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자 요한을 세례명으로 삼았던 사람. 무위당, 좁쌀한알, 청강 등의 호와 사회운동가, 교육자, 서화가로서 이 땅에 살던 장일순(1928~1994). 그럼에도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걸림 없는 자유인으로 살았던 모월산 사람이-그는 고향 원주의 치악산을 모월산(母月山)이라 불렀다-바로 장일순입니다.
그를 살아생전 많은 사람이 알고 있었고, 동시에 많은 사람이 모른 채 사라졌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5년이 흐른 지금도 많은 사람이 기억하고 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이 모르고 있습니다. 그를 담으려고 노력한 여러 평전이 출간되었고 매년 5월 찔레꽃이 피면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원주로 모입니다. 과연 그는 누구일까요? 그를 ‘선생님’이라 부르는 사람들에게 깊고 넓게 새겨진 그의 그림자 속에는 무엇이 담겨 있을까요?
어린이들에게 소개된 장일순에 관한 책 <좁쌀 한 알에도 우주가 담겨있단다>(2008. 우리교육. 김선미 글. 원혜영 그림)에 소개된 장일순의 모습부터 차분하게 살펴보려 합니다. 분명한 것은 어린이에게 이해되고 어린이들이 본받을 사람으로 삼을 수 있다면 어른들도 장일순의 발자취를 이해 못할 까닭이 없기에 인용 글이 길어도 이곳으로 옮겨온 이유로 삼으려 합니다.
장일순 할아버지는 1928년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는 친할아버지인 장경호 선생님께 한문을 익히고, 독립 운동가이자 이름난 서예가였던 차강 박기정 선생님으로부터 붓글씨와 그림을 배웠습니다. 장경호 선생님은 마당에 떨어진 콩 한쪽도 귀하게 여기고 동냥을 하러온 거지에게도 따뜻한 밥을 내어 주도록 가르친 인자한 분이었습니다. 또한 그런 할아버지의 친구였던 박기정 선생님은 자신의 글씨와 그림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대던 훌륭한 어르신이었습니다. 두 분 모두 장일순 할아버지가 살아가는 동안 늘 그리워하고 존경하며 따라 배우고자 했던 선생님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보통학교를 마치고는 서울로 올라가 공부를 계속 했습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해방될 즈음, 배재중학교를 마치고 경성공업 전문학교(지금의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 들어갔다가 다시 서울대학교 미학과에 입학하게 되지만, 전쟁이 일어나 공부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 때부터 줄 곳 원주를 떠나지 않고 살면서,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조용히 세상을 바꾸는 일들을 많이 하게 됩니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 배고프고 가난한 시절, 할아버지는 갈 곳 없는 어린아이들을 모아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편안하게 공부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 스스로 먼저 집안의 땅을 내놓고 뜻있는 여러 사람들의 힘과 지혜를 모아 원주에 대성학교를 세우게 됩니다.
또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과 바른 정치로 나라를 이끄는 것이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국회의원 선거에도 출마했습니다. 그렇지만 돈과 부패한 권력이 판을 치는 선거에서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오히려 평화통일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힙니다. 감옥에서 나온 뒤에도 누명을 쓰고 학교에서 쫓겨난 할아버지는 그 뒤로는 줄곧 군사정권으로부터 감시를 받으며 살게 됩니다. 하지만 학교를 떠난 할아버지는 오히려 교실 밖에서 더 많은 제자들을 길러 내게 됩니다.
할아버지는 가난한 농민과 노동자들이 스스로 잘 살 수 있는 길을 찾아 서로 돕고 살도록 가르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천주교회의 지학순 주교와 힘을 합쳐 원주 지역을 중심으로 농촌과 탄광 지역에 신용협동조합을 만드는 일에서부터 시작해,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드는 일에 앞장설 훌륭한 제자들을 길러 냈습니다.
할아버지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까지 하늘처럼 귀하게 대접받는 것이 민주주의라는 믿음으로 오랜 세월 독재 정권과 반대해 싸웠습니다. 그러나 사람만 잘 먹고 잘 사는 길은 지구 전체로 보면 옳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풀 한 포기, 벌레 한 마리도 소중히 여기며 모든 생명이 서로 돕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한살림 운동을 시작합니다.
할아버지는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의 숨은 지도자로, 또 모두가 더불어 사는 세상을 이끄는 훌륭한 교육자로 존경받았습니다. 그러면서 뛰어난 난초 그림과 붓글씨로 유명한 예술가이기도 했습니다. 서화 작품을 통해 어려운 사람들을 위로해 주었고, 좋은 일을 하려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거저 내주어 힘을 주셨습니다. 모두가 더불어 사는 아름다운 세상을 위해 쓰도록 하신거지요.
어떤가요? 장일순 선생의 삶이 그림 그려지는지요?
장일순과 함께 일상을 나누며 살았던 사람들은 그를 다양한 모습으로 기억하고 회상합니다. 마치 예수를 담은 복음, 즉 마태오・마르코・루카・요한이 같으면서도 다르게, 때론 다르면서도 중심된 모습을 잃지 않으려고 기록했듯이 장일순 역시 그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집으로 오는 뚝방길’을 걷는 일로 평생을 소일했지만 참으로 많은 사람을 만났고 많은 사람들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장일순을 전했습니다. 같으면서 다르게, 다르면서도 같은 모습으로 말입니다.
이현주 목사가 장일순 8주기 추모제를 맞아서 했던 말이다.
“지금 제 방에는 선생님께서 써 주신 글 ‘만물일화(萬物一華)’가 걸려 있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한 송이 꽃이라는 뜻이겠지요. 올봄에도 산과 들에 온갖 꽃이 피어났습니다. 모양이나 색깔은 저마다 달라도 그것들 모두 대지가 피워내는 꽃 한 송이라는 선생님 말씀 생각하며 봄을 보내고, 바야흐로 여름을 맞았습니다. 선생님 보이십니까? 오늘 이 묘소에도 이런 꽃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선생님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가진 것 많아 거들먹거리는 자들에게는 광야의 요한처럼 질책을 아끼지 않으셨고, 가진 것 없이 땅바닥을 기는 민초들 앞에서는 바람보다 먼저 눕는 풀처럼 공손하셨던 선생님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김종철 선생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무위당 선생의 말씀의 일부나마 듣고자 자주 그분의 책을 뒤적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물론 지금 우리가 당면한 온갖 문제에 대한 충분한 대답이 거기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 작용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해괴한 생각과 행동들이 갈수록 기승을 부리는 이 경제지상주의의 시대에, 무위당 선생의 간곡하고 부드러운 말씀은-비록 책을 통한 간접적인 음성일지라도-내겐 더 없이 큰 위안과 기쁨을 주는 원천의 하나이다. 무위당 선생은 우리더러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거나, 무엇을 하라고 직설적으로 요구하지 않는다. 또 선생은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 지금 당장 어떤 행동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하게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 선생은 다만 세상에 살아있는 존재들과의 근원적인 공감과 대화를 통해서, 개인이 어떻게 참된 행복에 도달하고, 기쁨을 누릴 수 있는지를 자신의 체험에 비추어 부드러운 음성으로 차근차근 말할 뿐이다.”
김성동 작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유가(儒家)인가 하면 불가(佛家)요, 불가인가하면 노장(老莊)이며 노장인가하면 또 예수의 참얼을 온몸으로 받아 실천하여온 독가(督家)였던 선생은, 무엇보다 진인(眞人)이었다. 속류 과학주의와 속류 유물론과 유사종교적이고 혹세무민적이며 종교적 신비주의에 그리고 추상적 형이상학만이 어지럽게 춤추는 판에서 대중성・민중성・소박성・일상성 속에 들어있는 거룩함을 되찾아 함께 영적 진보를 이루어 나가야 한다는 것을, 그 길밖에 길이 없다는 것을 온순하고 쉬운 입말로 남겨준 선생이시다.”
철학가 고제순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무위당 선생님은 철학을 전공하지 않으셨다. 철학 논문을 쓰지도 않으셨다. 철학박사도 아니고 철학교수도 아니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보기에 그는 이 시대의 참된 철학자였다. 그는 생명의 본질을 탐구하며 생명의 실상을 통찰하셨으며 생명의 이치에 따라 사셨고 전 생애를 통해 온 생명을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그의 삶은 생명사랑의 삶 그 자체였다. 그의 생명사랑은 인식과 존재, 이론과 실천, 앎과 행위가 분리되지 않은 온전한 사랑이었다. 온 몸, 온 마음, 온 영혼으로 모든 생명을 모시고 섬기신 삶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선생님은 이 시대의 참된 철학자이시다.”
오래도록 선생님과 동고동락을 나누었으며 지금도 기념사업에 힘을 보태는 이경국 선생은 이렇게 말합니다.
“(1960년 사회대중당 후보로 국회의원에 입후보했을 때) 선생님과 숙식을 함께 하면서 참 배운 점이 많았습니다. 몸이 피곤한데도 아침 일찍 부모님께 문안인사를 드리던 일, 매일 아침 부모님의 요강을 손수 비우고 우물가에서 씻으시던 일 들 부모님을 마음으로부터 공경하던 모습, 그리고 선거운동 기간 동안 동지들을 늘 따뜻하게 대하시던 선생님의 모습을 보고, 이 분을 평생 선생님으로 섬기고 모시면서 사람답게 사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귀농운동을 했던 이병철 선생은 이렇게 말합니다.
“한사람의 생애와 사상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정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선생님의 드러난 삶과 그 말씀조차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있는 지금, 우리들에게 이 일은 쉽게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은 새로운 운동의 실천을 거치지 않을 수 없는 과정이다. (중략)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선생님의 사상, 그 가르침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 사회에 어떻게 생명평화운동을 보편적 운동으로 일구어갈 것인가 하는 점이다.”
좁쌀 한 알에서 우주를 만난 장일순 이야기는 무궁무진합니다. 위에 인용된 부분은 <너를 보고 나는 부끄러웠네>(2000. 녹색평론사)에서 발췌했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 예수가 나타났을 때 그물을 버리고 제자가 된 사람들도 있었고, 멀거니 바라본 사람도 있었고, 흠집을 잡으려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지금도 우리 곁에는 숱한 ‘사람’이 지나갑니다. 그댄 누구를 만나며, 어떤 모습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시인이 만난 사람 이야기>를 시작하며
말하자면 ‘시한부’ 인생 아닌 인생은 없습니다. 그 주어진 시간동안 전설이 되어버린 오래 전 ‘사람’도 만나고, 지금여기의 관계 속에서 부대끼며 현재의 ‘사람’도 만납니다. 그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시인의 눈으로 바라보고 나누려 합니다. 때로는 다큐처럼, 또 때로는 픽션처럼.
김유철 스테파노 시인
한국작가회의
<삶 예술 연구소> 대표
경남민주언론시민연합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