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중반의 청년이 민들레국수집에 식사하러 왔습니다. 처음 보는 이였습니다. 부평 역에서 노숙을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일거리를 얻기가 너무 어렵다고 합니다. 돈이 있으면 만화방에서 지내기도 했습니다. 열두 시간에 요금이 팔천 원입니다. 샤워실도 있어서 괜찮았다고 합니다. 계란 프라이를 하나 얹어주었더니 고맙다고 합니다.
며칠 후에 하루 일을 했다면서 박카스를 한 통 들고 왔습니다. 그렇게 조금씩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12월 29일 점심 무렵에 청년이 다시 나타났습니다. 몇 군데에 일자리를 알아봐도 일할 곳이 없다고 합니다. 요즘은 인천공항에서 노숙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복지카드가 있어서 전철은 보증금 오백 원만 있으면 어디든지 다닐 수 있다고 합니다.
인천공항은 따뜻해서 좋은 데 먹는 것을 구하는 것이 너무 어렵다고 합니다. 복지카드가 있고 또 노숙을 하고 있다면 기초생활수급자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조금 도와주기로 했습니다. 오늘부터 1월 3일까지는 찜질방에서 잠을 자고, 밥은 민들레국수집에서 민들레 식구들과 아침을 함께 먹고, 낮 동안은 민들레희망센터에서 지내면서 컵라면으로 요기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찜질방 표 다섯 장과 가운비(찜질방에서 갈아입는 옷) 오천 원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선불 폰을 충전할 수 있도록 만원은 빌려주었습니다.
청년이 살아온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청년은 어릴 때 할머니와 살다가 아마 여섯 살 즈음에 평택의 어느 고아원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고아원 형들에게 무지무지 많이 맞았습니다. 선생님들은 알면서도 모른 체 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만 18세가 되어 400만원 보조금을 받고 고아원에서 나왔습니다. 수원으로 가서 보증금 백만 원에 월 25만원 방을 얻고 사출공장을 다녔습니다. 열두 시간을 일했습니다. 몇 달을 일하다가 주유소에 취직했습니다. 돈도 조금 모았습니다.
친구들도 사귀고 여자 친구도 만나고 그랬습니다. 그러다가 조금 모아둔 돈을 친구에게 빌려주었다가 받지 못했습니다. 다시 살 길이 막막해졌습니다. 겨우 어떤 분의 도움으로 기초생활수급자가 되었습니다. 삼십 몇 만원을 받아 방세 내고 나면 살 길이 막막했습니다. 도저히 수급비만으로는 살 수 없어 다시 주유소 일을 했습니다. 기초생활수급자 자격도 포기했습니다.
호적에는 아버지가 있고 어머니도 있습니다. 어머니를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아니라고 합니다. 호적에 올린다고 이름만 빌려 줬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다른 사람과 살고 있는데 어머니가 누군지 말을 해주지도 않고, 진짜 어려웠을 때 좀 도와달라고 했는데도 대답이 없었습니다.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았습니다. 전단지 돌리는 일도 했습니다. 온종일 걸어 다녔습니다. 불편한 다리지만 계속 하니까 견딜 만 했습니다. 이삿짐센터에서도 일했습니다. 마지막에 인천의 원룸에서 살다가 돈이 하나도 없는 빈털터리가 되었습니다. 결국 칠 개월 전에 거리로 나왔습니다. 막노동을 하면서 돈이 조금 생기면 사우나 또는 찜질방에서 자고 돈이 없으면 노숙하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한쪽 눈이 실명되었고, 다리 때문에 걷는 것도 부자연스런 왜소한 자기를 써 주는 사람 만나기도 쉽지 않습니다.
배가 너무 고프면 간혹 민들레국수집에 밥 먹으러 오기도 했습니다. 세상이 원망스럽지 않은지 물어봤습니다. 힘들면 교회에 가서 기도하면서 지냈답니다. 청년에게 다음 주간에는 기초생활수급자가 될 수 있는지 알아보고, 1월 13일에는 근처 여인숙에 한 달 방세를 미리 내고 주민등록을 옮기고 주소를 만들자고 했습니다. 그렇게 여인숙에서 한 달을 지내고 난 다음에는 민들레국수집 주변에 혼자 지낼 수 있는 집을 마련해 보자고 했습니다.
그렇게 지내다가 LH공사를 통해서 임대주택을 구하게 되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어제 아침을 먹으면서 무언가 자기도 도울 일이 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오전에는 민들레국수집에서 설거지를 거들기로 했습니다. 점심을 먹고 나서는 민들레희망센터에 가서 책을 읽고 독후감 발표를 하고, 이른 저녁을 먹고 찜질방에 자러 가기로 했습니다. 혼자가 아니라서 참 좋다고 합니다.
서영남 베드로
민들레국수집 대표
오래도록 건강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