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 이전에 거룩함을 추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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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이전에 거룩함을 추구하라
  • 토머스 머튼
  • 승인 2020.04.01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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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머튼의 삶과 거룩함/마지막회

예수는 우리의 신성함이자 하느님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길이다. “어떤 사람도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복음 14,6).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면 내가 너희 안에 살리라”(요한 15,4-5). 어떻게 하는 것이 그분 안에 머무르는 것일까? 사랑으로...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 살고 아버지를 기쁘게 할 수 있을까? 예수께서 그리하셨듯이 성령의 말씀에 사랑을 다해 귀를 기울이고 순종하며 아버지의 뜻을 행함으로써 할 수 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내 계명을 받아들이고 지키는 사람이 바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요한 14, 15).

그리스도의 뜻은 무엇보다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다.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겠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4-35).

그리스도인의 성화는 진실로 우리 안에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거룩함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완전히 수동적이고 생기 없이 생활함에도 불구하고 성령께서 활동하신다는 것은 아니다. 끊임없는 투쟁과 내적인 갈등 없는 영성 생활은 없다. 이 갈등과의 싸움이 더욱 힘든 것은 그것이 숨겨져 있고, 신비스럽고, 때때로 이해하기조차 힘들기 때문이다.

모든 진지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신앙 생활 초기에 몇 가지 희생을 하기를 원할 것이다. 좋은 출발은 쉽다. 그러나 그것을 지속하게 만들고 시작한 일을 계속 끌고 나가며 끝이 날 때까지 유지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신앙을 지키기 위한 노력은 막대하며, 우리의 약해빠진 사랑에 지워진 짐은 너무 무겁다: 아니면 그렇게 되리라고 예상한다.

 

사진출처=nun-spam.tumblr.com
사진출처=nun-spam.tumblr.com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기 위해 그분과 함께 죽는 십자가와 우리의 소명의 중대함을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가 세례 때 그분과 함께 죽고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명백한 진리다: 그러나 이것은 이어질 죽음과 부활의 시작일 뿐이다. 우리는 일생 동안 단 한번만 “회개” 하는 것이 아니며 수 없이 많이, 그리고 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크고 작은 “회개”, 내면의 변혁들을 거치면서 마침내 그리스도 안에서 변모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한 두 번의 변혁들은 기꺼이 감수하려고 하는 반면, 우리 내면의 자아를 더욱 더 많이 내어놓아야 할 때는 주저하게 되는데 그렇게 하는 한, 우리는 영원히 자유로워지지 못하게 된다.

그러면, 역설적으로 비록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의 성화를 이루어주시지만, 그분께서 활동하시면 할수록 우리는 더욱 많은 대가를 치루어야 한다. 우리가 앞으로 더욱 나아갈수록 그분은 우리의 힘과 인간적이고 자연적인 본성들을 더 많이 앗아가, 결국 우리는 완전한 가난과 암흑에 빠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상황을 우리는 가장 고통스러워하고 반항한다.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이상하고 거룩한 그리스도의 죽음이라는 신비를 위해, 우리는 좀더 익숙하고 편안한 일상적인 활동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그분의 뜻을 버리고 사소하지만 우리를 “만족시키는” 양식들, 우리에게 흥미를 주며 다른 사람들의 눈에도 흥미를 줄 수 있는 것에서 위안을 얻으려고 한다. 우리는 이 방법을 통해 평화를 얻을 수 있고 우리의 삶이 풍요로워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며, 우리의 활동들은 정신을 메마르게 하는 것이 될 뿐이다.

뉴먼 추기경은 -그분은 확실히 십자가의 쓴맛과 모순을 알고 있었다- 다음의 금언에 따라 살았다: “평화 이전에 거룩함을 추구하라.” 이 금언은 그리스도교적 삶이 갖고 있는 온전한 진지함을 기억하길 원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가 거룩함을 추구한다면 평화는 저절로 얻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온” 주님께서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를 우리에게 약속하셨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불안한 노력에 의존하는 한 이 세상에 속한다. 우리는 자신의 노력만으로 평화를 이룰 수 없다. 우리는 어떤 면에서, 평화를 포기하고 그것에 대해 잊을 때만 그것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적 삶에 있어 암흑과 시험이라는 요소를 지나치게 강조하지는 말자. 믿는 이들에게 암흑은 영적인 빛으로 채워지고 믿음은 새로운 차원으로 변화하게 된다 - 이해와 지혜라는 차원. “마음이 깨끗한 이들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보게 될 것이다”(마태오 5,8). 그러므로 완전한 그리스도인이란 나무랄데 없이 완전하며 모든 도덕적인 약함을 이겨낸 사람이 아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자비를 전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어, 더 이상 이 현세의 슬픔과 덧없음으로 고민하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하느님께 대한 그의 신뢰는 절대적인 것으로, 그는 경험으로 하느님께서 절대로 그를 저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 “알았기” 때문이다(이 깨달음은 충실한 믿음의 새로운 차원일 따름이다).

그는 하느님의 자비에 완전한 신뢰를 갖고 응답한다.

“우리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기뻐합니다. 고통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시련을 이겨내는 끈기를 낳고 그러한 끈기는 희망을 낳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께서는 우리의 마음 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로마서 5,2-5).

클레멘트의 알렉산드라가 말했듯 거룩한 자비에 대한 희망과 지식이 완전한 그리스도인들은 기도를 통해 항상 하느님 대전에 머무르며 비록 외적으로 기도를 드리고 있지 않을 때에도 여전히 그분을 추구하고 그분의 자비에만 의존한다. 그것뿐만 아니라 그들이 하느님의 뜻만을 좇기 때문에 그들 마음 속의 소망은 그것이 표현되던 그렇지 않던간에, 하느님께서 허락하신다.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인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선하게 보이거나 악하게 보일지라도 실제로 좋은 방향으로 작용한다. 모든 것을 통해 하느님의 자비가 표출된다. 그들의 사랑은 모든 것을 통해 자라난다. 모든 사건들이 그들이 하느님과 가까이 일치될 수 있도록 이용된다. 그런 사람들에게 방해물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하느님은 방해물조차도 그분의 목적의 수단으로 사용하신다. 이것이 “영적인 완전함”의 참된 의미이며, 그것은 초인간적인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얻는 것이 아니라 약하고 단점을 갖고 있으나 하느님의 사랑에 완전히 의탁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거룩함의 마지막 단계는 십자가라는 명백한 바보짓을 위해 자신을 기꺼이 그리고 확신에 찬 즐거움에 맡긴 채 포기하는 것이다.

“멸망할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의 이치가 한낱 어리석은 생각에 불과하지만 구원받을 우리에게는 곧 하느님의 힘입니다”(고린토 전서 1,18).

이 바보짓은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세계에서 자신과 관련된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으로, 그리스도께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것이며 세속적인 자아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고통 당하는 것이며 집착을 버리는 것으로 완전한 포기의 행위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즐거움을 얻기 위한 최종적인 전환점이기도 하다.

포기하고 우리 자신의 공허함 속에 잠겨 그곳에서 그리스도의 완전한 자유를 찾는 것 - 이것은 우리 인간의 노력이나 계획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쉬거나 노력함으로써, 생각하거나 생각하지 않거나, 행동하거나 행동하지 않음으로써 그것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유일한 해답은 그리스도에 대한 영적인 사랑으로 변화된 완전한 믿음, 용약하는 희망에 있다. 이것은 순전히 그분께서 주시는 선물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받기 위해 용기, 겸손, 인내와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의 평범한 일상의 모든 상황 안에서 그분의 뜻에 단순하게 충실할 수 있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원문출처] <Life and Holiness>, 토머스 머튼 
[번역문 출처] <참사람되어> 2000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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