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께 우리의 온 존재를 열며
기도는 쉬운 일이 아니다. 기도는 우리자신이 아닌 다른 어떤 존재가 우리존재 바로 한 가운데로 들어오는 관계를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의 깊은 곳을 차라리 어둠 속에 묻어 두고 건드리고 싶지 않은 것이 우리의 본성이기에 기도는 더욱 어려운 일이다. 기도에 저항하는 것은 마치 주먹을 꽉 쥐고 저항하는 것과 같다. 이 주먹진 모습은 긴장과 나 자신을 고수하려는 욕망을 보여준다.
기도하도록 초대된다는 것은 우리의 꼭 움켜진 주먹을 펴고 마지막 남은 것을 포기하도록 요청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첫번 기도는 흔히 고통스러운 기도가 된다. 우리는 자신을 포기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좋은 것이 아니어도,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아도 익숙한 것은 더욱 움켜쥔다. 이탈이란 보통 같고 싶은 것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이탈이란 때때로 혐오스러운 것을 포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기도하고 싶을때 먼저 떠오르는 질문은 어떻게 이 움켜진 주먹을 펼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그 길은 “두려워 하지 마라”이다. 우리의 가장 깊은 내면에 들어오고 싶어하는 어떤 존재(절대존재)를 두려워 하지 말고, 우리가 그렇게 맹렬히 집착하고 있는 것들을 가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
자주 우리는 하느님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그분과 똑같은 정도로 되어야 한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이런 자세는 꾸미는 것이고 두려움에 찬 응답일 뿐이다. 그런 응답은 우리를 지치게 만들며 기도가 아니라 고문하게 하는 것이다.
온갖 종류의 두려움들을 지나가도록 내버려 둘때에 우리들의 손은 조금씩 열리기 시작하고 받아들이려는 태도를 갖기 시작한다. 이러한 열림은 끝도 없이 계속 된다. 하나가 열리면 그 뒤에 숨겨졌던 또 하나가 열리고 이렇게 하여 신뢰라는 긴 영적 여행이 이루어 진다.
이때 기도는 억지노력이 아니라 영감적이고 생동감이 있으며, 평화와 고요함으로 가득찰 것이다. 그러면 기도의 순간들은 축제의 시간이며 고요한 시간임을 깨닫게 된다. 그러면 점차 기도한다는 것이 바로 산다는 것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기도와 침묵
우리는 기도와 침묵 사이에 어떤 연결이 있음을 알고 있다. 침묵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두려운 침묵이고 다른 하나는 평화로운 침묵이다.
내적인 침묵은 마음의 침묵이다. 모든 종류의 소리에 잡혀 있는 사람은 내적인 자아와의 만남을 잃어버린 사람이다. 우리가 하루의 시끄러운 일상사를 끝냈을때, 새로운 내면의 소리가 들리고 이 모든 혼란스러운 감정들이 주의를 끌려고 일어나는 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밖의 수 많은 일에서 찾고 있었던 기분전환은 아마도 우리 내면에 있는 문제와의 대면을 피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차분하게 조용하게 홀로 자신과 있다는 것은 잠자는 것과 결코 같을 수 없다. 이 홀로 있음은 온전히 깨어 있어 매우 주의 깊게 내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움직임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뜻한다.
처음에 이 ‘익숙치 않은 지역’에 오게되면 많은 두려움과 불안감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천천히 그리고 확실하게 우리는 집에 있고 싶은 우리의 갈망을 심화시켜주는 어떤 질서와 친근함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새로운 확신으로, 우리는 우리자신의 삶이 내면으로부터 새로와 지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침묵에 다다를때 마다 우리는 ‘선물’을 받은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 선물은 새로운 생활을 약속하는 선물이다. 그 침묵은 우리를 이끌고 계시는 하느님께로 다시 우리를 데려 간다. 이 침묵 중에서 우리는 내몰렸다는 느낌을 받지 않으며 내가 다른것들과 다른 사람들속에서 나 자신일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때에 우리는 강압적으로가 아니라 자유롭게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음을 깨닫는다. 그것은 ‘마음이 가난한’ 침묵인 것이다.
기도와 받아들임
깊은 침묵은 먼저 우리들로 하여금 기도가 '받아들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기도할 때 우리는 세계를 향하여 우리 손을 열게 된다. 기도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지시게 되는 그 열림을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열림은 쉽게 저절로 오는 것은 아니다. 그런 열림은 우리가 하느님이 아니며, 약하고 죄많은 존재임을 고백하여야 가능하며 이런 태도를 갖는 것은 어렵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우리자신이 무력해지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지혜는 이렇게 말한다. “꼿꼿하게 서는 것이 최고야.” 이런 세상의 지혜는 우리들의 내면 생활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이런 기분으로 어떻게 하느님의 선물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의 삶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조차 할 수 있겠는가?
복음은 우리가 갚을 수 없는 선물을 받아들이라는 초대를 하고 있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선물은 하느님의 살아있는 숨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뿜어지는 성령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숨으로 부터 살 때에는, 우리를 살아 있게 하는 그 똑같은 하느님의 숨이 우리의 형제 자매에게도 생명의 원천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기쁘게 인정할 수 있게 된다.
기도는 무엇 보다도 항상 새로우시고 항상 다른 하느님을 향하여 자신을 여는 행위이다. 기도는 우리가 팔을 벌리고 그대로 자연스럽게 있기를 요구한다.
이웃에 관심을 쏟는다는 것은 끊임없이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받아들임은 예수와 그 제자들을 그들이 원하지 않는 곳으로, 십자가로 끌고 갔다. 이 길이 바로 기도하는 사람들의 길이다.
기도와 희망
기도의 침묵 가운데 우리는 자연, 하느님 그리고 동료 인간들을 품기 위하여 손을 펼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받아들임은 우리 한계를 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 할 뿐만 아니라, 어떤 새로운 것이 다가옴을 우리가 기대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모든 기도는 희망의 표현이 된다. 미래에 대하여 기대하는 바가 없다면, 우리는 기도 할 수 없다.
우리들의 마음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수많은 욕구와 기대로 가득차 있다. 믿음이 거의 없는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어떤 안정을 얻기 위하여 현재 상황의 구체적인 조건에 집착하게 만든다.
희망을 가지고 살아 갈 때는 우리의 요구가 어떻게 채워질 것인가에 대한 걱정에 더 이상 휘말리지 않는다. 모든 것을 주시는 분께 대한 무한한 믿음을 표현하는 것, 그것이 중요한 것이다. 선물에 집중하는 믿음이 없는 기도가 아닌, 선물을 주는 분에게 집중하는 믿음이 있는 기도가 진짜이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일어날 것인가는 모르는 채 희망은 약속이 실현 되리라고 기다리는 개방성을 포함한다.
희망을 갖고 기도할 때에도 우리는 여전히 많은 것을 구체적으로 요청하게 된다. 이 요청은 다만 하느님께 대한 무한한 신뢰를 두는 표현이다. 이 희망은 낙담하지 않고 삶을 현실적으로 바라보는 새로운 자유를 우리에게 허락한다.
기도와 연민
만일 우리가 미래를 갖게 된다면, 그것은 타인과 함께 하는 미래가 될 것이다. 기도가 우리의 이웃을 배제하는 어떤 행동으로 간주되는 한 기도에 관해서 아무것도 말 할 수 없는 것이다.
기도는 절대로 반 사회적이나 선 사회적이 될 수 없다.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이웃을 포함시키지 않으면, 그 기도는 진짜 기도가 아니다. 참다운 기도는 그 본질상 사회적으로 중요성을 띄는 것이다.
기도는 그것이 필요하고 없어서는 안 될 것이 될 때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것 없이 살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을 때에야 기도가 되는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 답은 연민이다
기도하는 것은 가짜 안전장치를 포기 하는 것이다. 인간은 가끔 잘못을 저지르는 어떤 존재가 아니며 하느님은 때때로 용서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것이 아니다. 인간존재는 죄인이고 하느님은 사랑이다. 회심이란 이 선명한 사실을 엄청난 단순성과 비무장의 명료함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자신과 하느님을 발견할 뿐 아니라, 또한 이웃도 발견한다. 왜냐하면 이 회심은 우리의 상처 받은 인간 본성에 대한 고통스러운 인정 뿐 아니라 우리가 혼자가 아니며 인간존재는 함께 있는 존재라는 기본 사실도 인정하게 하기 떄문이다. 정확하게 바로 이 순간에, 연민이 태어나게 된다. 이 연민은 동정이나 공감이라는 말로는 그 의미가 완전하게 표현될 수 없다. 동정은 거리감을 유발시킨다. 공감은 그 반대로 거리를 초월하여 독립적으로 친밀함을 뜻한다. 연민은 이와 같은 간격과 독점성을 벗어나는 것이다.
연민은 이웃이 나와 똑같은 인간성을 나누고 있다는 사실을 내적으로(근본적으로) 인정하면서 자라난다. 연민은 우리의 공동 운명을 감히 인정하는 것이다. 또한 연민은 기쁨을 나누는 것이다. 만일 우리의 연민이 기도로 부터 태어난다면, 그 연민은 우리와 모든 백성의 하느님이신 분과의 만남으로 부터 나오는 것이다.
하느님께의 회심은 우리와 함께 이지상에 살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향한 회심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기도와 변혁
우리의 삶 자체가 점점 기도로 변해가면, 우리자신과 이웃을 보다 깊이 이해할 뿐만 아니라, 이 세계의 맥박에 대해서도 보다 깊은 이해를 하게 된다. 우리가 참으로 기도하고 있다면, 세계가 맞붙어 싸우고 있는 문제들에 대하여 심각한 질문을 던질 수 밖에 없게 되며, 회심은 우리자신과 이웃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전 인류 공동체에 필요하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을 것이다. 전세계의 회심이란 ‘거꾸로 되기’, 즉 변혁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살고자 한다면 우리는 항구히 새로운 질서, 새로운 구조, 새로운 삶을 추구해야 한다. 참다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증언적 삶은 변혁적인 증언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이고 모든 것들을 새롭게 만드신다고 고백하기 때문이다.
변혁적인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내적인 힘으로 다른 이들을 매혹시키는 사람들이다. 또한 그들은 그들 주변에서 일어나는 것에 따라 움직이나 그것들이 그들을 억누르거나 흔들리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변혁적인 그리스도인들은 비전에 순종한다. 또한 변혁적인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이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에 무심하지 않으나, 그들 주변에서 보고 들은 것을 그들 자신의 비전에 비추어 평가한다. 그들은 단순히 견디어 내기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향하여 일하기 위해 산다.
이런 변혁가로서의 삶이 기도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기도하는 것은 생존의 껍데기를 걷어내고 우리에게 실제로 다가오는 비전에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그 비젼을 무엇으로 부르든, “보이지 않는 실재”, “전적인 타존재”, “영”, “아버지” 등, 우리는 되풀이 해서 확신있게 말할 수 있다; 변혁을 일으킬 힘, “거꾸로 되기”가 일어날 수 있게 하는 힘은 우리 자신이 갖고 있지 않으며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낸 힘 그리고 영원히 우리와 함께 일치하고 있음을 느끼는 그 힘만이 변혁을 일으키게 한다.
그러므로 기도는,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행동이다. 기도할때, 우리는 사랑으로 자신을 드러낸 힘의 영향에 우리 자신을 열어 놓는다.
그리스도는 가장 확실하게 기도가 하느님의 힘에 참여하는 것임을 드러내신 분이다. 이 하느님의 힘을 통하여 그리스도는 당신의 세계를 거꾸로 돌려 놓으셨다.
기도는 한번 시작하면 우리의 전 삶을 그 안에서 균형 잡아야 하기 때문에 가히 변혁적인 일이다. 기도하는 것은 우리가 지닌 확신으로 부터 끊임없이 벗어나는 것이며 지금 우리가 있는 자리를 넘어서 움직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은 가난을 요구한다.
열린 손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하느님 앞에서 손을 펴는 것이다.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을 작은 소리와 미풍 속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 속에서, 그리고 우리 마음 깊이 고독 속에서 만나게 된다.
기도의 생활은 손을 열고 우리의 약점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우리 자신의 손으로 붙들고 있기보다 하느님에게 이끌리게 두는 것이 우리에게 더욱 좋다는 것을 인식 하는 것이다.
기도하는 것은 사는 것 자체이다. 삶의 모든 순간들 속에서 우리는 점차 삶을 기도로 만들어 가고 우리가 가고 싶지 않은 곳에서도 하느님께로 인도되기 위하여 손을 열어 놓는 것이다.
[출처] <참사람되어> 1997년 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