를 알기 시작한 석유는 인류 역사에서 순간에 나타났다 사라질 게 틀림없다. 지금은 석유 파티 중이다. 한데 파티는 일상이 아니다. 잠깐 즐긴 뒤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석유를 모를 때 인류는 불행했을까?
패스트푸드는 석유 없이 불가능하다. 공장식 축산은 옥수수가 필수 사료이고, 옥수수는 옥수수에서 얻는 열량의 10배의 석유를 동원해야 생산할 수 있다. 한 계절만 입으라는 ‘패스트패션’도 석유가 창조했다. 면직물에 개성을 넣어 염색한 티셔츠는 젊은이 방에 가득한데 못 입으면 유행에 뒤처지니 우울한가? 그렇게 광고하는데, 많은 옷에 플라스틱인 인조견이 섞인다. 세탁기 한 번 돌릴 때, 옷 한 벌에서 마이크로플라스틱 1,500개 이상이 나온다고 영국 연구팀이 발표한 적 있다. 그 플라스틱은 하수종말처리장을 거침없이 통과해 바다로 나간다.
등지느러미 없는 돌고래 상괭이는 우리 서해안이 터전이다. 천연기념물이지만 죽어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상괭이 사체의 위를 조사하면 비닐이 가득하다. 쥐치 같은 물고기를 즐기던 상괭이가 왜 비닐을 삼킬까? 남획이 한몫했다. 쥐치가 없으니 아열대화 된 서해안에 몰려드는 열대성 해파리라도 먹어야 산다. 양식장에서 빠져나오는 배설물은 해파리를 유인하는데, 허기진 상괭이 눈에 바닷물에 흐물흐물 찌든 라면봉지가 해파리로 보인다. 허겁지겁 먹었겠지.
바닷물에 삭으면 마이크로플라스틱으로 분리돼 우유처럼 해저로 내려간다는 비닐봉지들은 요즘 대형 식품점에서 찾기 어렵다. 하지만 바다로 이미 들어간 비닐, 스티로폼, 플라스틱은 막대할 텐데, 세포막을 통과하는 마이크로플라스틱은 생물의 생식과 성장을 방해한다고 학자들은 주장한다. 소금에 포함되는 마이크로플라스틱은 수돗물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먹이사슬을 따라 인체에 스며들기 때문인가? 불임클리닉을 두드리는 부부가 늘어난다고 한다.
유럽은 적어도 2040년까지 자동차나 석탄화력에 필수인 내연기관을 없애겠다 선언했지만, 석유를 포기하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고갈을 앞둔 석유를 태워 없애기보다 어떻게든 활용하겠다는 의지인데, 산업문명을 조금이라고 고수하려면 대안이 없기 때문이리라. 석유 고갈이라는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인류는 생존해야 하고 코로나19보다 심각한 감염병도 견뎌야 하는데, 비닐 없이 두부 한 모 살 수 없는 우리는 어떤 준비에 나서야 할까? 시장바구니는 아니다.
자동차 없이 살 수 있을까? 도로를 대거 없앤 자리를 온갖 생물이 어우러지는 생태공간으로 바꾼다면 코로나19는 지금처럼 전파될 수 없다. 비행장이 사라지면 세계 경제를 마비시키는 코로나바이러스가 넘나들지 못한다. 자동차와 비행기를 모르는 인류 조상은 해외여행을 인생 바구니의 마지막 목록에 넣지 않았다. 열대과일을 사시사철 먹지 않아도 배곯지 않았다. 해안의 드넓은 갯벌이 복원된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안전하고 맛있는 전통음식을 실컷 맛볼 것이다. 마을에서 자급자족 가능한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땅을 살려낸다면, 석유가 거의 필요 없을 텐데.
머리 회전이 빼어난 인류는 석유 없이 행복한 내일을 구상할 텐데, 어쩌면 조상의 삶에서 힌트를 얻을지 모른다. 그런데 걱정이다. 혹시 석유 분해하는 미생물이나 곤충의 유전자를 분리하는 건 아닐까? 벌써 그럴 조짐이 있다. 과학기술이 탐욕스런 산업의 노예가 된 요즘, 불길함을 엄습한 생명공학 기술로 석유 분해 유전자를 이 생물 저 생물에 넣는 게 아닐까? 그럴 경우, 생태계가 한꺼번에 무너질 가능성이 크다.
대안은 무엇일까? 인류의 초심이다. 석유 모르던 시기를 눈여겨보자. 진정한 코로나19 이후의 새로운 일상이 거기에 있을지 모르는데, 땅과 물과 사람이 살아나는 마을이다. 간디는 인도가 70만 개의 마을로 이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자립을 의미한다. 의식주에서 에너지와 돌봄까지 자립할 수 있는 마을이다. 그런 마을에 비닐과 플라스틱이 뭐 필요하겠는가? 몽상이라고? 무슨! 인류의 생존이 달린 문제 아닐까? 그 길을 우리가 선도하면 어떨까? 후손으로 이어질 “지속 가능한 행복”의 어쩌면 유일한 길일지 모르는데.
박병상
인천 도시생태환경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