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디에 가서 기도하는 법을 배울까? 이 영적인 무기 사용을 어디에 가서 배울 수 있을까?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은 피정집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침묵 중에 그리고 지도를 받으며 매년 8일 피정과 월피정을 할 수 있다. 이건 물론 미래의 꿈이지만 바닷가에 위치한 피정집에서 바다의 광활함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경배하고 찬양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이 피정집에는 농경공동체가 함께 있어 모든 피정자들, 즉 노동자들, 빵배급 줄을 섰던 가난한 사람들, 빈민가에서 온 엄마 등의 피정자들에게 줄 식량을 키울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엄마들이 일주일 동안 아이들을 맡겨놓을 탁아소도 있어서 마음놓고 피정을 할 수 있다. 그리고 보다 성숙한 그리스도적 삶을 위하여 피정을 지도해 줄 사제나 교사들은 어디에 있을까? 물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그들을 보내주실 것이다.”
1943년에 쓰여진 위의 글에서 도로시 데이는 시골주변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었던 가톨릭일꾼 농경 공동체에 관하여 보다 장기적인 가능성을 이렇게 그려보고 있었다. 이러한 공동체들은 도시에서 살고 있는 가톨릭일꾼운동 활동가들을 위한 휴식처요 기도와 성찰을 마련해주는 장소일 뿐만 아니라, 가난한 이들, 학생들, 그리고 노동자들에게 필요한 휴식을 제공하고, 가능하다면 기술적, 영성적인 지도를 해 줄 것이다.
농경대학을 세우려는 피터 모린의 비전에서 영감을 받아, 뉴욕 가톨릭일꾼운동은 1936년 펜실바니아 주의 이스톤에 22에이커(1에이커=1224평)의 땅을 샀다. 이 농장에 사는 사람들은 학자들, 노동자들, 집없는 사람들, 대학생들, 어머니들 등등이었다. 그들은 먹을 양식을 키웠고 주말에 원탁토론을 하였으며 때로는 농경공동체, 협동운동, 환대의 집, 노동과 사회주의 등의 주제를 공부하기 위하여 여름학교를 열기도 하였다. 공부하러 오는 사람들 역시 머무는 동안 농장일을 도울 것이었다.
피터 모린 "우리에겐 공동체가 필요하다"
이 때는 공황의 시기였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산업화와 도시화가 사회에 가져오는 심각한 문제들에 해답을 찾기 위하여 애쓰고 있었다. 피터 모린은 농촌에서 태어나 자라난 사람이었으며 땅에 되돌아가는 것을 그 해답으로 보았다.
"우리에겐 공동체가 필요하다,
실업자들을 돕기 위하여.
그들 스스로가 자신을 돕기 위하여,
우리에겐 공동체가 필요하다.
학자들이 노동의 의미를 깨닫기 위하여,
그리고 노동자들이 지식의 의미를 깨닫기 위하여,
눈앞의 이익을 얻기 위한 기술대신
이상과 꿈의 기술을 얻기 위하여,
우리에겐 공동체가 필요하다.
새로운 사회를 창조하기 위하여
낡은 껍데기 안에
새로움의 철학으로,
그것은 새로운 철학이 아닌
아주 오래된 철학이며,
너무 오래된 철학이어서
새로운 것처럼 보이는 철학으로."
모린의 생각에 의하면, 공동체(공산체=共産體)는 공황시기에 무료로 있을 곳과 음식을 마련함으로써 사람들의(가난하고 집없는 이들뿐 아니라 대학졸업의 실업자 포함) 즉각적인 필요를 충족시킬 것이었다. 이어 모린이 산업경제 자체에 내재되었다고 생각한 기술적이며 순환적인 실업의 문제를 약화시키고 나아가 보다 안정되고 정의로운 사회질서 확립에도 기여하는 것이었다.
농경 공동체는 농작법과 수공제조법을 도시거주자들에게 훈련시킬 것이었다. 이러한 훈련과 양성은 또한 점차적으로 땅과 마을생활 방식에로 돌아갈 일반적인 경로를 마련할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농작과 수공으로써 다시한번 이윤보다는 필요에 따라 생산력을 유도하고 장차는 협동의 가치관들과 영적 차원을 재발견하는 근거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기계노동 & 산업화: 가족과 창조적 노동을 파괴한다
모린이 쓴 쉬운 글 「그리스도께 돌아가기, 땅으로 돌아가기」에서 그는 공동체 몰락에 대한 분석에서 출발하여 인간의 자기존중감을 훼손시키는 산업주의와 기계노동을 고발한다. 산업화는 도시화를 강요하고 이어 농촌문화와 가치관을 파괴시킨 비인간적 관계의 체제를 유발시킨 다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산업화, 기계노동은 결국 노동자들의 창조적 노동을 빼앗았다. 공장 직공은 생산에 대하여 아무런 책임도 없고 공장의 작업은 창의성에 대하여 별 관심이 없으므로 노동자는 아무런 지적인 책임감없이 “인간이하”의 조건으로 전락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볼때 산업화와 기계화된 노동은 두개의 기본적인 공동체 집단을 즉 가족과 의미있는 노동이라는 공동체 집단을 파괴시킨 것이다.
농촌과 도시에서 사람들의 태도가 다른 것도 모린에게는 중대한 의미를 주었다. 땅에서 사는 삶은 협력과 필요한 정도만큼의 경제를 장려한다. 도시의 인위적인 세계보다 땅에서 살적에 인생에 대한 사람들의 철학은 기계적이기보다 유기적이며, 개인적이기보다 가족 중심적이 된다. 아이들이 환영받으며 노인네들은 존경을 받는다. 공동체가 이상적으로 추구된다면, 서로의 선을 위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렇게 농작과 수공업 문명 속에서 책임감의 회복과 노동의 전체성(통합성)이 살아나면 자기존중 의식과 존엄성이 살아날 뿐만 아니라 노동자가 배움에 대한 사랑을 느끼기 시작한다. 이러한 변화는 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의 인격적인 상호의존성 때문에, 그리고 각자가 공동체에 중요한 봉사를 하겠다는 책임감을 인식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일꾼공동체 실험, 이스톤 농장
가톨릭일꾼운동 초기에, 이 농경 공동체들은 미국 전역에서 싹을 틔웠다. 공동체들은 다양한 크기였으며 어떤 식으로든지 가까운 도시의 가톨릭일꾼 환대의 집과 연결을 가지려고 노력하였다. 이스톤에 있는 농장에는 1938년도에 50명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오트밀, 옥수수, 감자, 복숭아와 사과나무, 그리고 각종 열매나무들을 키웠다. 그들은 옥외에 빵굽는 오븐을 설치할 계획도 세웠고 신발을 수선하고 옷을 깁고 매일 미사를 할 수 있는 경당도 세울 계획이었다. 작은 그룹을 위한 가정과 존엄성을 인지하는 것외에 이 농경 공동체는 <가톨릭일꾼> 신문 독자들과 친구들이 산업화된 농작에 반대하는 의미로, 즉 삶의 한가지 방식으로서 농작을 이해하도록 촉구하였다.
그러나 이스톤 농경 공동체는 다른 공동체들과 마찬가지로 이상과 멀었다. 그곳에는 여전히 관계의 문제들, 이념의 충돌과 극심한 신체노동이 있었다. 어떤 공동체들은 시작했으나 물, 기금의 부족으로 혹은 어떻게 경작하는지 몰라서 곧 문을 닫았다. 도시에서 온 많은 사람들은 일을 거의 할 수 없었고 공동체의 의도에 대해서도 이해를 하지 못했다.
농장에 왔던 많은 사람들은 경제공황의 피해자들이었으며, 땅에 가톨릭문화를 건설하려는 자원자들이 아니었다. 또한 책이나 예술작품 등 귀중한 물품이 없어지는 경우가 있었고, 자원이 지나치게 낭비되거나 필수품이 모자라는 때도 있었다. 공동생활을 위하여 자발적으로 온 사람들 그리고 가난 때문에 강제로 올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 사이에 드러나는 차이는 괴롭게도 너무 분명한 것이었다.
도로시 역시 공동생활에 합류하는 가족들로부터 일어나는 부수적인 문제들을 간파하고 자서전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가족들은 농경 공동체에 관한 피터의 생각이 오로지 그들만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학자들은 농경대학에 관한 피터의 구상이 그들만을 위한 것이고, 가난하고 병든 이들, 실업자들은 가톨릭일꾼농장이 일반적으로 여성과 아이들과 힘없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들 생각하였다.”
도로시 데이는 피터 모린이 이런 차질들에 대하여 결코 낙담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는 이런 현상들이 단순히 인간의 욕심과 자만심이 얼마나 깊은지 보여주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런 사람들에게 해야 할 응답은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원하는 바를 행하고 살아감으로써 사람들에게 더 좋은 모형을 만들어 보이는 것뿐이라고 정리하였다.
피터는 자신의 역할이 씨를 뿌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 같았다. 생각과 지식, 역사 그리고 참다운 그리스도교적 철학의 씨앗을. 이러한 작업의 수확은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남겨진 역할인 것이다.
서민호 미카엘
미국인으로, 메리놀외방선교회 평신도 선교사였다