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모린의 쉬운 에세이 "무엇이 인간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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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모린의 쉬운 에세이 "무엇이 인간적인가?"
  • 참사람되어
  • 승인 2020.02.06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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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모린 이야기] 마음의 혁명-1

삶의 배경과 선물들의 상호보완성이 모린과 도로시 데이의 만남을 어떤 섭리로 이루어지게 했다. 모린이 한 프랑스의 농부요 한 지식인으로 아메리카에서 방황하며 세계에서 영적인 것의 최우선성과 이 영적인 것을 키우기 위하여 사회재건의 필요성을 느꼈다고 결론지었다면, 도로시 데이는 한 사회주의자였으며 아메리카의 도시중심지역에서 새로운 자유를 체험하였고 방황하다가 마침내 한 인간의 총체성, 완성이 영적인 확신에 있다고 결론지었다.

모린은 기질과 학습에 의하여 역사와 가톨릭 전통의 영성에 빠져있었고, 데이는 그의 언론가적인 능력으로 인해 인쇄물로 이러한 모린의 사상을 적극적으로 보급할 수 있었으며 그의 강한 기질로 가톨릭일꾼운동을 창설함으로써 모린의 이해를 구체화했던 것이다. 또한 데이는 모린에게 부족했던 산업노동자에 대한 관심과 도시에 관한 방향을 첨가시켰다.

두 사람의 만남이 지니고 있는 예언적인 측면은 그들의 영적인 소명의 깊이로 파악될 수 있다. 즉 자신을 포기하려는 기꺼움, 미래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에 현재에 반대하여 우뚝 서는 능력, 성공과 실패에 대한 끈질긴 의지, 개인적 사회적 구원 추구에 다른 사람들을 포함시키는 능력 등은 이 영적인 깊이를 잘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가톨릭일꾼운동은 신문과 함께, 이러한 만남에서 자라났다. 시작부터 이후 60년이 넘도록 운동은 확고한 위치를 유지해왔다. 즉 철저한 행동과 공동체의 중심에는 영성이 자리잡고 있으며, 개인적이고 농사를 짓는 생활방식은 의미있는 노동을 제공해주고 공동체적인 나눔은 개인의 내적인 차원들과 사회적 질서를 올바로 형성하며, 자급자족하고 협동적인 질서는 소비자 중심적이고 경쟁적인 질서가 약속하는 왜곡된 자유에 반대되는 참다운 자유의 상황을 만들어주었던 것이다.

이상을 향하여 움직이도록 고안된 프로그램은 인식의 명료화를 위한 토론과, 사람들의 필요에 응답하고 보다 큰 공동체를 증언하는 삶, 도시 거주자들에게 땅에서 살아가는 공동체가 이루어내는 효능과 영적 생활을 가르쳐주는 협동농장인데 이 모두가 변하지 않고 계속되어 온다. 그러나 가톨릭일꾼의 구성원들은 이러한 입장들을 단순히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현재 살아내고 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같이 되기 위하여 그들은 가난해진다. 신앙의 의무를 증언하기 위하여 그들은 기꺼이 다른 이들을 섬기고 전 미국에서 개인적인 헌신으로 사람들을 돌본다. 신비체를 증언하기 위하여 그들은 국가나 자신의 보호에 폭력사용을 거부한다. 운동을 땅에 환원시키기 위하여, 그들은 농업공동체들을 만든다. 창설자들처럼, 운동의 구성원들은 정의와 자비의 일상 활동 속에서 이론과 실천을 통합시킨다. 이것이 바로 일꾼운동의 예언적 증언에 열쇠가 된다.

 

신문에 대한 놀라운 반응

새로 태어난 모험의 낙관주의와 1930년대 아메리카 가톨릭인들 사이에서 보여지는 일관성 있는 관점으로 인해 운동의 초기영향은 그 구성원들의 숫자보다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다. 1930년대 중반에 가톨릭일꾼신문은 10만부를 넘어 증가하고 있었으며, 역동적인 가톨릭주의에 관심을 두었던 젊은층들과 노인층에 영향을 많이 주었다.

예수회 신부인 죤 투미는 이렇게 표현하였다. “신문에 대한 반응은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처음부터 이 신문은 수백만의 말해지지 않은 사상을 소리내고 있는 것 같았다.” 신부들은 그들의 교회를 위해 수백 부씩 주문하였고 수녀들은 그들의 학교를 위해 신문을 사들였다. 농민들, 광부들 그리고 방직 노동자들이 신문을 읽고 있었다. 함부르크의 한 사제는 매달마다 함부르크 부두에서 그가 만나는 미국, 영국계 선원들에게 신문 백부씩을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호주의 평신자들이 그곳에서도 신문을 뿌리고 있었다. 투미 신부는 매월 가톨릭일꾼신문이 “작은 가톨릭 모니터가 되어 붉고 반동적인 움직임들에 교회회칙의 불길을 쏟아 붓고 있었다”고 결론지었다.

모린의 말

모린 자신은 몇 개의 글에 주인공이 되었다. 어떤 사람은 모린을 급진주의자들에 대한 사도라고 불렀다. 부르니니는 유니온 광장에 모인 사람들에게 이제는 친숙하게 된 모린의 기술에 대해서 설명하였다:

모린은 가두연설을 하지 않았다. 청중 앞에서 그는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 쪽 연사들에게 질문을 하고 가톨릭 교회의 입장을 옹호한다. 아니면 한 명 혹은 두 세 명의 구경꾼들과 토론을 시작하고, 점차 군중을 모으고 비록 처음에 듣던 사람들에게만 말하는 것처럼 표면상 보여도 그 군중에게 말하고 있다.

모린의 말속에 등장하는 공산주의자들은 가톨릭노동자들을, 그렇지 않으면 침묵으로 일관했을 사람들에게 “결정적으로 표현하도록” 만드는 진가를 발휘하였다. 부르니니의 관점에 따르면, 이것이 그들(노동자)의 신앙을 더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모린이 인식의 명료화를 위하여 도입했던 토론의 방식이 최근 교종들에 의해 옹호되었다고 부르니니는 말했다.

죤 라화지는 <아메리카>(America)라는 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모린을 사랑스럽지만 비판적으로 표현하였다. 모린은 재물이라는 복잡한 문제에 대하여 도덕을 적용시키고자 했던 노인이고 평화스러운 사람이라고 평가하면서, 라화지는 모린의 주장이 5세기전에는 사람들에게 익숙했으나 현재에서는 혼란스럽다고 생각하였다:

"벌어진 창 틈새로 울리는 소리 때문에 벨을 누를 수 없을 때이다... 사회조사나 기타 훌륭한 졸업논문에 관한 회의에서 토론이 시들어지면, 피터가 일어나 -키가 그다지 크지도 않고 눈에 잘 띄는 그런 어정쩡한 모습으로- 서두도 없이 청중들에게 '첫 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한 이들을 개인의 희생으로 먹이고 입히고 또한 잘 곳을 마련하였다' 고 말한다."

모린은 다음과 같이 말을 계속할 것이었다:

"그리고 가난한 이들에게
먹이고 입히고 잘 곳을
개인의 희생으로 마련하였기 때문에
믿지않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곤 하였다.
'자, 그들이 어떻게 서로를 사랑하는가 보아라.'
오늘날
가난한 이들은 더 이상
개인의 희생에 의해
먹거나 입거나 잘 곳이 마련되지 않으며
세금을 내는 사람들에 의해 그렇게 된다.
그리고 가난한 이들은 더 이상
먹거나 입거나 잘 곳이 마련되지 않는다.
믿지 않는 이들은 그래서 이렇게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말한다.
'자, 그들이 어떻게 짐을 던져버리는가 보아라.'"

라화지에게 모린은 그가 가르쳤던 단순함과 가난의 생활을 직접 살았다는 점에서 특히 중요한 사람이었다. 모린의 소리가 예언적이라고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라화지는 날카로운 질문들을 제기하였다. 모린에게 아내와 부양할 여섯아이들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가 제시한 이상들이 세계의 경제적 병폐에 어떤 일반적인 해결책으로 심각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을까?

모린은 이런 이상들이 노력해야 할 어떤 것이며, 뿐만 아니라 이상을 향한 일꾼운동은 오직 토론과 인식의 명료화를 통하여 달성될 수 있다고 답변하였다. 청사진을 제시하는 대신, 모린은 무시될 수 없는 질문들을 제기하고자 했다. 그의 소명이 독신의 생활을 하는 것이라면, 특히 그의 농장공동체들은 가족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이었다. 이런 질문들이 라화지에게는 여전히 미심쩍은 것이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모린에 대한 존경이 줄어들지는 않았고 모린의, 아직은 이론적인 농장공동체들이 성공하도록 기도하겠다고 약속하였다.

또 다른 이들은 모린의 모험이 성공하기를 기도했다. 1934년 11월, 프랑스의 토마스주의 철학자인 쟈끄 마리땡이 일꾼운동을 방문했고 모린과 의견을 나누었다. 떠나면서 그는 모린에게 이렇게 썼다:

"내 마음속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처럼 능숙하게 영어로 말할 수 없는 나의 무능력이 괴로운 적이 없었습니다. 나는 가톨릭일꾼운동에서 다시한번 마치 소르본느가에 있는 페기의 사무실 같은 분위기를 본 것 같습니다. 이렇게나 많은 선의, 이같은 놀라운 용기, 엄청난 관대함이라니요! 이렇게 부족한 수단과 엄청난 사랑으로 우리가 갈망하는 미래가 준비되고 있군요."

 

모린의 가톨릭일꾼 일보

모린의 글들 역시 더 많은 사람들의 주의를 끌기 시작하였다. 1934년 1월과 7월에 <가톨릭정신>은 가톨릭 액션의 역할과 사회재건설의 부르심을 다루면서 모린의 쉬운 글들에서 몇가지를 인용하였다. 또한 동시에 모린의 쉬운 글들은 가톨릭일꾼운동 출판부에 의해 작은 책자로 인쇄되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책자들은 2쪽에서 30쪽 분량으로 아주 적은 푼돈에 살 수 있었으며 환대, 고리대금 그리고 자비활동에 관한 쉬운 글들을 실었다. 이 작은 책자 역시 공동선이라는 잡지에 짤막하게 소개되었다.

모린의 쉬운 글들은 월보의 연장으로서, <가톨릭일꾼 일보>로 발간되었다. 8쪽에서 12쪽 사이의 인쇄된 신문대신, 이것은 하루에 천 부 정도로 축소판의 한 장짜리 호외처럼 배포되었다. 여기에는 그날의 뉴스에 대한 도발적인 의견과 모린의 쉬운 글 하나가 요약된 형태로 실렸다. 모린 자신에 의해 제안된 이 선동적인 실험은 겨우 한달가량 지속되었지만, <아메리카>지는 여기에 대해 언급하면서 뉴욕시에서 제일 먼저 발행된 가톨릭일보라고 소개했고 노동자들의 호소와 사회정의 주장에 관심있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신문이라고 하였다.

모린의 “쉬운 글들”은 가톨릭일꾼운동의 상표처럼 되었다. 중요한 주제를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전달하기 위하여 이 글들은 외울 수 있고 암송하기 쉬운 말들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글들의 핵심은 역동적인 힘과 어떤 긴급성을 충분히 담고 있었으며 사회질서와 교회에 대한 비판적인 날카로움이 있었다. 아마도 모린의 가장 유명한 쉬운 글은 1933년 5월 가톨릭일꾼이 발간한 1차 편집본에 수록된 글일 것이다:

가톨릭교회에 대해 쓰면서, 한 급진적인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로마는 기다리는 놀이를 하는 것 이상을 해야 할 것이다. 교회는 자신의 메시지 안에 있는 역동적인 어떤 것을 사용해야 할 것이다.' 메시지의 다이너마이트를 터뜨리는 것은 오로지 메시지를 역동적으로 만드는 것 뿐이다. 가톨릭교회가 오늘날 사회의 지배적이고도 역동적인 힘이 아니라면 그것은 가톨릭학자들이 교회의 다이너마이트를 터뜨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톨릭학자들은 교회의 다이너마이트를 훌륭한 말로 잘 싸서 아주 깊숙한 곳에 담아 사용금지라고 써붙였다. 이제 이 뚜껑을 날려버리고 가톨릭교회가 다시한번 사회의 역동적인 힘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할 때가 왔다."

모린은, 성직자와 평신도 모두가 교회의 다이너마이트를 터뜨리지 못한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평신도들은 성직자들에게 그들의 일에 상관하지 말라고 했고, 특히 경제 정치문제에 개입하지 말라고 하면서 교의와 도덕의 영역에나 꼭 붙어있으라고 하였다. 이런 취급에 동의하면서, 성직자들은 스스로 사람들로부터 분리되었고, 대중과의 만남을 소홀히 했던 것이다. 이렇게 대중으로부터 떨어져나감으로써, 성직자들은 사회질서와의 접근에 실패했으며 신앙과 사회개혁을 통합할 수 있는 신학에 근거하는 사회학을 마련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이 모린을 실망시켰다. 결국 성직자들은 지도력을 갖지 못하거나 관심이 없었고 따라서 가톨릭적 행동을 위한 지도력을 수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지도력 결핍으로 사람들은 교회를 떠나고 있었고 맑시즘과 파시즘에 점차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by Eichenberg, Fritz

환대의 의무

모린의 새로운 메시지는 또한 40년 후 같은 교회 회칙의 실패에 대하여 실망감을 표현하였다. 이런 회칙은 접근방식이 더 제도화되었고 프란치스꼬에 관한 회칙들이 제시한 개인적 책임감의 사상을 담아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것은 마치 “슬프고 걱정이 많은 아버지가 끊임없이 서로 싸우고 있었던 아이들에게 ‘너희들은 이상을 따르지 말고 내가 제시하는 또다른 프로그램 - 조직을 따라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았다.

가톨릭일꾼학교의 모임에서 연사들이 뉴딜정책에 관한 교종의 지지를 인정할 때에 모린은 일어나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 가장 큰 위험은 파시즘이며 모든 조직은 다 파시즘에 이르는 성향을 갖고 있다.”

모린의 비판은 항상 건설적인 제안의 추구와 균형을 맞추었다. 즉 다이너마이트를 터뜨리는 것은 실질적인 결과를 만들었고 다른 사람들이 따를 수 있는 길을 요구하였다. 1933년 10월의 <가톨릭일꾼> 신문에 실린 모린의 “미국 주교들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은 이 균형에 대해 지적하고 있다.

환대의 의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그리고 구걸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은
도움이 필요치 않은 사람들에게
선행 자체를 위하여 선행할 기회를 주고 있다.
현대사회는 구걸하는 사람들을
부랑자요 거지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신들이 보낸 사자라고 말하곤 한다.
비록 당신들은
부랑자요 거지라고 불리울지 모르지만
실상 당신들은 하느님의 사자들이다.
하느님의 사자들로서
당신들에겐 식량과,
옷과 피난처가
그것을 줄 수 있는 사람들에 의해
주어져야 한다.
마호멧의 교사들은 우리에게
하느님은 환대를 명령하시고,
이 환대는 아직도
마호멧 국가에서 실천되고 있다고 말해준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국가에서
이 환대의 의무는
가르치거나 실천되지 않고 있다.
시립 수용소
도움이 필요한 당신들이
부자들의 집에서 하루밤을 보내도록
초대받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오늘날 부자들의 집에는
손님방이 있지만
그 방들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쓰여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방을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방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더 이상 하느님의 사자들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환대를
더 이상 개인의 의무로 여기지 않는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시로 보내어
세금을 내는 사람들의 부담으로
그들이 “시립의” 환대를 받도록 하는 것이
전혀 부담스러운 일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시립”이 소외되고 낙오된 이들에게 주는 환대는
더 이상 환대가 아니다.
그것은 세금을 내는 사람의 지갑에서 나오는 것이지
그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환대로 돌아가기

가톨릭의 실업자들은
“시립”으로 보내지지 말아야 한다.
가톨릭의 실업가들에게는
가톨릭 환대의 집에서 환대가 주어져야 한다.
가톨릭 환대의 집은
유럽에서 호스피스로 알려져 있다.
콘스탄틴 이후 유럽에는 호스피스가 있어 왔다.
호스피스는 무료의 손님집들이다.
호텔은 손님들이 비용을 내는 곳이다.
그리고 돈을 내는 손님 집들이나 호텔은 너무 많다.
그러나 무료 손님 집이나 호스피스는 너무 적다.
그래서 다른 모든 것처럼, 환대도
상업화 되고 있다.
그래서 다른 모든 것처럼, 환대도
이제 이상화되어야 한다.
환대의 집들
우리는 부자들에게
가난한 이들을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환대의 집들이 필요하다.
우리는 주교들을 사람들에게로 데려가고
사람들을 주교들에게 데려가기 위하여
환대의 집들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기관들이 기관으로서의 기술을 회복하기 위하여
환대의 집들을 필요로 한다.
이상이 실천될 때에
그것이 어떤지 보여주기 위하여
우리는 환대의 집들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가톨릭 기관에서 수행되는
가톨릭 액션을 통하여
사회정의를 회복시키기 위해
환대의 집들을 필요로 한다.

모린의 많은 서한들에 대해, 주교들은 말로나 행동으로 거의 응답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모린은 계속해서 수동성과 불의에 대해 비판하고 평화와 정의의 길을 제시하였다. 그는 응답의 가능성에 대하여 그 반대의 확실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낙관적인 태도를 취했다. 간단하지만 깊은 감동을 주고 있는 쉬운 글에서 모린은 무엇이 인간적인가에 대하여 그의 핵심적인 이해를 요약하였다:

1. 주고 빼앗지 않는 것
그것이 사람을 사람답게 만든다.

2. 섬기고 지배하지 않는 것
그것이 사람을 사람답게 만든다.

3. 도와주고 부수지 않는 것
그것이 사람을 사람답게 만든다.

4. 키우고 먹어치우지 않는 것
그것이 사람을 사람답게 만든다.

5. 그리고 필요하다면 죽고 살지 않는 것
그것이 사람을 사람답게 만든다.

6. 이상적인 것 그리고 거래하지 않는 것
그것이 사람을 사람답게 만든다.

7. 믿는 것 그리고 탐욕을 가지지 않는 것
그것이 사람을 사람답게 만든다.

 

[출처] <참사람되어> 2000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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