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사흘 동안 늦은 장마가 왔다. 우울증 걸리기 쉬운 시간들이었다. 오줌을 아직 가리지 못하는 아이 때문에 빨래는 쌓이는데 햇볕은 감감 소식이 없었다. 고추밭엔 연일 내리는 비 때문에 먹이가 없는지 산비둘기 등 새들이 달려들어 풋고추든 붉게 여물어 가는 것이든 가리지 않고 부리를 갖다대어, 고추가 물이 차고 무지러져서 땅바닥에 질펀했다.
하늘이 개이자 마음이 바빠졌다. 이삭이 패기 시작한 논은 멧돼지 피해를 줄이기 위해 성기게라도 울타리를 칠 수밖에 없고, 넘어진 고춧대는 세워줘야 한다. 그래서 새로 말뚝이 여럿 필요했는데, 마침 아랫마을 분이 논에 오리를 부리느라고 쳐놓았던 울타리를 걷어낸다면서 거기에 박았던 쇠파이프 말뚝을 뽑아 쓰라고 한다. 고마운 일이지만 그걸 거저 갖다 쓸 수는 없는 노릇이라 대뜸, 그럼 고추 딸 때 도와드릴게요 약속했다.
그래서 며칠 전에 꼬박 열 시간 동안 쪼그리고 앉아서 아랫마을 농부의 고추를 땄다. 우리 집 고추래야 붉게 여문 놈이 한 포기에 서너 개씩 남아 있는데, 그 집 고추는 족히 스무 개는 됨직하다. 나중에는 왼쪽 무릎이 너무 아파서 다음날이 걱정될 정도였다. 농사짓는 비결을 캐물으며 열 가마쯤 되는 고추를 비닐 하우스에 부려놓고 돌아서는데 그분 말씀이, 제발 내일 하루만 더 도와줄 수 없느냐는 것이다. 요즘은 다들 저희들 고추 따느라고 놉을 살 수 없다는 거였다. 사정이 딱하긴 하지만 다음날은 다른 약속이 있었고, 내 무릎의 통증이 하소연하는 상황에서 힘들 것 같다고 어렵게 거절한 뒤 산길을 되짚어 올라왔다.
그날은 구천동에 혼자 사는 아저씨랑 익산에 가기로 몇 주 전에 약속했다. 대중교통으론 엄두를 내지 못하다가 내 화물차라도 얻어 타고 부모님 묘소에 다녀오고 싶다는 것이었다. 1년하고도 반년만이라는 성묫길이었다. 아침 일찍 구천동에 들러서 아저씨가 미리 차려놓은 미역국과 된장찌개로 아침밥을 먹고 길을 나섰다. 전북 익산 왕궁면에 자리잡은 원불교 공동묘지인 ‘영묘원’이었다.
마침 비까지 부슬부슬 내렸는데도 묘지가 양지바른 곳에 자리잡아서인지, 봄기운이 도는 것처럼 넓고 밝고 아늑했다. 2년 계약으로 전세방을 얻어 구천동에서 민박을 하지만, 돈벌이에는 영 취미를 붙이지 못하고 그저 사람들 보는 재미에 머물러 있는, 뒷모습이 좀 쓸쓸한 쉰 살의 아저씨. 우연한 기회에 인연이 되어 서로 객지에서 가끔씩 오가며 정을 쌓고 있는 중이다.
시대산 기슭에 자리잡은 영묘원에는 무덤에 봉분이 없었다. 평장(平葬)이라고 부르는 평평한 무덤은 시신이 누울 자리만 차지하였는데, 무덤 앞에 누워 있는 평평한 비석만으로 고인의 위치를 가리킬 뿐이었다. 아저씨 이야기로는 원불교 3대 대종사 되는 분이 제안한 방법이라는데, 공간도 많이 차지하지 않고 잔디 깎는 기계로 손쉽게 벌초할 수도 있어서 합리적이라는 것이다.
내려오면서 안내판을 읽어보니 ‘일원가족(一圓家族)’이라는 교리를 실현한 것이라고 설명되어 있었다. 곧 모든 사람은 가릴 것 없이 평등한 한가족이라는 것이다. 그걸 나는 사는 동안엔 육신 때문에 분리되어 있던 몸이 죽어서라도 한데 어우러지라는 뜻으로 새겼다. 묘지라기보다 그저 경사진 면을 따라서 길게 잔디밭이 펼쳐져 있는 것 같은 형상을 보면서, 아저씨가 봄에 여기 오면 누워서 한잠 곤하게 자고 싶은 기분이 절로 생긴다고 한 말이 실감났다.
한편 원불교 교무들은 이곳에 묘를 쓰지 못하고, 아래편에 자리한 납골당에서 모두 화장하게끔 되어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이것은 원불교에서 불교의 화장과 민간의 매장 관습을 적절히 조화시키려고 노력한 흔적으로 보인다. 죽음 자체를 대하는 태도와 삶의 흔적(시신)을 처리하는 방식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 탓일 것이다. 사람이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따름이라는 생각이나 무에서 왔으니 무로 돌아가리라는 생각은, 사람이 지상에 살되 허튼 얼룩을 남기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 살아서 어쩔 수 없이 다투고 시기하고 경쟁하더라도, 죽어서라도 모두가 본디 하나였음을, 하나의 원천, 그리스도교식으로 말하자면 하느님으로부터 나온 동무임을 기억하자는 뜻이 아닐까?
영묘원 납골당 왼쪽 동산에 헌혼탑이 있었다. 이것은 자기 육신을 의학교육과 연구에 기꺼이 기증한 영혼들의 넋을 기리는 탑이다. 거기에 쓰인 헌시가 마음을 잡아당겨서 비가 내리는 중에도 수첩에 옮겨 적었다.
"지금 여기 하늘과 땅 사이
광막한 이 사이
이 사람 이 사람들은
정녕 누구이시랴
여기에도 저기에도 어디에도
짐짓 없는 사람
온몸 티끌 하나까지 다 주고
다 벗어버리고
마지막 헌신공양
무아 무소주 무소유되어
이제 그 엄청난 절망 껴안고
절망을 넘어섰느니
우리는 비로소 이 사람으로 하여금
더욱 참된 세상을
온 누리 별빛 가득히
햇빛 가득히 맞이하노라
봄이면 꽃피고
가을이면 잎 지는 이 동산
저마다 뜨거운 절실한 가슴 아니고
어이 서랴
우리 님 그 한 조각 붉은 마음
여기 새기노라"
어느 순간 지상에서 내 생의 불꽃이 사그라지고 이젠 내가 ‘여기에도 저기에도 어디에도 짐짓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다는 것은 엄청난 절망일 것이다. 언젠가 믿기지 않을 만큼 분명한 현실이 될 죽음을 생각하면 얼마나 막막할 것인가? 블랙홀로 빨려들어가는 것처럼 아득한 현기증을 감당하는 길은 그 절망을 껴안는 방법밖에 없다고 이 시는 말하고 있다. 그래야 또 다른 나인 이 세상 사람들이 온 누리 가득히 별빛 햇빛 가득한 참세상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과 일치하는 길만이 죽음을 기쁘게 넘어서는 길이라고 했다. 그래서 이 세상을 위해 바치는 공양이 결국 자신을 위해 바치는 제사가 될 것이라는 이치다.
참 어려운 말이고 힘든 일이다. 언젠가 오랜만에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 죄도 이 그릇처럼 물로 한번 헹구어내서 처음처럼 뽀드득 소리가 날 만큼 깨끗하게 없어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말을 듣고 아내가 웃으며 말했다.
“그릇이야 깨끗이 닦아도 다시 예전처럼 더러워지지만, 사람이 한번 -진정으로- 회개하면 다시 죄짓더라도 예전 같지는 않을걸…”
결국 아무리 고단해도 빛을 향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아야 결정적 절망(죽음)을 넘어서는 사랑으로 설 수 있다는 말일 텐데, 고추를 둘러싸고 얕은 계산을 헤아리던 마음을 일상으로 넘어서야 한다는 말일 텐데, 작아 보이는 일일수록 더 촘촘해지는 나의 이기심을 매번 확인하는 것은 참 괴로운 일이다.
20년 동안 송광사 불일암에 살다가 강원도 산골의 화전민들이 살던 오두막으로 거처를 옮겼다는 법정 스님은 ‘숫타니파타’라는 불교 경전의 한 글귀를 오두막 한쪽 벽에 붙여놓았다고 한다. 언감생심 부끄럽게도 그 글을 손가락으로 짚어본다.
"홀로 행하고 게으르지 말며
비난과 칭찬에도 흔들리지 말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