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성령이 영혼들 안에 생생하게 현존하심으로써 말씀이신 하느님을 닮게 하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 하느님의 눈에 “정의로운 것이다”. 그것이 참사랑과 다른 모든 덕의 뿌리다. 그리고 결국 영원한 생명의 씨앗인 것이다: 그것은 거룩한 유산으로 우리가 허락하지 않는 이상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서 빼앗을 수 없다. 그것은 결코 줄어들지 않는 보물이며, “영원히 솟아나는” 살아 있는 샘물이다.
사도 베드로는 그의 첫째 편지의 서두를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에게 무상으로 주신 이 은총의 삶에 대한 즐거운 감사로 시작하고 있다: 그 은총은 우리가 죄 중에 죽어 있을 때에도 주어지는 하느님의 사랑에 충실하기만 하다면,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셨던 바로 그 힘으로 우리를 죽음에서 일으키면서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을 찬양합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우리를 다시 낳아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써 우리에게 산 희망을 안겨 주셨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위하여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시들지도 않는 분깃을 하늘에 마련해 두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의 믿음을 보시고 당신의 힘으로 여러분을 보호해 주시고 마지막 때에 나타나기로 되어 있는 구원을 얻게 하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얼마 동안은 갖가지 시련을 겪으면서 슬퍼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을 순수하게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결국 없어지고 말 황금도 불로 단련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황금보다 훨씬 더 귀한 여러분의 믿음은 많은 단련을 받아 순수한 것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는 날에 칭찬과 영광과 영예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으면서도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보지 못하면서도 믿고 있으며 또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으로 넘쳐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이 결국 영혼을 구원하였기 때문입니다”(베드로 전서 1,3-9).
그리스도교가 신비적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곧 성사 중심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성사는 “신비”로, 그 안에서 하느님께서 활동하시며, 우리의 영혼이 그분과 함께 그분 거룩한 사랑의 자극 아래 활동한다. 우리는 성사들이 우리 안에 계신 거룩한 사랑의 자유로운 영적 활동의 신비한 표징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가시적이며 외적인 행위로 나타나는 성사는 하느님이 우리에게 은총을 주시게 “만드는” 무엇은 아니지만 우리가 은총을 받을 수 있게 한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은총을 무상으로 주신다는 표징이다.
그 표징은 우리에게는 필요하지만 그분께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가슴과 영혼이 그분의 활동에 반응하게 만든다. 그분의 은총은 아무런 외적인 표징이 없이도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으나 그럴 경우 사람들의 대부분은 그 선물의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될 것이고, 그것에 효과적으로 반응하지 못하고 또 사랑을 다해 그것에 응답하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이러한 성스러운 표징들이 우리에 대한 은총의 근거로 필요하지만 그것을 하느님께서 은총을 베풀어야 할 근거로 내세울 수는 없다. 참으로 대비되지 않는가!
만약 하느님께서 그분의 형용할 수 없는 빛을 우리에게 전하시고 그분의 생명을 우리와 공유하시고자 하신다면, 그분 스스로 이 전달과 공유가 이루어질 수 있는 방법을 결정하실 것이다. 그분은 인간에게 자신의 말씀을 들려주시는 것부터 하신다. 인간이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받아들인다면,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 부르심에 응답한다면 그는 세례반(盤)으로 나아간 것이고 우리를 씻어주시는 보속의 강물에 다다른 것이다. 그는 축복 받은 성체로부터 자양분을 얻으며 그것을 통해 주님의 몸을 참된 영적인 식량으로 먹고, 성체를 영원한 구원의 보증으로 삼고 하느님과 영적으로 결혼하게 된다.
예수님은 우리가 신앙뿐만 아니라 전례적인 일치를 통해서도 “그분에게 오기를” 바라신다: 모든 전례, 특히 거룩한 성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와의 일치는 그분 안에서의 신비적인 일치를 뜻하고 상징할 뿐 아니라 그것이 상징하는 바를 실제로 실현시킨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요한 6,57-58).
그리스도인으로서 할 수 있는 가장 거룩한 행위는 성찬례의 신비를 통해 그리스도를 받아 모시는 것으로, 그분의 죽음과 부활에 신비하게 동참함으로써, 정신과 진리 안에서 그분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신앙과 그 신앙의 성사들을 통해 그리스도의 삶에 동참하게 된다. 그리스도적 신비는 교회의 성사를 통한 경배를 통해 구현되며 충족된다. 그러나 그 경배에 참여하기 위해 우리는 우선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구성원이 되어야 한다.
세례를 통해 우리의 영혼은 죄를 씻고 이기적인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며 부패의 노예로부터 해방되어 살아 계신 하느님을 아들로 찬미할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의 신비에 다다르기 위해 우리는 세례를 받을 필요가 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한, 그는 하느님의 왕국에 절대 들어 갈 수 없을 것이다”(요한 3,5).
우리가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신비의 길을 성사들을 통해 이야기 한다면, 성사의 신비가 마술 같은 것이라는 인상을 주지 말아야 한다. 만약 성사들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성향과 대응 여부에 관계없이 사람들에게 무조건 은총을 준다면 그것은 틀림없는 마술이다. 성사는 비록 신자들이 열렬한 헌신이라는 주관적인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긍정적인 효과를 발휘한다. 다시 말해, 성사체제는 그 어떤 상황에서건 효력을 다하지만, 은총은 적절치 못한 사람에게는 전달되지 못한다.
성사는 사랑이 없는 곳에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한다. 예비신자가 물로 세례를 받게 되면 그는 내적으로 깨끗해지고 성령에 의해 변하게 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는 선택과 자아 헌신이 전제되어 있으며 의무를 받아들이고 그리스도교적 삶을 살겠다는 결단을 전제로 한다.
세례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고 자신을 영원히 그리스도께 바치지 않는 이상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한다. 그리고 이것은 죄를 거부하고 사랑의 삶에 헌신함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얻은 새 존재의 존엄성에 걸맞게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하느님의 아들로 살아감을 뜻한다.
“그분을 맞아들이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그들은 혈육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욕망으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것이다”(요한 1,12, 13).
“하느님은 빛이시고 하느님께서는 어둠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어둠 속에서 살아가면서 하느님과 사귀고 있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진리를 좇아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처럼 우리도 빛 가운데서 살고 있으면 우리는 서로 친교를 나누게 되고 그분의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이 씻어 줍니다...
나는 믿음의 자녀인 여러분이 죄를 짓지 않게 하려고 여러분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그러나 혹 누가 죄를 짓더라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의로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친히 제물이 되셨습니다. 우리의 죄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친히 제물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킬 때에 비로소 우리가 하느님을 알고 있다는 것이 확실해집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서 하느님을 알고 있다고 말하는 자는 거짓말쟁이이고 진리를 저버리는 자입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은 진실로 하느님을 완전히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우리가 하느님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기가 하느님 안에서 산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1 요한 1,5-7, 2,1-6).
[원문출처] <Life and Holiness>, 토머스 머튼
[번역문 출처] <참사람되어> 2000년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