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꼬대 아닌 잠꼬대
매년 1월 경기도 남양주 마석 모란공원에는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모인다. 1994년 1월 18일 그의 급서 소식은 서럽게도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렇게 급히 겨레의 곁을 떠나가서는 안 될 그였다. 26주기를 맞은 올해 그의 추도식에 걸린 ‘통일의 아버지 늦봄 문익환 목사님을 기립니다.’와 ‘통일의 횃불 문익환 선배님을 기리며’란 현수막을 보며 다시 한 번 더 ‘문익환, 그는 누구였을까’란 물음이 가슴깊이 울려왔다.
그의 이름 앞에 붙은 숱한 호칭을 뒤로 하고 필자에게 가장 살가운 호칭은 시인 문익환이다. 그는 55세의 나이로 첫 시집 <새삼스런 하루>(월간문학사, 1973)를 출간한 이후 모두 7권의 시집을 낸 한국작가회의 전신인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이기도 했다. 2007년 6월 그가 모교이자 교수로 활동한 한신대학교 교정에는 그의 시비가 세워졌다. 이 시비에 새긴 작품은 1989년 새해 첫날 통일을 염원하며 쓴 <잠꼬대 아닌 잠꼬대>다.
“난 올해 안으로 평양으로 갈 거야
기어코 가고 말 거야, 이건
잠꼬대가 아니라고 농담이 아니라고
이건 진담이라고
(중략)
이 양반 머리가 좀 돌았구만
그래 난 머리가 돌았다 돌아도 한참 돌았다
머리가 돌지 않고 역사를 사는 일이
있다고 생각하나
이 머리가 말짱한 것들아
평양 가는 표를 팔지 않겠음 그만두라고
난 걸어서라도 갈 테니까
임진강을 헤엄쳐서라도 갈 테니까
그러다가 총에라도 맞아 죽는 날이면
그야 하는 수 없지
구름처럼 바람처럼 넋으로 가는 거지”
공동번역성서와 3·1 민주구국 선언문
그가 쓰고 다듬던 숱한 글들은 모두 시대의 역작이자 자료로 남아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공동번역 성서>다. 1965년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교회 쇄신과 교회일치 정신으로 교황청 성서위원회와 세계성서공회연합회는 성서 공동번역에 합의했다. 한국에서도 1968년 신·구교가 마음을 합해 성서공동번역위원회를 조직하고 10년에 걸쳐 노력한 끝에 1977년 부활절에 한국어 <공동번역 성서>가 출간되었다. 이 성서는 대중들이 쉽게 접하여 읽을 수 있는 문체로 번역되었고, 이후 다양한 교회 일치 운동이 일어나게 되는 출발점이 되었다는 점에서 큰 역사적 의의가 있다. 바로 그 공동번역성서의 구약 책임자이자 성서번역 위원장이 문익환이었다.
그가 쓴 또 하나의 글은 민주화의 제단에 바친 헌시였지만 남은 생을 가시밭길로 이끈 시작점을 알리는 글이 되었다. 1976년 명동성당에서 열린 3·1 민주구국 선언은 70년대 가장 큰 파문을 일으킨 최대 재야운동 사건이자 문익환 인생의 변곡점이 된 옥살이의 서곡이었다. 그는 이후 여섯 차례에 걸쳐 통합 10년의 감옥살이를 겪어야만 했다. 그가 1918년생이니 나이 60이 다된 나이에 그는 박정희 독재정권에 맞선 반체제인사로 등장한 것이다. 그의 표현으로는, 그의 친구 윤동주와 그가 장례위원장을 맡았던 장준하와 어린 노동자 전태일에게 진 빚을 갚는 길이었다.
<3·1 민주구국 선언>은 이렇게 시작한다. “오늘로 3.1절 쉰일곱 돌을 맞으면서 우리는 1919년 3월 1일 전 세계에 울려 퍼지던 이 민족의 함성, 자주독립을 부르짖던 아우성이 쟁쟁히 울려와서 이대로 앉아 있는 것은 구국 선열들의 피를 이 땅에 묻어 버리는 죄가 되는 것 같아 우리의 뜻을 모아 민주구국 선언을 국내외에 선포하고자 한다. 8.15 해방의 부푼 희망을 부수어 버린 국토 분단의 비극은 이 민족에게 거듭되는 시련을 안겨 주었지만 이 민족은 끝내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6.25 동란의 폐허를 딛고 일어섰고, 4.19 학생 의거로 이승만 독재를 무너뜨려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가슴가슴에 회생시켰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이 민족은 또다시 독재 정권의 쇠사슬에 매이게 되었다. 삼권분립은 허울만 남고 말았다. 국가 안보라는 구실 아래 신앙과 양심의 자유는 날로 위축되어 가고 언론의 자유, 학원의 자주성은 압살당하고 말았다.” 이 선언문은 “민주주의 만세!”로 끝난다.
1976년 당시 감옥행을 각오하고 <3·1 민주구국 선언>에 이름을 올린 함석헌, 윤보선, 정일형, 김대중, 윤반웅, 안병무, 이문영, 서남동, 이우정, 문동환, 함세웅, 안병무, 정태영, 김승훈, 장덕필, 김택암, 안충석은 “첫째, 이 나라가 민주주의 기반 위에 서야 한다. 둘째, 경제 입국의 구상과 자세가 근본적으로 검토되어야 한다. 셋째, 민족 통일은 오늘 이 겨레가 짊어진 최대의 과업”이라고 했다. 당시 선언문 초안자를 보호하기 위해 서명자들이 모두 함구했지만, 초안자는 바로 문익환이었다. 그러나 그 역시 정권의 감시망을 피할 수는 없었다.
김일성에게 건넨 <우리말 갈래사전>
문익환을 기억하는 이라면 누구나 떠올리는 역사의 한 장면은 1989년 3월 낯선 듯이 낯익은 김일성과 포옹하는 장면이다. 그는 그날 김일성에게 <우리말 갈래사전>(박용수 편)을 방문선물로 건넸다. 두 사람은 며칠 동안 남북통일을 위한 일거리를 정하면서 ‘남북 공동 국어사전’을 편찬하기로 합의했다. 이후 2005년 2월 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편찬위원회가 공식 출범하면서 남쪽의 <표준국어대사전>과 북쪽의 <조선말대사전>을 모체로 삼기에 합의했지만 남북한의 역사적·정치적 격랑으로 인하여 여전히 겨레말큰사전의 완성은 숙원사업으로 남아있다.
1989년 그의 방북이 당국의 허가받지 않은 방문이라고 밀입북이나 잠행이라고 보수언론은 입에 거품을 넘치도록 물었지만 문익환은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의장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한 것이다. 그는 평양방문 중 부활절 예배를 드리기 위해 봉수교회를 방문하여 “민주는 민중의 부활이요 통일은 민족의 부활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민주관이자 통일관이며 부활관이다.
남으로 돌아온 후 70살이 넘은 그에게 검찰은 무기징역을 구형했고, 재판부는 징역 10년을 선고했다.(항소심 징역 7년, 대법원 상고기각) 지리한 재판과정 중 그가 가장 강렬하게 던진 말은 마치 남북문제를 푸는 화두와 같은 말이었다. “남과 북은 서로 상대방을 찬양·동조해야만 통일이 됩니다. 찬양·동조를 범죄라고 처벌하면 어떻게 남북 합의가 이루어집니까?”
그의 꿈을 지금 여기에
미국 워싱턴 스미소니언 자연사박물관에 2007년 개설된 한국관에는 1989년 방북해서 김일성과 만나는 문익환 사진이 전시되었다. 사진 바로 아래에는 그가 휴전선을 넘는 그림(하나됨을 위하여, 임옥상 작)과 6·25전쟁, 판문점의 북한군인, 이산가족 상봉 사진이 함께 걸려 있다. 박물관의 큐레이터는 남북분단에 대한 고민을 이 작품들로 압축한 듯했다. 민족문제에 머리를 맞대고 가슴으로 만난 문익환과 김일성은 두 사람 모두 1994년 같은 해 1월과 7월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으니 참 아이러니한 인생길이다.
전남 강진 다산초당과 백련사 사이에는 <늦봄 문익환학교>가 있다. 중고등 통합과정의 이 학교는 2006년 ‘물질만능과 이기주의, 소비와 오염, 경쟁과 상대적 소외, 분단과 분리의 이 시대를 반성하면서 생명과 사랑의 공동체, 통일된 민족, 상생과 평화의 대동세상을 열어 갈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준비’하는 것을 설립취지로 하여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그러나 색안경을 낀 <조선일보>는 2012년 5월 17일 ‘북한이 보낸 졸업 축사 낭독… 좌편향 교육하는 학교’ 제목으로 기사를 보도하여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지만 보도내용이 사실이 아님으로 밝혀져 그 해 7월 14일 정정 보도를 실었다. 남북의 하나 됨을 위하여 온 몸을 바친 문익환이 세상을 떠났어도 세상의 눈 흘김과 가재 눈은 여전히 현재진행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품고 문익환은 우리 곁에 지금도 있다.
통일의 아버지, 통일불꽃, 통일운동가, 목사, 신학교수, 성서학자, 번역가, 시인, 늦봄, 그 어느 호칭도 문익환의 모든 것을 담을 수는 없다. 그가 잠꼬대 하듯 바라고 바랐던 북녘을 다녀오고 나서 집필한 <히브리민중사>(삼민사, 1990)에서, 그는 막혔던 것을 내뿜는 하느님의 입술이 된 예언자들처럼 새기고 전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다.”(히브리서 11장 1절)
김유철 스테파노 시인
한국작가회의
<삶 예술 연구소> 대표
경남민주언론시민연합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