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최대한 부정한다는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뿐만 아니라 자신의 전부를 포기하는 것이다. 자신의 욕망과 판단에 따라 살지 않고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뜻에 맞추어 사는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교적 금욕은 우리 존재의 가장 친밀한 깊이까지 이를 것이다.
수도자들은 규칙과 예배라는 외적인 행위를 하기로 맹세함으로써 자신들을 묶어 놓게 되는데 그럼으로써 그들은 완전한 사랑에 좀더 단순하고 직접적으로 도달하게 된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내가 시키는 대로하고 나서 나를 따라 오너라”(마태오 19,21).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을 지향해야 한다는 모두에게 부과된 일반적인 의무 외에, 수도자들은 자신들이 서약한 특별한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 그것이 그의 삶의 목적이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일치 안에서 내적으로 성장하는 것. 이러한 내적인 사랑의 발전은 완전함을 향한 진정한 성장이다. 그러므로, 수도자들은 그의 직분이 제공하는 방법들을 이용하여 “세상”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하며 “성령에 일치하여” 더욱 완전하게 살고 하느님과의 일치 안에서 성장할 수 있어야 한다.
평신도들은 물론 수도자들에게 제공되는 영적인 혜택들을 갖지는 못한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평신도들 역시 그들만의 혜택과 희생이 있다는 점이다. 거룩함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수도자의 서약만이 영웅적인 것이 될 수는 없다. 결혼의 의무도 사실상 수도자의 그것보다 쉽지 않은 것이다. 결혼은 성약(聖約)이므로, 결혼 생활은 특별히 신성한 은총으로 성화되어야 한다. 이 신성한 은총이 결혼을 영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리므로, 결혼은 그리스도와 맺는 일치에 장애가 되지 않는다. 신앙의 정신에서 본다면 단순함과 사랑이라는 은총의 선물으로 거룩함이 자랄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혼 생활은 “육적인 삶”이고 수도적인 삶만이 “영적인 삶”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결혼 생활은 진정 영적인 소명이지만 결혼한 사람들이 그들의 영적인 기회들을 깨닫지 못하고 자주 자신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줄 사람을 찾지 못해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다.
결혼한 그리스도인들이 수도자들의 금욕, 봉헌, 영적인 의식 등을 따를 수 없다는 이유로 자신들이 어떤 면에서 거룩함과 완전함의 삶으로부터 동떨어져 있다고 여기는 것은 비극이다.
반대로 그들은 교회가 이 모든 문제들로부터 자유롭게 해 줌으로써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최상으로 선택할 수 있게 해 준 것에 즐거워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신약성서를 읽고 “즐거움과 단순한 마음을 안고 빵을 나누었던”(사도행전 2,46-47) 초기 그리스도 신자들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그들이 교회의 전례의 삶에 자신들을 담가 성찬례의 예식으로부터 사랑 속에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힘을 이끌어 내고 자신들을 잊을 수 있도록 하자.
거룩함으로의 길은 신뢰와 사랑의 길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성령 안에” 살고 거룩한 은총이라는 숨겨진 샘물을 매순간 마시되 복잡하고 부수적인 의식들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그는 무엇보다도 본질에 관심을 둔다. 자주 단순한 기도와 신앙에로 나아가며; 하느님의 현존에 주의를 기울이며; 모든 일에서 하느님의 뜻에 사랑을 다해 순종하며, 특히 자신의 본분이 요구하는 의무에 있어서 그러하며; 그리고 무엇보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이웃과 형제를 사랑한다.
금욕은 언제나 필요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주 고통스러운 희생의 삶을 살아야만 한다. 급한 성미와 이기적인 반응을 조절하고 사랑이 요구하는 바에 순종하기 위한 꾸준한 노력은 영구적이며 끈질긴 희생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우리는 과연 빚을 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육체에 빚을 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는 육체를 따라 살 의무는 없습니다. 육체를 따라 살면 여러분은 죽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으로 육체의 악한 행실을 죽이면 삽니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이 받은 성령은 여러분을 다시 노예로 만들어서 공포에 몰아 넣으시는 분이 아니라 여러분을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바로 그 성령께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명해 주십니다. 또 우리의 마음 속에도 그러한 확신이 있습니다. 자녀가 되면 또한 상속자도 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을 받을 사람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고 있으니 영광도 그와 함께 받을 것이 아닙니까?”(로마서 8,12-17).
“성령께서 맺어주시는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그리고 절제입니다. 이것을 금하는 법은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에게 속한 사람들은 육체를 그 정욕과 욕망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으니 우리는 성령의 지도를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잘난 체 하지 말고 서로 싸움을 걸지 말고 서로 질투하지 말아야 합니다”(갈라디아서 5,22-25).
토마스 사도는 그러나, 현재의 삶 안에서 절대적인 완전함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완전함은 가장 높고 가장 완전한 것으로, 이것은 오직 천국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천국에서 우리의 사랑은 항상 실질적이고 온전히 하느님을 향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완전함은 세상에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능한 완전함이란 하느님의 사랑에 대립되는 모든 것을 배제하는 것이다:
a) 중죄를 피하는 것 - 그것은 십계명에 명시되어 있다.
b) 참된 사랑의 장애물을 제거하는 것 - 이것은 복음에 명시되어 있다.
토마스 사도는 여기서 수도자들의 서원에 관해 얘기한 것이다; 그러나 복음적 권고가 그리스도교 평신도들의 삶에서 배제되지는 않는다. 평신도 역시 그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음으로써 예를 들어, 가난한 정신을 구현하는 방법 등을 통해 율법 이상의 수준으로 생활하며 하느님의 현존에 더 깊은 관심을 갖고 그분의 거룩한 의도에 완전히 융화되어 자신의 삶을 헌신할 수 있다.
과거 사막의 교부들 중에는 금욕주의적인 고행을 통해 이 세상에서 절대적인 완전함과 유사한 수준까지 이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성 예로니모 역시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으나 후에 그 의견에 반대했다 - 그리고 성 토마스와 마찬가지로 현세의 삶에서는 상대적으로 완전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우리는 어느 정도 고의적인 약함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 이것은 성인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약함과 인간적인 한계를 여전히 갖고 있기 때문이다.
현세에 모든 격정을 완전히 정복한 초인간이라는 이상을 그리스도교의 개념이기 보다 이단으로 여기는 것은 수도회 역사에 있어 하나의 역설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영적”이라기 보다는 “육적”인 이상이 되었다. 그리스도교적 신성함에서 인간의 약함과 불완전함은 그가 자신의 비참함에서부터 겸손함을 배우고 하느님의 은총에 더욱 전적이며 완전하게 신뢰 할수록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과 조화를 이룰 수 있다. 사도 바오로가 대표적인 예다:
“내가 굉장한 계시를 받았다 해서 잔뜩 교만해질까봐 하느님께서 내 몸에 가시로 찌르는 것 같은 병을 하나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서 나를 줄곧 괴롭혀 왔습니다. 그래서 나는 교만에 빠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 고통이 내게서 떠나게 해 주시기를 주님께 세 번이나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는 이미 내 은총을 충분히 받았다. 내 권능은 약한 자 안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하고 번번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의 권능이 내게 머무르게 하려고 더 없이 기쁜 마음으로 나의 약점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약해지는 것을 만족하게 여기며, 모욕과 빈곤과 곤궁을 달게 받습니다. 그것은 내가 약해졌을 때 오히려 나는 강하기 때문입니다”(고린토 후서 12,7-10).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현세에서 매우 실제적이고 상대적으로 완전한 평화를 획득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물론 우리 모두는 마음에 평정을 얻기 위해 싸워야 하며 자신을 비정상적인 격정에서 자유롭게 해야 한다. 이러한 내적인 평화 없이 우리는 하느님을 제대로 알 수 없고 자녀로서 마땅히 즐겨야 할 그분과의 친분을 누릴 수 없게 된다.
평화는 그러나, 가혹한 무력이나 폭력, 독재적인 방법으로 우리의 욕구를 억압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평화는 무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은 그리스도께 순종하며 그의 성령에 유순하게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참된 평화는 하느님의 자비로 얻어지는 것이지 인간의 의지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분의 사랑에 우리 자신을 내맡길 때 그분의 현존이 우리의 욕구를 가라앉히고 고치기 힘든 격정들을 평정시키신다.
만약 때때로 우리의 마음 속에 폭풍이 몰아치고 하느님께서 주무시고 계신 듯 보일지라도 우리가 그분을 진실로 신뢰한다면, 갈등 가운데에서도 여전히 깊은 평화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우리는 그분께서 갈등을 허락하시는 것이 순전히 우리의 마음을 정화시키고 우리의 인내심을 시험하고 그럼으로써 우리의 영적인 평화를 강화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완전한 그리스도적 고행은 역설적으로 우리의 덕행과 고행에 대한 용감함 안에 내재한 지나친 기쁨까지도 거부하는 것을 말한다. 성인들은 거만하지 않았고 자신만만한 사람들도 아니었으나 그들의 덕행은 그들을 부유하고 영적으로 강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오히려 복음의 예레미야 사람들처럼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가난함을 온전히 자각한 사람들이었다:
노여워 때리시는 매를 맞아
온갖 고생을 다 겪은 사람,
이 몸을 주께서 끌어내시어
칠흙 같은 어둠 속을 헤매게 하시는구나.
날이면 날마다
이 몸만 내리치시는구나.
뼈에 가죽만 남았는데,
뼈마저 부서뜨리시고
돌아가면 성을 쌓아 가두시고
정수리에 저주를 퍼부으신다.
앞길에 가시덤불 우거지게 하여
내 몸을 갈가리 찢게 하시고,
나를 과녁으로 삼아
화살을 메워 쏘시는구나.
당신의 살통에서 뽑아 쏘시는 화살이
내장에 박혀
날마다 뭇 사람에게
웃음거리, 놀림감이 되었다.
쓴 풀만 먹이시고,
소태즙만 마시게 하셨다.
주께서 돌맹이로 내 이름 부수기고
나를 땅에다 짓밟으시니
나는 언제 행복하였던가,
나의 넋은 평안을 잃었는데.
주여 이 몸 잊지 마시고,
굽어 살펴 주십시오.
이것을 마음에 새기며 두고두고 기다리겠습니다.
주 야훼의 사랑 다함 없고
그 자비 가실 줄 몰라라.
그 사랑, 그 자비 아침마다 새롭고
그 신실하심 그지없어라.
“나의 몫은 곧 야훼시라” 속으로 다짐하며
이 몸은 주를 기다리리라.
야훼께서는 당신을 바라며 찾는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신다.
야훼께서 건져 주시기를 조용히 기다리는 것이
좋은 일이다.
(애가 3,1-5, 11-17, 20-26)
고행의 진정한 목적은 바로 이것이다 - 초연함에 대한 보상으로 마음에 평화를 얻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밤이라는 내적인 혼란 상태로 나아가 거기서 자신의 비참함을 영혼 깊숙한 곳에서부터 자각할 수 있게 되는 것, 그곳에서 그의 순결함은 지성과 영성의 순결함으로 변하며, 그의 순종은 인생의 매순간 성령에 대한 직접적인 의존이 된다. 복음의 정신에 따르는 이 숭고한 삶은 거룩한 사람들이라면 누구에게든 가능한 일이며, 그가 수도자이건 아니건 상관이 없다.
사도 토마스는 말하길: “완전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현세의 삶의 약함으로 인해 저지르는 사소한 죄 때문에 많이 괴로워한다”고 한다. 그는 덧붙여: “하느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일반적이며 보편적인 사랑을 베푸는 것으로 충분하며, 각각의 성향에 따라 주변 사람들에게 늘 그렇게 해야 합니다. 완전한 형제적 사랑이란 사랑에 반대되는 모든 것을 제외하는 것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과 심지어 원수들에게까지 사랑을 베풀며 그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 목숨까지도 희생하는 것을 말합니다.”
요약하면 현세에 있어 우리에게 가능한 완전함이란 어떤 것인가? 매 순간 하느님께 직접 향하는 그런 완전함은 아니며 - 심지어 반의도적으로 저지른 경미한 죄를 모두 피하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우리의 생각과 욕구, 행동이 그분에게로 적어도 실제적으로 향하기만 한다면 그리고 우리의 사랑이 순수해지기 위해 또한 봉헌이 온전한 것이 되게 하기 위해 가능한 노력한다면 그때 우리는 우리의 온 가슴과 마음과 영혼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의무에 진지하게 충실함을 뜻하며, 생을 통해 사랑을 베풀어야 할 때 기꺼이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완전함은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믿음과 그분의 자비로운 섭리와 사랑에 가능한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을 말한다.
[원문출처] <Life and Holiness>, 토머스 머튼
[번역문 출처] <참사람되어> 2000년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