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봄엔 비가 많이 내려서 가뭄 걱정이 없는가 했더니 유월 내내 ‘가뭄에 콩 나듯’ 비가 내렸다. 하늘에 기대어 짓는 5월 농사는 물 걱정 없이 치렀지만, 유월 가뭄은 당장에 샘물까지 말려버려 마실 물조차 염려하게 만들었다. 유월에 마지막으로 심는 고구마 모종은 때마침 한차례 내려준 비 때문에 간신히 심었는데, 물이 귀해지니 인심도 고약해진다. 얼마 전부터 쟁쟁하던 태양빛이 수그러들고 구름이 끼고 있었지만 빗방울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마침내 월드컵 축구 8강전에서 우리나라가 스페인을 기어이 이겨버린 다음날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축복처럼 내리는 비다.
그날 아침에 ‘가뭄 끝에 비’를 기념이라도 하듯이, 유태계 폴란드 동화작가인 유리 슐레비츠의 <비 오는 날>이란 그림책을 마루에 앉아서 딸아이에게 읽어주었다.
"…비가 와! 온 들판에 비가 와. 언덕 위에도 풀밭 위에도 연못에도. 쉿, 개구리야! 그만 울고 물속에 들어가 저 빗소리 들어보렴. 빗줄기가 장대같이 퍼붓고, 냇물도 쉴새없이 흘러내리는구나.
개울은 언덕을 굽이돌아 시내로 흘러들고, 쏜살같이 강을 지나 바다에 이르지. 파도는 넘실 굽이치며, 힘차게 밀려가, 철썩 세차게 물결치고 미친 듯이 콰르릉대며 솟구쳐 오르지. 바닷물이 부풀어올라 하늘에 녹아드네.
비가 와. 내일은 새싹이 돋을 거야. 새들은 거리에서 몸을 씻겠지. 우리는 맨발로 물웅덩이를 뛰어다니고 따스한 진흙탕에 발자국도 찍을 테야. 난 물웅덩이 속의 조각 하늘을 뛰어넘을거야.
온 마을에 비가 내려. 창가에선 화초가 움트고 있을 거야. 난 그걸 알 수 있어."
아이가 요즘 말을 배우고 있다. 바다. 아이는 호수를 보아도 바다, 연못을 보아도 바다, 하물며 하늘을 가리켜도 바다, 라고 말한다. 아이에게는 파랑색이 전해주는 어떤 이미지가 있다는 것인지, 하늘과 바다는 다르지 않았다. 아이들의 의식 세계에선 하늘에서 바다로 빗방울이 떨어지든지, 바닷물이 하늘을 적시든지 구분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모양이다. 비(또는 물)의 원천이 바다든 하늘이든, 비는 거리와 산천의 묵은 때를 말끔히 씻어내고 싱싱한 생명력을 북돋아 준다. 어쩜 축 처진 우리의 생애를 다시 살게 해주는 희망 같은 것인지 모른다.
산골에 사는 농부에게 가뭄 끝에 비처럼 생기를 주는 경사가 없을 테지만, 더 깊은 차원에서 생기를 주는 것은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사는 게 고단해도 고생스러워도 신명나는 어떤 것 하나쯤 마음속에 담고 살아야 정말 산다고 느끼는 것이 아닐까? 누구나 ‘시퍼런 동해바다 한가운데서 자유롭게 헤엄치고 있을 고래 한 마리’쯤 기대하고 사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고래가 당장에 잡히지 않더라도 그 고래가 분명히 있다는 것, 언젠가 잡을 수 있다는 꿈을 꾸어도 허황한 욕심은 아닐 것이다. 빗소리만 듣고도 어디선가 생명이 움트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아이처럼, 하루하루가 엄청난 기대 속에서 새롭게 열리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재간이 없을까?
그러나 세상은 우리를 한사코 땅바닥으로 끌어내린다. 오늘 필요한 양식이 있는지, 가족들의 생계를 감당할 자신이 있는지, 국가가 요구하는 세금을 납부할 능력이 있는지 묻고 있다. 당신의 이상은 일단 접어두고 눈앞의 현실을 어찌할 것이냐고 따지고 있다. 책상 위에 놓여진 손바닥만한 전자계산기보다 더 얼굴이 작게 느껴지는 순간, 대부분의 생활인들은 연거푸 곤두박질치는 하루분의 ‘구체적’ 고뇌에 시달린다.
몇 달 전 서울에 올라갔다가 서점에서 책을 몇 권 산 적이 있다. 산골에 들어와 살기 시작한 뒤로 서점만큼 반갑고도 곤혹스런 공간이 없었다. 대형서점일수록 그 증세가 심해진다. 장정 자체가 눈길을 끌고, 보고 싶은 책들이 너무나 많았다. 지식 세계가 엄청나게 빨리 발전한 것 같은데 나만 묵은 책들을 끌어안고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 같은 불안감이 몰려온다.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생각을 담은 새로운 책들이 뻔뻔스럽다는 듯이 내 얼굴을 쳐다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책들은 새로운 만큼 값도 엄청나게 비쌌다. 내친김에 644쪽이나 되는 <로자 룩셈부르크 평전>이란 책을 2만원이란 큰 돈을 들이고 샀다. 속표지를 들추자 아름다운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의 이런 글귀가 선언처럼 눈을 아리게 했다. “나는 이상주의자이며, 이상주의자로 남고 싶다.” 이어지는 글은 드넓은 바다처럼, 높이를 모를 하늘처럼 내 마음을 움직였다.
따라서 인간으로 남으려 노력한다. 그것이야말로 진정 본질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굳세고 명석하며 유쾌하다는 것. 그렇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유쾌하다는 것이다. 인간으로 남는다는 것, 그것은 필요하다면 자신의 삶 전부를 ‘운명의 위대한 저울 위에’ 던지는 것이지만 동시에 태양이 빛나는 하루하루를, 아름다운 구름이 흘러가는 하루하루를 유쾌하게 만끽하는 것이다…. 세계는 온갖 끔찍함들에도 너무나 아름답다. 만일 지상 위에 파렴치한 인간들과 비겁한 인간들이 없다면 세계는 훨씬 아름다울 것이다.
해설에 따르면 유태인 출신에 절름발이였고, 그래서 여러 가지로 무시당할 수밖에 없었던 여자. 사회주의 혁명이 유럽을 휩쓸던 시절 레닌에 맞먹을 만한 혁명이론가였으며 레닌의 관료주의와 공포정치를 비판하고 사회주의와 민주주의의 통합을 주장했던 여자였다.
그러나 그 책을 가방에 넣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편에선 지불된 책값이 책무게만큼 무거웠던 게 사실이다. 책을 먹고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만 어느 잡지에서 누군가 이야기한 것처럼 ‘행복의 질량보존 법칙’이 그나마 위로가 되었다. 물질적으로 좀 곤궁해지면 그만큼 영적으로 부자가 될 것이라는 논리다. 돈은 에너지이고 그 에너지를 물질적 행복에 줄 수도 있고, 정신적 행복에 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어제 오늘 내린 비가 가뭄 끝에 단비였다면 며칠 뒤부터는 지루한 장마를 걱정하게 될 것이다. 장엄하게 숲을 덮으며 내리던 장대비가 지긋지긋한 낙숫물 소리로 들릴지 모른다. 그건 그때 일이고 오늘은 오늘의 비를 유쾌하게 만끽함이 옳겠다. 구약의 ‘전도서’에서는 하늘 아래 새것이 있을 리 없다고 했으나, 신약의 ‘묵시록’에선 새 하늘 새 땅이 열릴 것이라 한다. 어제 내린 비가 오늘 내리는 비와 똑같지 않듯이, 하늘 아래 모든 게 새것일 수도 있겠다.
오늘 기쁨이 있으면 내일 슬픔을 감당할 생각을 갖고, 오늘 고통이 있으면 내일 위로받을 것을 기대함이 어떨까? 바다와 하늘이 실상 다르지 않다면 기쁨 속에도 슬픔이 배어 있고, 고통 속에도 위로가 있음을 생각하면 어떨까? 내 마음이 먼저 정돈되지 않으면 현실과 이상은 서로 겉돌기 마련이다. 딸아이처럼 거침없이 하늘을 바다라고 말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