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지금까지도 피터 모린과 도로시 데이, 또한 그들이 창시한 가톨릭일꾼운동은 많은 사람들에게 20세기의 예언적 목소리를 대표한다고 생각되어 왔다. 그들은 거대하고 관료적인 산업 사회와 정부에게 인격적이고도 지방 분권적인 사회를 제안한다. 그들은 자본주의자이든 소위 무신론적인 공산주의자이든 간에 도시의 탐욕적인 경제 대신 지역의 기능적인 경제를 제안한다. 그들은 세상적이고 권리지향적인 정신에 대하여 삶의 중심으로서 영성을 제안하고 그 영성의 필연적 결과로서 이웃에 대한 책임을 제안한다. 그들은 시장과 국가 안전을 지키기 위하여 무장한 세계에게 무장해제를 제안하며 심지어는 “적들”에게 해를 끼치는 것조차도 거절하도록 제안한다.
그러나 가톨릭일꾼운동에 대한 비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운동에 투신하고 있는 사람들을 존중하면서도, 어떤 이들에게 가톨릭일꾼운동은 현대세계에서 그러한 예언적 목소리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일어난 문제들은 중요하다. 경제 공황에서 시작된 인격주의와 땅을 강조하는 한 작은 운동이 도시 관료적인 시대에 필요한 거대한 사회 재건설에 맞서 어떤 희망을 보여주고 있는 것일까? 현대 세계의 기초들-정부, 관료 제도들, 산업-을 거부하는 한 운동이 우리 시대에게 어떤 결말을 말하는가? 로마 가톨릭 신앙의 언어로 말하는 한 운동이 다양한 종교들과 심지어는 세속, 국가 그리고 세계와 통교하는 것이 가능한가?
이와 비슷하게 미국 문화 속에서 가톨릭일꾼의 성장은 철저한 영성의 효과와 생존에 관한 중요한 질문들을 일으킨다.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과 계몽주의가 미국을 탄생케 하였고 서구 세계가 아직까지 이러한 운동들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다면 예언적인 음성들과 운동들은 어떤 미래를 가지게 될까? 가톨릭일꾼운동이 지향하는 이상들에 관한 토론은 이러한 질문들에 답을 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피터 모린의 예언자적 이상주의
피터 모린과 도로시 데이는 둘 다 가톨릭일꾼운동의 창시자들로서 그 운동의 방향과 정신에 영향을 주었지만 그 운동 뒤에 있는 힘과 이상들의 구체화는 모린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피터 모린은 캐나다로 이민 온 프랑스 농민이었으며 미국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소명을 추구하게 되었다. 그의 이러한 갈망은 강력한 가톨릭적 성장배경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영향에서 그를 벗어나게 만들었고, 금세기 첫 10여년 동안 불안정하게 유지하고 있었던 그리스도교 형제회 회원의 위치를 탈퇴하게 만들었다. 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뒤이어 일어난 세계 불황 속에서 모린은 그리스도교 이상들이 인간과 사회적 삶 안에서 어떻게 실현되는지에 관한 명료함을 찾았다.
외관상 모린의 이상들은 이상주의와 심지어는 단순주의로 보일지 모르나 다른 차원에서 볼 때 그것들은 거의 예언적이다. 모린은 공황 한 가운데에서 수공업, 경작 그리고 인격적인 생활 방식이 실현되는 지역 경제를 제안하였다. 이러한 삶의 근거는 기도와 공동 나눔을 흘러나오게 하는 신앙적인 확신이었다. 그것은 모린이 자발적인 가난이라고 부른 단순함 안에 집중되어 있다.
모린의 관점에서 보면 가난은 하느님의 부르심과 이웃에 열려 있는 것이며, 개인과 공동체가 모두 하느님과 이웃의 필요에 따라 살아가는 것을 의미했다. 공동체에 관한 모린의 비젼은 발전적이지도 진보적이지도 않았다. 그리고 힘을 추구하는 현대성의 맛은 그에게 아무런 유혹이 되지 못하였다. 그 대신에 모린의 비젼은 다른 사람들과 조화롭게 사는 것이었고, 육체적, 지적 노동이 생산한 것을 나누는 것과, 고요하게 되는 것과 공동체 안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었다.
투신에 관한 모린의 감각 또한 다른 사람들과 달랐다. 모린은 세속적인 근본주의자들, 자유주의자들과는 희망들을 나누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영적인 것을 배제한 ‘인간’에게 산업 사회의 물질적 풍요를 증가시키고 분배하는 것들만을 찾았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모린의 투신의 근거는 예수의 삶과 십자가에서 보여진 포기와 희생이었다. 영과 희생의 이런 삶에서 모린은 인간의 고결함을 회복하고 올바른 사회변혁을 가져오는 유일한 가능성을 보았다.
무엇보다 모린은 그리스도의 제자였다-유의미한 전통
아직까지도 현대에 대항하는 반대자로서 단순히 모린을 보는 것은 그의 사명과 삶의 근거를 놓치는 것이다. 예수의 삶과 죽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영적인 실재를 굳건하게 하는 것이고 제자가 되는 것이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먼저 모린은 그리스도의 제자였다. 그의 제자 직분은 사회변혁을 위하여 전개한 프로그램의 부속물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사회사도직을 불러일으키는 중심이었다. 제자 직분은 그 자신의 말처럼 전통-그가 덧붙여 강조했듯이, 비록 그 전통이 이 세계 안에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부르심에 역동적이고 충성스럽게 만들었지만-이었지 혁명이 아니라고 몇 번이고 반복한 그의 진술의 기초를 형성하였다.
모린에게 있어 가톨릭 전통은 서구 세계에 문화적 연속성을 제공하고, 현실을 비판하고, 새로운 사회질서의 기반을 형성함으로써 현대의 암흑기에 빛을 주었다. 첫 째로 가톨릭 전통은 어떤 연속성을 서구 세계에 제공하였다. 현대 생활의 문제들은 직접적으로 연속성을 제공하는 전통의 역할을 부정하는 것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모린이 자주 말해 왔던 것처럼 계몽 운동은 그러한 부정의 최고의 본보기였다. 전통의 상실은 단순히 세속화 그 이상의 것을 의미했다. 세속화와 함께 경제, 군사, 그리고 정치적 체제들은 영의 지도로부터 떨어져 나갔고 전통의 보호에서 벗어나는 이러한 자유는 인간에게 영원성과의 단절(차단)을 가져왔다. 모린에게 전통은 인간을 억압하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을 구하기 위하여 세계의 체제들을 재조정함으로써 그것들이 방향을 상실하지 않게 해 주었다.
또한 전통은 현실을 비판하는데 필요한 토양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전통은 현대문화의 편견을 바로 세우는데 도움을 주고 있는 것이다. 현대 사회는 경쟁과 이윤을 강조한다. 그러나 히브리 예언자들과 교부들은 가난한 이들을 옹호하였고 부유한 사람들에게 심판을 선포하였다. 현대 생활의 목적은 다른 사람들을 희생하고서라도 편안함과 사치로움을 찾는 것이다. 예수는 구원의 좁은 길로서 이웃을 위한 이기심 없는 희생의 의미를 보여주었다. 현대성의 미끼(유혹)는 물질 세계의 축적과 그 축적을 제도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 프란치스꼬는 영을 따르기 위하여 그리고 더욱 깊이 사랑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였다.
그러므로 모린에게 있어서 가톨릭 전통은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변혁을 위한 자원들을 마련했기 때문에 연속성과 비판 그 이상을 제공하였다. 예수는 이러한 변혁의 중심에 있으며, 믿는다는 것은 사랑과 봉사(섬김)의 새로운 삶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은 자신을 변혁하고 다른 사람들을 그 변혁으로 이끄는 삶에 깊숙히 관여하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 공동체들은 명백하게 이러한 이유들로 형성된다. 즉 하느님을 경배하는 것, 인간적인 삶을 가르치는 것, 더 넓은 사회생활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효능
모린은 과거로부터 공동체 안에 함께 모이는 그리스도인들의 효능을 증거할 수 있는 두 가지 사례를 인용하였다. 그 첫 번째는 적대적인 세계 속에서 그들의 신앙 때문에 고통을 받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라는 예수의 충고대로 자비 행위를 실천에 옮겼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배고픈 이를 먹이고, 벗은 사람을 옷 입히고, 집없는 이들에게 있을 곳을 주고, 병든 이와 감옥에 갇힌 이를 방문하고, 무지한 이를 가르쳤다. 진리와 투신의 증인들로서 이러한 공동체들은 추종자들을 끌어들였고 마침내는 주위의 적대적인 문화들을 극복하였다.
모린이 인용한 두 번째 사례는 붕괴되고 파멸되어 가는 로마 문화 한 가운데에서 그들 시대의 혼돈을 뛰어넘어 미래를 증거했던 아일랜드 수도자들의 사례였다. 아일랜드 수도자들은 농업과 교육적인 공동체들의 설립을 통하여 새로운 사회인 중세 그리스도교 국가의 기초들을 마련하였다. 이리하여 모린은 증거와 불굴의 노력을 통하여 기득 권력의 문화를 전복하기 위하여 아래로부터 솟아나는 변화의 씨앗들을 계획하였다.
사회변혁에 관한 이러한 사례들은 사회질서를 변화시키기 위한 모린의 계획들-사고의 명료화와 즉각적인 행동을 유발시키는 공동체에서 실행되는 원탁 토론들, 사람들의 요구들에 봉사하는 자비의 일들을 하고 보다 큰 공동체를 증언하는 환대의 집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땅에 뿌리를 내리는 단순함과 영성의 삶을 도시인들에게 소개하는 공동농장들-의 기초들을 형성하였다.
사회적 질서에 관한 모린의 예견들을 올바르게 볼 필요가 있다. 비록 모린이 그의 생애 마지막 수년간을 활성가로 살았지만, 그는 많은 20세기의 다른 세속적인 사회활동가들과는 달랐다. 모린은 사회질서가 하느님의 신비로 향하는 인간 여정을 보호하고 키워 주는 것이며 이렇게 하여 구원의 가능성을 더욱 더 증진시키는 유일한 사명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사회질서는 인간의 영적인 차원을 비춰보고 표현하는 것에 그 존재 의미가 있는 것이다. 거대한 규모의 산업, 풍요 그리고 군사주의 등 그 자체를 위하여 세워진 어떤 제도도 모린의 미래 사회에선 사라져야 할 함정이었다.
모린의 마지막 희망은 살아 있고 역동적인 전통으로서의 가톨릭 교회의 전통이 인간 구원의 이러한 메시지를 확장시키는 상황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교회는 예수의 말씀을 진실로 붙들고, 이 세계 속에서 예수의 목소리를 대표하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으며 사실상 그 이상을 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이 메시지를 도달케하고 확장시키는 것 말고 그밖에 더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모린은 구원의 메시지에 대한 인격적인 구체화라는 주제를 아주 심각하게 받아들였고 그의 마지막 생애는 이런 일들로 가득하였다. 1930년 53세가 된 모린은 이 활성화와 자선 실천의 삶을 추구하기 위하여 모든 것-집, 지위, 그리고 안락함-등을 포기하였다. 그가 길거리 모퉁이에서 말하기 위하여 뉴욕시에 왔을 때, 그는 가난한 사람으로 왔으며 뉴욕시의 싸구려 여관에서 묵었다. 모린은 가난의 실천이 가톨릭일꾼운동의 기반이라고 주장하였다.
아씨시의 프란치스꼬에서 출발한다
모린의 삶에 있어서 아씨시의 프란치스꼬의 영향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모린은 1920년대에 ‘명료화’를 체험하였는데 그 때에 그는 시카고의 프랑스어 교사에서 뉴욕의 순례하는 철학자로, 잡역부로 변신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당시 프란치스꼬에 관한 전세계적인 관심의 부활과 요한네스 요르젠센의 <아씨시의 성프란치스꼬>, G.K 체스터톤의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 그리고 레오 13세의 <성 프란치스꼬와 제3회>로부터 시작된 프란치스꼬에 관한 교황 회칙의 시리즈 등 그 자신이 읽은 책들과 관련되는 것이었다.
모린은 이러한 작품들을 읽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깊이 성찰하였다. 모린은 순례자였던 프란치스꼬에 관한 요르젠센의 이해를 그의 글에 인용하였다. 모린이 이렇게 인용하여 선택한 프란치스꼬의 삶은 아래와 같다.
"요한네스 요르젠센에 의하면,
아씨시에 살고 있는 한 회개한 덴마크인인 성 프란치스꼬는,
사람들이 남아도는 소유물들을 포기하길 갈망하였네.
성 프란치스꼬는 사람들이 그들의 손으로 일하길 갈망하였네.
성 프란치스꼬는 사람들이 봉사할 때
그냥 무상으로 선물로 하길 갈망하였네.
성 프란치스꼬는 사람들이 실직한 사람들에게
무슨 도움이 필요한 지 묻기를 갈망하였네.
성 프란치스꼬는 사람들이 하느님과 그분의 선물에
감사하면서 살아가길 갈망하였네."
모린은 프란치스꼬의 삶의 방식을 모방하였다. 모린은 그의 말을 전하기 위하여 시골로 여행하였을 때 종종 다른 사람들의 환대에 의존하였다. 무슨 일에 있어서나 똑같이 프란치스꼬 식의 가난을 적용한 모린은 복음에 다가서고 부유함을 높이 평가하는 문화에 반대가 되는 증인으로 섰다. 위기의 시대에 교회를 다시 세우기 위한 근거로서 신앙과 관상을 강조하는 모린은 근본적으로 프란치스꼬를 닮았으며, 이와 마찬가지로 가톨릭 교회에 순종하여야 한다는 주장은 분파주의를 피하면서 철저함을 유지했던 프란치스꼬의 능력에서 결정적으로 발견한 주제였다.
무엇보다도 모린의 인격주의, 상처입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인내와 그리고 기쁨에 대한 그의 감각은 프란치스꼬의 삶과 쉽게 비교되며 프란치스꼬의 삶으로부터 그 윤곽을 받았다. 다른 사람들이 프란치스꼬에 대하여 선망만 하고 있을 때 모린은 프란치스꼬 처럼 살려고 노력하였다. 모린은 남아도는 소유믈들을 포기하였으며 자기 손으로 일하였으며 선물로서 봉사하였고 하느님께 감사드리면서 살아갔다.
그러나 모린은 프란치스꼬를 자신의 개인적인 모형 그 이상으로 생각하였다. 프란치스꼬에 관한 교황의 회칙들과 함께 모린은 프란치스꼬의 이상들에 헌신하는 제3회의 활성화가 사회 영역의 재건설에 의미심장하게 공헌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프란치스꼬식 신심의 부흥은 프란치스꼬가 희망했으며, 여러 세기 동안 희석화 되었던 역동적인 평신자 신앙의 재생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이었다. 이러한 목적으로 모린은 복음서들의 복음적인 권고들이 모든 이들에게 해당되며, 새로운 사회는 프란치스꼬식 가르침들과 훈련되어진 이타심 그리고 부드러운 인격주의 위에서 건설된다고 주장하였다.
가난한 자리를 선택한다는 것
현대의 프란치스꼬 추종자로서 모린은 그가 살았던 시대의 가장자리(밑바닥)에 있었다. 새로운 사회질서를 위한 모린의 갈망이 예언적이었던 반면에 이 새로운 질서 속에서 가난이 중심적인 자리를 차지한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그 때문에 주저하게 되는 벽이 되었다. 초세기 그리스도인들에 관하여 말하는 것과 가난의 실천 속에서 신앙과 공동체를 위하여 희생하는 수도원들에 관하여 말하는 것은 같은 의미였다. 그러나 공동체가 현실 속에서 가난하게 되도록 불림 받았다는 것에 대면하도록 하는 것은 또 다른 것이었다. 전 세계의 불황기에 가난이 추구될 수 있을까? 초기 그리스도인들, 아일랜드 수도자들, 그리고 프란치스꼬가 미래 세계에서 더 이상 그런 희생이 필요하지 않기 위하여 자신들이 희생한 것은 아닐까? 가난한 위치(자리)를 선택하는 것이 곤경 중에 있는 사람들에겐 지나친 요구가 아닐까?
비록 많은 질문들이 있었지만 모린의 관점에서 볼 때 답변은 분명하였다. 예수는 인류를 섬기기 위하여 모든 것 심지어는 자신의 생명까지도 주었기 때문에 그는 가난하게 되었다. 예수는 그의 설교에서 하늘나라로 들어가는데 부자들의 어려움을 말하였으며, 자기 인생의 여정에서 스스로 가난한 사람이 되었다. 가난하게 되는 것이 예수를 따르는 것이며 이렇게 함으로써만이 예수가 선포한 구원의 메시지를 구체화시킬 수 있게 된다. 구원의 메시지의 이러한 구체화는 다른 사람들도 따르도록 부추기면서 영성의 중요성을 그들에게 알리는 증거물이 되었다. 가난의 삶을 개인적으로 그리고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것은 또한 공동체에게도 증거가 되었으며 그것은 물질인가 아니면 영인가의 공동체의 방향에 관한 예언적인 질문을 하게 하였다. 가난을 선택함으로써 그 공동체는 구원의 메시지를 실현하였다.
모린에게 있어서 개인적, 공동체적 가난은 영과 자유로 향하는 길이었다. 자유 가운데에 고통이 있다면 예수 또한 고통받았을 것이다. 인간이란 남아도는 재물을 버림으로써 자유롭게 된다. 왜냐하면 삶은 기도와 봉사를 하기 위한 목적에 맞추어져 있으며, 쾌락과 이기심을 충족시키라고 주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동체는 더 이상 물질에 휘둘리지 않아도 되기에 자유롭다. 경쟁 속에서 이익을 추구하는 대신에 공동체는 협력을 권장하고 개인의 영성을 키우는 근본적이고도 가장 중요한 역할을 성취하게 된다.
자발적인 가난이 가져오는 자유와 영은 가장 근본적이고도 도달 가능한 목적이었다. 그리고 지난 수세기 동안 자발적인 가난이 실천되었을 때 사회 현실을 다시 건설하려는 중대하고도 때로는 폭력적이기까지 한 시도들이 있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를 본받으려 하였던 다른 사람들처럼 모린은 프란치스꼬의 가난을 종말론적인 것으로 보았다. 모린에게 있어 프란치스꼬의 삶의 비젼은 그것이 개인과 공동체 안에서 구체화되었을 때 개인과 사회생활의 무기력함과 “주어진 현실”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면서, 역사와 기관들의 억압을 깨뜨리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렇게 프란치스꼬는 개인과 공동체가 하느님께의 전적인 의존을 위하여 돌아서는 변혁 자체를 의미하였다. 모린에게 있어서 이 변혁은 또한 예수의 근본적이고도 철저한 요구들을 희석화 하였던 관료주의로부터 가톨릭 교회와 프란치스꼬 수도회들이 해방되는 것을 의미했다. 모린은 처음부터 끝까지 프란치스꼬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를 원했다.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다는 것
영 안에서 그리스도께 대한 충실함은 모린에게 이 세상에서는 그리스도의 지체에 대한 충실함을 의미하였으며, 불의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스도의 지체에 참여함은 하느님의 현존을 투사하는 이웃에 대한 사랑을 요구하였다.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인간에 대한 가치를 인정하는 것은 딜렘마로 들어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개인의 영적 발전을 방해하는 사회질서를 변화시키는 것이 필수적인 과제가 되기 때문이다. 이와 동시에 개인의 가치는 변화를 향한 운동에서조차 폭력을 받아들일 수 없음을 선포한다. 이처럼 육화는 개혁과 비폭력 모두를 의미한다.
사회 변화와 비폭력에 관한 이러한 딜레마를 살아 낸 사람은 모린 혼자만이 아니었다. 마르틴 부버와 마하트마 간디 같은 잘 알려진 인물들 역시 자신들의 전통 안에서 이러한 질문들을 하곤 했다. 그리고 독자적으로 도달했지만 이 세 사람의 결론들은 비슷하였다. 즉, 세상은 어둠 속으로 움직이고 있으나, 오로지 근본적으로 새로운 방향을 설정함으로써 세상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결론이었다.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방향은 현대 사회가 잊으려고 노력하였던 바로 그러한 전통들의 부활을 통하여 왔으니, 그 전통들은 사람들을 영원성과 연결시킴으로써 그들에게 적절한 의무를 주었던 것이다. 모린의 교회, 부버의 회당, 간디의 아쉬람은 개인과 사회 변화의 씨앗들이 길러질 수 있는 신앙의 장소들이었다.
부버와 간디와의 연관성 안에서 모린을 보는 것은 어떤 이들에겐 적어도 처음엔 어려울지 모른다. 부버는 위대한 유대학자였고 간디는 인도 독립 투쟁의 지도자로서 전세계에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반면에 모린은 뉴욕시의 길거리 모퉁이에서 실업자들과 부랑자들과 함께 그의 시간과 힘을 쏟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한 선동가였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그들의 공통성은 주의를 끌만큼 가치가 있다.
예언적 전통을 되살리는 길
모린은 20세기에 예언적 전통을 되살리는 것으로 부버와 간디와 일치된다. 그리고 그 예언적 전통이란, 시대의 문제들을 직접적으로 개방적으로 생각하고 표현하려는 의지이며, 현실적이라고 여겨지는 정치적, 경제적인 대안들을 거부하는 것, 사회생활과 사적(私的)생활의 인격적 측면을 개발견하려고 시도하는 것,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대변하고 옹호하는 증인으로 살아가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종교적인 비젼을 갖고 정치적인 영역 안으로 움직여 들어가는 것을 기본적으로 의미하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모린은 인격체로서의 인간, 단순함, 중앙분권주의, 비폭력, 신앙 그리고 쇄신의 기초로서 땅을 강조한 부버․간디와 의견을 함께 했다고 할 수 있다.
모린은 가톨릭일꾼운동의 기초가 되었던, 세 가지 부분으로 이루어진 프로그램을 통하여 사회와 인간의 마음 둘 다의 변화를 도모하려고 하였다. 첫 번째로, 사고의 명료화를 위한 원탁 토론이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 -학자, 중산층 그리고 노동자들- 모두가 함께 참석함으로써 문화적인 진부함과 편견들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특별하게 고안되었다. 서로 다른 배경들, 재능들, 그리고 관점들을 지닌 사람들이 함께 하는 모임은 현재와 미래의 가능성에 대한 공통의 이해에 도달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주었다. 토론들은 현실의 병폐를 파악하고, 이상적인 상황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결정하며, 기존의 상황으로부터 변화되어야 할 사회질서로 향하게 하는 길을 식별하는 것에 촛점을 두었다. 이렇게 공동체적인 장치는 현실을 변화시키려는 노력들을 방해하는 계층, 지위간의 차이와 갈등을 완화시켰다.
모린의 프로그램의 두 번째 부분은, 초세기와 중세기 그리스도인 공동체들에서 발견되는 호스피스(빈민, 병자구호소)같은 환대의 집들의 설립이었다. 이 집에서 나그네들과 가난한 사람들, 과부들과 고아들이 그들보다 넉넉한 사람들의 섬김을 받았다. 이러한 구호소들의 재건은 다양한 요구들에 응답하였다. 이들을 위한 주거지와 의복 그리고 음식과 같은 긴급하게 필요한 문제들이 불황의 시기에도 해결될 수 있었다.
구제소를 방문하고 봉사와 희생이 요구되는 환경에 동참하였던 중산층 사람들은 현재의 사회질서가 인간 희생의 대가를 치르고서야 유지될 수 있다는 통찰을 얻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더 이상 실업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으로부터 분리되지 않았으며, 가난한 이들에게 사회질서의 “주어진 상황”은 더 이상 신비가 아니었음이 분명해졌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구제소들은 영적인 작용을 불러일으켰으니, 더욱 많은 부유한 사람들이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라는 그리스도의 계명을 실천함으로써 그들 자신의 구원에도 동참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모린이 ‘농경대학들’ 혹은 공동농장들이라고 부른 것이 그의 프로그램의 세 번째 부분이었다. 그리고 이 부분이 아마도 가장 큰 논쟁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이것들은 땅과 마을식 생활 방식에로 돌아오는 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하여 도시 거주민들에게 농작과 수공업을 훈련시키는 센터들로서 시골에 위치하였다. 여기에는 모린의 제안들을 구체화하는 몇 가지 전형적인 단계들이 있었다. 공동농장들은 도시에선 드물었지만 시골에선 풍부하였던 연료와 음식을 무료로 제공함으로써 불황기에 있는 사람들의 즉각적인 요구들을 채울 수 있었다. 땅으로 돌아가는 것은 좀 더 안정되고 정의로운 사회질서를 세우기 위하여 모린이 산업 사회의 부속물이라고 생각한 기능적이며 주기적인 실업문제를 완화시킬 수 있을 것이었다.
모린은 인격적이고 협동적인 삶에 관한 가장 근본적인 질문들을 계속해서 불러일으키는 프로그램을 발전시켜 나갔다. 부유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환대의 봉사 속에서 서로 관계를 맺게 함으로써 모린은 개인과 사회적 양심에 깊이 있는 도전을 하였다. 사회가 포기한 사람들을 인격적으로 보살피는 것은 상당한 가치가 있으며 심지어는 구원적이라고 까지 생각함으로써 모린은 고통받는 사람들을 추상적으로 그리고 제도적인 방식으로만 다루는 것에 도전을 하였다. 그러므로 개별적인 희생으로 다른 사람들을 보살피는 것은 사회, 경제체제들에 도전을 제기한 것일 뿐만 아니라, 그 시대 사람들의 개인적 공동적 실존의 심장에 자리잡고 있었던 삶과 발전에 관한 인식에 도전을 한 것이었다.
원탁 토론은 고통과 섬김의 이러한 냉소주의와 낭만적인 낙관주의로부터의 자유를 길러 주었다. 또한 구호소들은 개인적 사회적 양심을 정화시킴으로써 어떤 상황에서는 압도적으로 보일지 모르는 당시의 기득권 층이 무색해 지도록 하였다. 어떤 사람에게 가난한 사람들이 더 이상 관념의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면 그 사람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자아는 더 이상 자신과 다른 사람의 고통에 무감각할 수가 없다. 이 고통은 하느님에게서 시작한 원천들에 더욱 더 가까이 인간과 사회를 데려다 주었다.
모린은 구원에 관한 질문을 너무나 심각하게 받아들였으며 따라서 개인과 사회생활 모두가 구원을 중심으로 전개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지나친 풍요로움을 포기하고 개인 생활과 사회생활 모두가 영적인 것에 중심을 두는 것은 예수가 가르쳤던 구원의 길을 따르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렇다면 문제는 이러한 메시지를 키워 가는 삶의 형태는 어떤 것이며 또 어떤 형태의 삶이 그 메시지로부터 이탈되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모린에게 있어서 도시-산업에 근거하고 조직적인 경향과 풍요를 쫓는 그 당시의 삶은 구원을 향하는 인류의 갈망을 키우기 보다 오히려 방해하였다. 구원의 메시지에 응답하는 인간의 자유를 강하게 신뢰했던 모린은 일단 메시지가 제기되면 개인과 공동체 차원의 삶 모두가 그 구원의 문제를 중심으로 숙고하고 움직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마크 H. 엘리스는 미국 텍사스 베일러 대학에서 유다학연구센터 소장으로 재직하면서 유다학을 가르치다 은퇴하였다. 그는 스무 권 이상의 책을 쓰고 편집했다. 그의 대표작은 <해방의 유다신학>, <거룩하지 않은 동맹>, <우리시대의 종교와 포악성>, <예언의 미래: 고대 이스라엘 지혜의 재현> 등이 있다. 그는 유대인이면서도 유대극우주의의 강력한 비판자로 알려져 있으며, 이스라엘의 미래를 팔레스티나와의 평화로운 연대에서 찾고 있다. 최근에는 <불타는 아이들: 가자지구 전쟁에 대한 유대적 관점>(2014), <추방과 예언: 새로운 디아스포라의 이미지>(2015)를 저술하였다.
[출처] <참사람되어> 2000년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