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축을 키우자 하면 새로 얻은 목숨에 대한 환희와 더불어 상실의 아픔을 일상으로 경험하게 되는 모양이다. 내 손길이 닿으면 내 식구가 되고, 그 시간이 길어지면 그만큼 짐승에게도 정(情)이 쌓이게 마련이다. 산골에 들어올 때부터 3년 가까이 함께 살던 고양이가 지난 겨울 며칠 동안 집을 비운 사이에 증발해 버려 다시는 ‘이야옹’ 거리며 머리를 비비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마을에 갑자기 늘어난 개들의 등쌀을 이기지 못한 탓인지, 아님 제때에 밥을 챙겨주지 않는 주인에 대한 원망 때문인지 한번도 사람을 할퀴는 법이 없었던 온순한 우리 고양이가 아예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 때문에 아내는 한동안 마음이 좋지 않아서 뒤척였고, 나는 길을 가다가 고양이만 지나가도 혹시나 그 녀석이 아닌가, 다시 살피곤 했다. 반 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그게 하나의 버릇으로 남아 있다.
그뿐인가? 닭을 키우면서 부실한 닭장을 뛰쳐나간 암탉 한 마리를 윗집 개에게 넘겨주고 식구를 지키지 못한 아비의 자책감 비슷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그 개의 주인이 몇 달 뒤에 얻어다 준 암탉 두 마리. 신체 건강한 그 녀석들은 날마다 두 알씩 뽀얀 달걀을 낳아 주었지만, 대신에 한 마리 남아 있던 다른 암탉을 괴롭혔다. 그 암탉은 마침 알을 품고 있었는데, 수탉이 새로 얻은 건강한 암탉 두 마리의 질투에 동조라도 하듯이 알을 품고 있는 암탉을 따라서 괴롭혔다. 결국 암탉은 스무 하루가 지나고 한 달이 다 되어도 알을 부화시키지 못했다. 그리고 여전히 외톨이가 되어 닭장 귀퉁이를 맴돌았다. 한 주일쯤 지나자 다시 원기를 회복하고 그 암탉이 천명이라도 되는 듯 다시 새로운 알들을 품기 시작했다.
그뒤에 아랫마을에서 자연 부화한 병아리를 한 달 동안 키워서 주겠다는 전갈을 들었다. 한 달치 모이로 벼 나락을 갖다 주고 얼마 전에 제법 깃털이 자란 중병아리 세 마리를 얻어왔다. 이번 참에 아예 닭장도 두 배로 넓혀주었다. 어린 병아리들의 삐악거리는 소리가 퍼지기 시작하자 닭장에 활기가 도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틀이 지나자, 어쩌면 고약하달 수 있는 암탉 두 마리가 병아리들에게 부리를 들이대며 눈치를 주고, 궁지에 몰린 병아리들은 알을 품고 있는 외톨이 암탉을 어미 삼아 놀았다. 등에도 올라타고 날개로 비집고 들어가 잠을 자고 주변에서 떠나지 않았다.
의지할 데 없는 녀석들끼리 뭉쳤다고나 할까, 이른바 ‘약자연합(弱者聯合)’을 이룬 것이다. 나중에 들으니 닭들의 세계에서도 약한 놈은 밀어내어 아예 도태시켜 버린다는데, 약한 녀석들끼리 서로 어미·자식 삼아 의지하니 불행중 다행이라 하겠다. 알을 품던 암탉 역시 병아리들을 제 새끼인 줄 알고 더이상 알을 품지 않는다. 병아리들과 어울려 다니는 게 둥지에 주저앉아 있는 것보다 궁상맞아 보이지 않아서 보기 좋지만, 둥지에 댕그라니 놓여 있는 알들이 적적해 보인다.
내 나이 갓 마흔인데, 그래서 죽음이 아직 실감나지 않는 나이일 텐데 주변에서 가끔씩 부음을 듣는다. 닭장에 갓 들어온 병아리 가운데 한 마리가 벌써 실종되었는데 쥐가 물어갔을 거라는 이야기도 있고, 어딘가 허술한 구멍으로 빠져 나갔다가 영 돌아오지 못했을 거라는 추측도 나왔다. 신통찮게 자라는 모를 바라볼 때의 씁쓸한 심정으로 나 자신을 본다. 맡겨진 목숨을 부실하게 돌본 자의 뒤끝을 생각하면 답답하다.
얼마 전에는 아내를 천주교 신앙으로 이끌어 주었던, 그리고 인생의 특별한 순간에 특별한 의미가 되었던 친구가 암으로 이승을 떠났다. 부천에 있는 순천향대학병원 영안실에서 벽제까지, 그녀가 육신을 벗고 우리가 경험해 보지 못한 다른 세상으로 건너가는 통과의례를 곁눈으로 보면서, 아직도 피부에 와 닿지 않는 ‘죽음’을 생각한다.
벽제에서 그녀가 한줌 가루로 몸의 형태를 바꾸는 동안 나는 건물 밖에서 아이와 함께 있었다. 한 시간은 족히 되는 동안에도 열일곱 달 된 우리 딸 결이는 지루한 줄 몰랐다. 영구차가 몇 분 간격으로 계속 납골당 입구에 멈추었다가 긴 행렬을 남기고 떠나곤 했다. 아이는 계단을 연신 오르내리고, 잔디밭을 뒤뚱거리며 걸어다니고, 꽃을 보면 서투른 발음으로 “꼬, 꼬” 한다.
나무를 보거나 자동차를 보거나 음료수 자판기를 보거나 “이거 뭐야? 이거 뭐야?” 꼭 두 번씩 물었다. 모든 게 신기해서 호기심을 자극하고, 세상 것을 모두 알기라도 해야 하는 듯이 묻고 또 묻는 데 지치지 않는다. 그러면 아이가 알아듣든 알아듣지 못하든 상관없이 아는 대로 설명해 주고 “그래, 그래” 맞장구를 쳐준다.
지금 아이는 엄마, 아빠, 밥, 물, 꽃, 오이, 닭을 보고 반응하고 발음한다. 아직 발음하지 못하더라도 알고 있는 세계는 더 많을 것이다. 자기를 보살피는 부모와 먹고 자고 싸는 일, 그리고 일상에서 언제든지 접할 수 있는 환경에 대해서 먼저 터득할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죽는 게 뭐야?’라는 곤란한 질문을 던지는 날도 있을 것이다. 산다는 게 뭔지 궁금해하는 순간 죽음은 더불어 따라붙는 화두가 된다.
지금 나는 나에게 세뇌중이다. 거듭거듭 되풀이로 나 자신에게 답한다. ‘죽음’이란 말은 적절하지 않다고. 죽음, 그 발음이 풍기는 분위기가 너무 무겁고 칙칙하다고, 본질을 헛갈리게 만드는 말이라고 다짐을 둔다. 우리말로 ‘돌아가셨다’란 좋은 표현이 있고, 천주교 성가에선 ‘본향(本鄕)으로 돌아갔다’는 표현을 많이 쓴다. 내 영혼의 고향으로 다시 되돌아가는 사건이 죽음이라면, 죽음은 그다지 두렵지 않고 오히려 친숙한 공간으로 영혼을 옮기는 반가운 사건이 된다. 그리고 신앙인들에게는 오매불망하던 하느님 나라의 시민이 되는 ‘통로(通路)’라니 죽음은 얼마나 우리를 안심시키는 것인가?
심수봉이란 가수가 부른 <백만 송이 장미>라는 노래가 있다.
"먼 옛날 어느 별에서 내가 이 세상에 나올 때
사랑을 주고 오라는 작은 음성 하나 들었지
사랑을 할 때만 피는 꽃 백만 송이 피워 오라는
진실한 사랑을 할 때만 피어나는 사랑의 장미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
아낌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 할 때
수 백만 송이 백만 송이 백만 송이 꽃은 피고
그립고 아름다운 내 별나라로 갈 수 있다네.
진실한 사랑은 뭔가. 괴로운 눈물 흘렸네
헤어져 간 사람 많았던 너무나 슬픈 세상이었기에
수많은 세월이 흐른 뒤 자기의 생명까지 모두 다 준
빛처럼 홀연히 나타난 그런 사랑 나를 안았네
이젠 모두가 떠날지라도 그러나 사랑은 계속될 거야
저 별에서 나를 찾아온 그토록 기다리던 이 있네
그대와 나 함께라면 더욱더 많은 꽃을 피우고
하나가 된 우리는 영원한 저 별로 돌아가리라"
1979년 박정희 전대통령 피살 때 궁정동 현장에 있었다는 그 가수가 파란만장한 젊음의 갈피를 헤집고 나와서 발표한 그 앨범에는 “심수봉이란 가수가 ‘그때 그 사람’으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후, 그리고 10년하고도 또 얼마나 많은 해가 지나갔는지… 참으로 화살같이 지나간 것 같기도 하고, 또한 긴 동면에서 이제 막 깨어난 것 같기도 한,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제야말로 정말 가수의 길로 들어선 것 같은 마음”이라고 쓰여 있다. 그 길에서 발견한 죽음이란 ‘그립고 아름다운 내 별나라로 가는 것’이다.
미워하는 마음 없이 아낌없는 사랑을 선사하고 휴식을 취하러, 아님 더 빛나는 삶을 준비하러 가는 곳이다. 불교에선 죽음을 ‘입적(入寂)’이라 했다. 고요함으로 들어간다는 것, 번뇌망상의 세계에서 벗어나 평정의 세계에 들어섰다는 뜻이다. 그래서 남는 것은 죽음 자체가 아니라 사는 동안 사랑하는 것뿐이다. 사랑하다가 사라지는 것이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